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87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73)

현재 텍스툼은 이스카엘이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는데 협력하여 공을 세운 다음, 텍스툼이 사전에 파견해둔 첩보선을 타고 행성 카리타스를 탈출하여, 그대로 텍스툼의 본거지인 솔룸 행성으로 오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곧 있으면 멸망하게 될 행성에서 도망칠 예정인 사람이 급진파를 휘하에 두려고 한다? 그건 누가 봐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텍스툼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이스카엘이 처음부터 행성 카리타스를 멸망시키고 탈출할 생각이 없었으며, 다른 이유가 있어서 자신들을 속인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격노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물론 어차피 나중에는 다 밝혀질 일이었으나, 아직까지는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통신 연결이 되지 않던데요. 혹시 이니에스와 통신을 하신 겁니까?

저쪽에서 혹시 급진파와의 관계를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던가요?”

이덴바르가 문득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그래. 이니에스하고 통신을 했어.

이사엘라가 감사 인사를 핑계로 연락을 해와서 자신의 속내를 떠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더군.

그런 다음에는 이니에스가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내 진의를 알아보려고 하지 뭔가?

성녀가 스스로 희생하여 겨우 지켜낸 이 대륙을 정말 멸망시킬 작정이냐, 텍스툼 상층부에서는 당신의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면서 집요하게 캐묻더란 말이야.

정말 웃긴 일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지, 이스카엘이 가볍게 실소하면서 대답했다.

“언젠가 이니에스가 작정하고 우리의 진의를 진지하게 따져 물을 거라는 예상은 진작부터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이스카엘님이 얼마 후 첩보선을 타고 이 행성을 탈출하여 텍스툼의 본거지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이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진의를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텍스툼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줬지. 전에 자네한테 들려준 모범 답안 있잖아? 그걸 거의 그대로 들려줬어.”

“그 모범 답안을 거의 그대로 들려줬다고요? 그럼, 저쪽에서 틀림 없이 의심할 텐데요.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 놓지 않고 자기네가 듣기 좋은 말만 주워섬겼다는 게 너무나도 뻔히 드러나 보이니까요.”

이덴바르가 조금 걱정스러워 했지만, 이스카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의심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게 최선이야. 한번 잘 생각해 봐.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어차피 저쪽에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잖아?

그냥 아무개도 아니고, 성녀의 희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한때 자비의 대륙 관리국의 공동 국장이었던 내가, 난데없이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고 텍스툼에 귀순하겠다는 뜻을 밝힌 거야.

그런데 의심을 안 받을 도리가 있겠나?”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기 때문에, 이덴바르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이래도 의심 받고 저래도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다소 의심은 하더라도 당장 뭐라고 트집 잡기는 어려운 모범 답안을 말하는 게 낫지.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말한 거야.

이스카엘이란 놈이 어째 좀 수상해 보이긴 해도, 일단 본거지인 솔룸 행성으로 데려와서 무슨 저의가 있는지 철저하게 심문해 보자.

텍스툼측이 이렇게만 생각하게 만들어도 나로서는 큰 성공이지."

“그렇죠. 그냥 의심을 품는 수준을 넘어서,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니에스가 이 대륙에 있는 텍스툼의 첩보 요원들과 함께 도망쳐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이스카엘이 이번 계획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목표는 바로 이니에스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덴바르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스카엘은 이니에스와 텍스툼이 기대하는 것처럼, 정말로 타베스를 이용하여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킬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텍스툼이라는 신흥 세력에 대해 전혀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텍스툼이 추구하는 엄격한 통제주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때문에 앞으로 저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지 차근차근 생각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툼에 귀순하지는 않더라도, 그들과의 연줄을 아예 끊어버려서도 안되었다.

즉, 자신이 저쪽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확실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텍스툼과의 연결고리로서 이니에스의 신병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니에스의 신병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만, 행성 카리타스의 대기권 밖에 대기하고 있다는 블랙 코어를 지닌 텍스툼측 요원의 신병도 확보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급진파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데, 과연 그 요원이 안심하고 지상으로 강하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덴바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카엘이 이번에 달성하고자 하는 세 번째 목표는 바로 블랙 코어를 손에 넣는 일이었다.

나중에는 진의가 드러나더라도 지금은 텍스툼을 속여 넘겨야만 하는 까닭은, 블랙 코어를 지닌 텍스툼측 요원이 안심하고 이곳에 내려오도록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 요원이 지닌 블랙 코어가 톡시쿰, 급진파가 자비의 대륙과 관련된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 바로 그 치료약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으니까.

즉, 이스카엘이 블랙 코어를 손에 넣는다면, 급진파가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카드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구인류와 달리 현재 은하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우주에 충만한 아르케와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신체 기관인 누스 영역이 대뇌에 특별히 발달되어 있었다.

마치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말하는 방법과 걷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누스 영역이 있는 사람은 원래 성장하면서 특별한 기능체인 코어가 최소한 1개 이상 머릿속에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코어란 것은, 사람이 본격적으로 아르케를 실체화시켜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사람들의 경우, 분명히 대뇌에 누스 영역이 발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코어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례가 있었다.

일단 코어가 만들어졌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능이 상실된 ‘후천적 상실자’와 대비하여, 처음부터 코어가 만들어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은 ‘선천적 상실자’라고 불렸다.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이 바로 선천적 상실자들이었다.

가장 답답한 점은 선천적 상실자가 되는 이유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은하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르케의 영향으로 인해 구인류와 같은 방법으로는 후손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코어를 중추로 삼아서 온몸을 끊임 없이 순환하는 아르케가 신체의 면역력과 복원력을 지나치게 강화시키는 바람에, 타인의 생식 세포가 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탓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 결과, 싫든 좋든 다들 부모의 몸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적절히 조합하여 새로운 유전자를 디자인하고, 그 유전자를 이용하여 배양 캡슐 안에서 아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후손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제국 황실의 후계자도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유전자를 신중하게 조합하더라도, 캡슐에서 배양된 아기 가운데 낮은 확률이지만 꾸준히 선천적 상실자가 나온다는 것이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유전병이 아니라면 도대체 선천적 상실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이란 말인가?

선천적 상실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저 몇 가지 가설만 제기되었을 뿐이었지만, 그 외 선천적 상실자에 대해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생물학적 부모가 상실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녀는 낮은 확률로 상실자가 될 수 있다.

둘째, 생물학적 부모 가운데 한쪽이 상실자인 경우, 아무리 신중하게 유전자를 조합하더라도 자녀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상실자가 된다.

셋째, 생물학적 부모가 둘 다 상실자인 경우, 자녀는 100% 상실자가 된다.

상실자는 코어가 없기 때문에 구인류와 같은 방식으로 후손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전자 조합으로 캡슐에서 배양을 해서 후손을 남기든, 구인류와 같은 방식으로 후손을 남기든, 어느 쪽이든 자녀가 100% 상실자가 된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이스카엘의 머릿속에서는, 오래 전, 선천적 상실자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떠올랐을 때,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바탕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논쟁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이베리스와 함께 그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오갔던 이야기들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선천적 상실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논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이 해결책으로 제시된 바 있었다.

제 1안: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선천적 상실자를 그냥 사회에 방치한다.

이건 애당초 말이 안 되는 방안이었다.

선천적 상실자는 코어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현재의 인류 사회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상실자가 아닌 배우자와 후손을 남기기라도 하면, 상실자와 비상실자 부모 사이에서는 높은 확률로 상실자 자녀가 나오게 되니, 결과적으로 상실자가 점점 늘어나는 사태가 초래될 게 뻔했다.

따라서 상실자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 거의 이의가 없었다.

제 2안: 그렇다면 불쌍하지만 전부 없애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선천적 상실자가 사회에는 아무 쓸모가 없고, 가만 내버려두면 상실자가 증가되는 사태만 초래될 터이니, 아무리 불쌍해도 전부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의 그야말로 냉혹한 우생학적 주장을 한 사람도 물론 없지 않았다.

실제로 극단적인 코어 본위 능력주의를 추구하는 텍스툼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선천적 상실자 문제를 처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전 은하계가 모두 그런 주장에 선뜻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 내에서는, 자신의 생물학적 후손이 아무리 선천적 상실자라고 해도 차마 제거해 버릴 수는 없다면서, 저런 우생학적 주장에 크나큰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텍스툼은 그런 거부감과 혐오감을 구인류 시대의 잔재이며, 낡은 사고 방식이라고 비난하곤 했지만 말이다.

제 3안: 선천적 상실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보호한다.

사회에 방치해 둘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면?

그렇다면 남은 해결책은 불쌍한 상실자들을 어딘가에 모아 놓고 보호하는 방법뿐이 아닌가?

최종적으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은 바로 이 방법이었다.

다만, 그 해결책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거대한 보호 시설이 필요했다.

은하계 전역의 수많은 선천적 상실자들을 모아놓고 보호하면서, 자기들끼리 사회를 만들어서 자아를 실현하고 후손도 남길 수도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대륙 규모 이상의 거대한 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 행성 카리타스에 거대한 보호 시설이 만들어진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후 한동안은 행성 카리타스와 자비의 대륙 같은 보호 시설이, 선천적 상실자 문제에 대한 거의 유일하게 그럴듯한 해결책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나중에 한가지 새로운 방안이 부상하면서 논란에 다시 불이 붙고 말았다.

제 4안: 선천적 상실자들을 치료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만든다.

상실자를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은, 사실 지극히 우연하게 탄생한 아이디어였다.

어떤 전투요원의 코어가 몸 안에 대량으로 침입한 타베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과도하게 활성화되었고, 그 결과 과부하로 인해 기능을 상실했으며, 해당 전투요원은 끝내 후천적 상실자가 되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그 사례를 연구하던 와중에, 혹시 타베스를 인위적으로 주입하면, 기능이 상실된 코어가 다시 한번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복구되지 않으려나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이다.

물론 그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타베스에 의해 활성화된 코어가 기능을 상실하는 사례는 계속 보고되는 반면, 거꾸로 기능을 상실한 코어가 복구된 경우는 아직 확인된 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최소한 실체화된 타베스를 농축시킨 크리스탈룸 칩을 신체에 삽입하면 그로 인해 코어가 자극을 받아서 크게 활성화된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하게 확인되었으며, 연구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타베스를 이용한 상실자 치료법 연구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타베스를 선천적 상실자에게 주입하면 코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발상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발상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톡시툼이라는 치료약이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찬반 논쟁이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는 역시나 타베스를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