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3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16)
“저건 세피노잖아?”
일레시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레니아의 클리엔스인 초록색 털을 지닌 고양이 세피노가 복도 저편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세피노가 요새 내부 시설 안을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고양이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행운이었다.
“네 주인은 지금 어디 있지? 날 좀 데려다 주지 않을래?”
일레시아가 가까이 다가온 세피노에게 물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냉큼 몸을 돌려서 앞장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귀를 알아듣고 자기 주인 이레니아에게 데려다 주려는 모양이었다.
클리엔스와 주인은 코어 수준에서 상호간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그 연결을 끊거나 방해하기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세피노만 따라간다면 틀림 없이 이레니아를 확실하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정말 다행이다.’
일레시아는 새삼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여기서 세피노를 만나지 못했다면, 동력이 끊겨 어둠 컴컴한데다 완전히 낯설기까지 한 이 시설 내에서 도대체 이레니아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무척 막막했던 것이다.
물론 요새 내부 시설의 지도는 아까 던져 놓고 온 구식 태블릿에 저장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차피 그 지도가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도가 있든 없든, 이레니아가 있는 곳에 대한 단서가 하나도 없으니, 어차피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메인 데이터 센터로 가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이 비밀 엘리베이터는 내부 시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으니, 메인 데이터 센터로 찾아가려면 지도의 유무와 상관 없이 어느 정도 헤매는 것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일레시아는 구식 태블릿을 위에 던져 놓는 대신, 메인 데이터 센터가 있는 주변의 지도만큼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암기해 두었다.
운 좋게 지도에서 자신이 암기한 부분과 비슷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무식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그나마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레니아가 어디 있는지 족집게처럼 알려줄 세피노와 딱 마주쳤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클리엔스가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자기 주인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어서 길 안내까지 해줄 수 있다는 말은, 곧 이레니아가 아직 완전히 상실자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레시아가 한층 더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고양이를 쫓아가다 보니, 오래잖아 자신이 지도에서 암기한 부분과 일치하는 형태의 복도와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세피노가 없어도 충분히 메인 데이터 센터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더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세피노, 아까 그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나는 이제부터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으니, 너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혹시 누가 날 쫓아오거든 마찬가지로 길을 안내해 주지 않을래?
만약 내가 무사히 이레니아를 구해낸다면, 나는 즉시 그 엘리베이터로 가서 너와 합류할 거야.”
만약 내가 네 주인을 무사히 구한다면, 이레니아를 데리고 역시 그 엘리베이터로 가서 너와 합류할 거야.”
일레시아가 문득 세피노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여전히 이그시아와 이르피오가 자신을 도와주러 따라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한 말이었다.
고양이는 이번에도 말귀를 잘 알아듣고 고분고분 지금까지 온 길을 되짚어 비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일레시아는 각오를 새삼 단단히 다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각오를 다진 것도 잠시, 부주의하게 모퉁이를 돌다가, 복도 좌우에 쓰러져 있는 2구의 시체에 발이 걸려서 하마터면 피가 흥건한 복도 바닥 위에 넘어질 뻔했다.
이제 금방 이레니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 방심하다가 깜빡 실수를 했던 것이다.
“악!”
일레시아는 겨우 넘어지는 건 면했지만, 각각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죽어 있는 시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복장으로 보아 둘 다 요새의 경비요원인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창에 가슴을 찔려 숨이 끊어진 듯했다.
‘둘 다 정신 공격을 당해서 기절한 사이에 이클리프가 창으로 찔러서 확실하게 죽였을 거야.’
일레시아는 시체만 보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서 새삼 치를 떨었다.
요새의 경비요원이라면 경비팀장인 이클리프의 직속 부하일 것이다.
아무리 정신 조작을 당했다고 해도, 정신을 잃고 기절한 부하를 이렇게 잔인하게 죽여버리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비명 소리는? 혹시 아까 그 아가씨인가?”
곧이어 복도 저편에서 이클리프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일레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아, 거기 있는 내 부하들의 시체를 보고 놀란 모양이로군. 그걸 보고도 아직 날 만나러 올 배짱이 있으면, 어디 한번 여기까지 와 봐라.”
이클리프의 말은 다분히 도발적이었다.
일레시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저런 값싼 도발에 응할 필요는 전혀 없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에 확실하게 암기해 둔 메인 데이터 센터 주변의 지도를 잘 떠올려 보면 우회로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니야, 저 사람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어.
틀림 없이 모종의 수단으로 우회로를 차단해 놓은 다음, 내가 가려는 메인 데이터 센터 입구 부근의 길목을 정확하게 틀어막고 있을 거야.’
일레시아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이클리프가 자신을 반드시 죽이려고 마음 먹는다면 우회로를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창에 맞아 죽을 게 뻔하다.
그런 허무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저 사람하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일레시아가 보기에 이클리프는 전사 기질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비록 적이고 자신 보다 전투력이 약하더라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를 존중해줄 가능성이 높을 터.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다면, 일단 존중을 얻고 나서 다른 수를 생각해 보는 게 상책이 아닐까?
일레시아는 마음을 정하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녀가 머릿속에 외운 지도를 떠올리면서, 눈 앞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든 다음,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자, 당장 긴 창을 짚고 선 채 기다리고 있는 이클리프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요새 내부가 온통 어둠 컴컴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중요한 시설이 있기 때문인지 동력이 살아 있어서 조명도 밝았다.
아까 예상했던 대로 메인 데이터 센터의 입구 앞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왔군. 그럴 줄 알았다. 나한테 정신 공격을 가할 정도의 배짱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말에 겁을 집어 먹을 리는 없겠지.”
이클리프가 여전히 두통이 심한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는 척을 했다.
“네가 찾는 아이는 바로 내 뒤쪽에 있는 메인 데이터 센터에 있다. 다른 길은 내가 이미 다 막아 놓았지.
너 같이 똑똑한 요원도 어쩔 수 없도록, 무거운 잡동사니를 쌓는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말이야.”
이클리프가 묘하게 비웃는 듯한 투로 말했다. 물론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레시아는 저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이제 와서 뒤로 돌아 도망쳐 우회로를 찾아 봤자, 상대방이 마음만 먹으면 냉큼 뒤쫓아와 등 뒤에서 창으로 찔러버리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일 터.
처음 생각한 대로 당당한 태도로 밀고 나가는 게 좋겠다.
“서로 정식으로 인사나 하지. 나는 제 10요새 경비팀 팀장 이클리프. 너는 누구지?”
이클리프가 물었다. 두통을 참아가면서 짐짓 여유를 보이는 것 같았다.
일레시아는 기세에서 눌리지 않겠다는 듯 최대한 냉정하고 쌀쌀 맞게 대답했다.
“기절한 자기 부하들을 창으로 찔러서 죽여 놓고 아직도 경비팀 팀장을 자처하는 겁니까?
저는 관리국 집행부 관리요원 일레시아입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세요.”
이클리프는 일레시아의 그런 태도가 허세로 보이는지 픽 웃었다.
“그래, 나는 한때 내 부하였던 애들을 죽였다.
내 새로운 주인 이사엘라님께서 저들의 정신을 다 조작할 시간이 없으니 혹시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전부 숨통을 끊어 놓으라고 지시하셔서 그대로 따른 것뿐이다.
저기 쓰러져 있는 애들 말고도 이 요새 내부 곳곳에 내 부하들의 시체가 널려 있지. 아마 다들 아무런 고통 없이 죽었을 것이다.”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푼 듯한 말투로군요.
자기 직속 부하들을, 그것도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꺾은 게 아니라 정신을 잃은 사이에 창으로 찔러서 죽여 놓고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일레시아가 강하게 비난하자, 이클리프는 굳이 자기 변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끄럽지 않다. 나는 이미 자존심도 수치심도 다 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까 아까 일루리아의 등 뒤에서 창을 찔렀던 것이고, 지금도 너 정도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죽일 수 있다.”
이클리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창을 들어 일레시아 쪽을 똑바로 가리켰다. 크리스탈룸 결정으로 만들어진 창날이 자줏빛으로 물든 채 이글거렸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 빛깔은 어쩐지 일레시아가 원래 알고 있는 퍼플 아르케 보다 무척 탁하고 어두워 보였다.
“집행부 관리요원이라면 당연히 똑똑하겠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 뻔히 짐작했을 거다.
그런데도 바보 같이 아무 대책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그 배짱과 용기는 정말 가상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속셈이나 한번 들어보자. 설마 자포자기한 건 아니겠지?”
“자포자기한 건 당신이 아닌가요? 자존심도 수치심도 다 버렸다면서요? 거기다 한눈에 봐도 인생 다 포기한 사람 같은 눈빛을 하고 있군요.”
사실 일레시아로서는 이 와중에 상대방의 눈빛을 자세히 분석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기 싸움에서 밀리기 싫어서 대충 찔러본 말이었다.
하지만 이클리프는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네 말이 맞다. 난 자포자기했어. 이젠 정말 뭘 더 해볼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이아테스와 한바탕 멋지게 겨루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이미 내 창에 찔려서 폐기물과 함께 지하 열수층으로 쓸려가 버렸지.
그 다음에는 새로 주인으로 모시게 된 이사엘라님을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려고 전설의 영웅 일루리아를 창으로 찌르기도 했는데, 이제 이사엘라님은 클라데스화가 진행되어 나 같은 게 도와드릴 방법이라곤 전혀 없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기서 세상이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뿐. 아니, 그 전에 내 코어가 먼저 망가지게 될지도 모르지. 자포자기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이클리프는 자기 스스로 목 뒤에 타베스 칩을 삽입하여 코어의 출력을 강제로 상승시켰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이르피오와 이그시아처럼 조만간 코어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터였다.
어차피 잠시 후 이 행성이 멸망하게 될 거라고 믿는 그의 입장에서는 상실자가 되든 말든 별로 중요하지 않을 법도 한데, 자기 코어가 망가진다는 말을 할 때에는 어쩐지 표정이 묘하게 쓸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일레시아, 아까 즉석에서 정신 공격을 가했을 때는 정말 대단했다. 솔직히 감탄했어.
임기응변의 재주도 대단했지만, 목숨을 걸고 일루리아를 도와주려고 한 투지가 더 놀랍더군.
난 평소 집행부 관리요원들은 그저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책상물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내심 무시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카리타스 오리지널 중에는 너처럼 우수한 인재가 많은가?”
이클리프가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일레시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왕 자포자기했다면 길을 비켜줄 수 없나요? 나는 반드시 이레니아를 구해야 돼요.”
“어째서? 잠시 후면 이 행성 전체가 이사엘라님에게 집어삼켜져서 멸망하게 될 텐데, 이제 와서 그 이레니아라는 아이를 구해서 도대체 뭘 하려고?
둘이 같이 세상이 멸망 당하는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게 맛보고 싶은 것이냐?”
이클리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물론 저 사람이 이 행성이 멸망하리라고 굳게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레시아는 일루리아가 이 대륙과 행성을 구해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서로의 믿음에 대한 문제로 굳이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레니아와 저는 같은 배양 캡슐 안에서 같은 배양액을 먹고 자란 자매 같은 사이니까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요.
조만간 이 행성이 아니라 온 은하계가 다 멸망한다고 해도, 일단 이레니아를 구해낸 다음 멸망의 순간을 함께할 거예요.”
일레시아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이클리프는 문득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