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81화: 아들들의 전쟁 (12)
서쪽 초원 지대에서 가장 강력한 칼빈 부족의 젊은 부족장 카로이.
그 자는 나이가 카란드라 보다 불과 몇 살 더 많은 정도였지만, 이미 케르비오 영토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선왕 카라미르가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을 선언했을 당시, 그가 플로젠 왕국 보다 네필린 공화국을 주된 적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면서 끝까지 협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냥 협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서쪽 부족을 전체를 선동하여 카라미르를 전혀 돕지 못하도록 했다.
그 바람에 카라미르는, 귀중한 정예 기병 및 약 6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서쪽 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페레이즈 태자와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때문에 카라미르의 아들딸들은 만약 서쪽 부족들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절반인 3만명만이라도 지원해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지금까지도 ‘만약 만약’ 운운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6개월 전 전투에서 페레이즈를 총 9만 대군으로 협공할 수 있었을 터이며, 페레이즈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거라는 부질 없는 상상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평소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인물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카르스덴이 선왕에 대한 복수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들다니!
카란드라로서는 실로 분통이 터지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 확실한 증거도 없는 그런 추측을 공개석상에서 함부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여러분이야 말로 뭔가 크게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샤먼의 숫자는 우리들이 멋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조상신의 선택과 계시를 통해 선정되는 것이니까요.
조상신의 계시가 단 한 명의 샤먼에게만 내렸는데, 우리가 멋대로 샤먼을 세 명 뽑는다면, 그건 조상신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꼭 그렇게 해서 억지로 샤먼의 숫자를 늘려야 한단 말입니까?”
카란드라가 준엄하게 질책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부족 대표 가운데 한 명이 재차 반박했다.
“하지만 조상신의 계시가 카란드라님, 당신 한 분에게만 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카란드라님의 말밖에 없지 않소?
바로 그게 문제라서 샤먼의 숫자를 늘려야 한단 말이오.
예를 들어서, 카란드라님이 갑자기 조상신의 계시가 내렸다면서, 동생분인 카르스덴 왕자님을 새로운 케르비오 국왕으로 추대하자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겠소?”
그 부족 대표는 카란드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다 말씀 드리리다.
솔직히 말해, 우리로서는 카란드라님이 조상신의 계시를 근거로 카르스덴 왕자님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복종하기가 망설여질 것이오.
왜냐하면 카란드라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진짜 조상신의 계시를 그대로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동생분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일념 하나로 계시의 내용을 슬쩍 바꾸었는지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오.
혹시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카란드라님도 설마 우리가 그렇게 쉽게 복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요.”
카란드라가 미처 불쾌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른 부족 대표가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렇소. 지금처럼 카란드라님이 유일한 샤먼인 상황에서는, 카란드라님, 당신이 카르스덴 왕자님에 대해서 무슨 좋은 말을 해도, 절대 복종하는 북쪽 초원 지대 부족들 이외에는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을 게 분명하오.
이런 상황은 우리 케르비오 족 전체의 앞날을 위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지 않소? 이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샤먼을 셋으로 늘리는 것밖에 없소.
이건 카란드라님이나 카르스덴 왕자님한테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만
약 샤먼이 세 명인데, 그 세 명이 모두 카르스덴 왕자님을 새로운 케르비오 국왕으로 추대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진심으로 승복하고 충성을 다할 테니까 말이오.”
그 부족 대표는 카란드라를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조상신의 뜻이 진정으로 카르스덴 왕자님이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샤먼이 한 명이든 세 명이든 그 계시를 전하는 말이 달라질 리 없지 않소?
만약 카란드라님이 여태껏 조상신의 계시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 왔다면, 샤먼이 세 명이 아니라 백 명이 되더라도 아무 것도 걱정할 게 없으리라 믿소.”
또 다른 부족 대표는 아예 더 성질 급하게 발벗고 나섰다.
“북쪽 평야 지대를 대표하는 샤먼은 카란드라님이고, 서쪽 초원 지대에도 페르구스라는 이름의 샤먼이 이미 선출되었다고 들었소.
이왕 한자리에 모인 김에, 우리도 중부 산악 지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샤먼을 빨리 선출하면 어떻겠소?
적어도 부족장이나 부족장의 직계 가족 가운데 후보라도 몇 사람 뽑아둡시다. 그래야 북쪽과 서쪽사람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게 아니겠소?”
마치 샤먼이 세 명으로 늘어나는 것이 이미 결정된 듯한 말투였다.
몇 사람의 부족 대표가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면서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나머지 부족 대표들은 얼떨결에 자기 주관을 잃고 그 자신감에 휩쓸려 버린 듯했다.
물론 이 자리에는 카란드라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예를 들어, 케렌 부족의 대표이자, 키오나의 오빠이며, 늙은 족장의 아들인 칸레이라는 젊은이가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역시 카란드라의 열성적인 지지자였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서서 다른 부족 대표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었다.
다만, 그래 봤자 현장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고, 괜히 케렌 부족이 이웃 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싫든 좋든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당사자인 카란드라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샤먼 직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조상신의 계시가 저한테만 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제 말 밖에 없다고 하셨나요?
그래서 진심으로 제 동생에게 충성하고 싶어도 못 미더워서 어렵다고 하셨나요? 좋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 조상신의 계시를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부족 대표 가운데 한 명이 당장 물어보았다.
“19일 밤에 카르몬 요새 옆에 있는 성스러운 나무에서 희생제를 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조상신의 특별한 계시를 받아서 임명된 샤먼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해 보일 겁니다.”
그 부족 대표가 다시 따져 물었다.
“희생제를 연다면 마땅히 제물이 있어야 할 터인데, 뭘 제물로 바칠 거요? 설마······”
카란드라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제 동생 카르스덴 왕자가 포로로 잡은 플로젠 병사를 제물로 바칠 겁니다.
이미 제가 파로크 성채로 전령을 보내서, 포로 가운데 한 명을 이리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아마도 19일 밤에는 도착하게 될 것이니, 제물이 도착하는 대로 제가 직접 희생제를 집전하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부족 대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여보시오, 카란드라님, 아까 우리가 한 말을 못 들었소?
플로젠의 대대 병력을 함정에 빠뜨려 전멸시키는 바람에 페레이즈의 분노를 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포로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한단 말이오?
그랬다가는 페레이즈가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거요.”
누가 뭐라고 해도, 카란드라는 희생제 문제만큼은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플로젠 병력 1천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에 한 명 더 사망자를 늘린다고 해서 페레이즈가 화를 더 내 봐야 얼마나 더 내겠습니까?
그게 무서워서 희생제를 올리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산악 지대 부족들이 이렇게 겁이 많았던 겁니까?”
“겁이 많은 게 아니라, 아까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북쪽 평야 지대 사람들과 페레이즈 사이의 분쟁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끼어들기가 싫은 거요.
북쪽 땅에서 플로젠 병사를 제물로 바치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좋소.
하지만 카르몬 요새 옆에 있는 성스러운 나무에서 플로젠 병사를 제물로 바친다면, 그건 이제 페레이즈와 산악 지대 부족들의 문제가 되는 거요.
설마 카란드라님은 조상신의 계시를 증명하겠다는 핑계로, 우리와 페레이즈를 싸움 붙이려는 거 아니오?
우리가 카르스덴 왕자님한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으려는 게 진짜 의도가 아니냔 말이오. 솔직히 말해 보시오.”
부족 대표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 사람은 아까 자기네 부족의 젊은이들이 6개월 전에 페레이즈와 싸우다가 너무 많이 죽어서 지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보낼 병력이 없다고 불평했던 바로 그 부족장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은 칸레이가 불쑥 입을 열어서 카란드라를 거들고 나섰다.
“우리와 페레이즈를 싸움 붙이려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우리는 이미 싫든 좋든 페레이즈와 적이 된지 오래입니다.
6개월 전의 전쟁에서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페레이즈와 몇 차례 국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산악 지대 부족 젊은이 가운데 참전했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아시잖습니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페레이즈의 손에 의해 참살 당했는데 우리가 플로젠 병사 한 명을 제물로 바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됩니다.”
“칸레이, 자네는 어떻게든 카란드라님을 편들고 싶은 모양인데, 지원군을 더 보내고 싶으면 자네가 직접 자네 부족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모두 데리고 가게!
내 부족 같은 경우는 젊은이들이 몇 명 남지 않아서, 심지어 노인과 어린애들이 사냥을 하고 나무를 베는 실정이란 말이야!”
앞선 부족 대표가 언성을 높여 반론하는 바람에 칸레이와 그 사람 사이에 한바탕 격한 논쟁이 벌어질 듯한 조짐이 보였다.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는 카란드라가 얼른 끼어들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19일 밤에 제물을 바쳤는데도 조상신의 계시를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한다면, 저는 샤먼을 셋으로 늘리는 것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저 자신은 샤먼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날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페레이즈가 혹시라도 산악 지대 부족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제가 직접 페레이즈를 찾아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산악 지대 부족들과 무관함을 밝히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조상신의 계시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란드라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샤먼을 셋으로 늘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했던 부족 대표들은 자기네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잠시 동안 의논했다.
오래잖아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방금 그 말, 엄숙한 서약이라고 믿어도 되겠소? 여기 있는 모든 부족 대표들이 증인이니 나중에 말을 바꾸면 안 되오.
그러면 샤먼 직책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오.”
“네, 압니다. 엄숙하게 서약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플로젠 병사를 제물로 바쳐서 희생제를 집전하는 것에 동의하시는 거겠죠?”
카란드라는 스스로 서약을 함과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도 서약을 받아내려고 했다.
이에 부족 대표들이 동의함으로써 어렵게 합의점이 도출되었다.
카란드라는 19일 밤에 플로젠 병사를 제물로 바쳐서 희생제를 집전하고, 그 희생제에서 조상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샤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샤먼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터였다.
여기까지 의논을 마친 부족 대표들은, 19일 밤에 카르몬 요새 옆의 성스러운 나무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다음 모두 해산했다.
그 직후, 카란드라는 숨돌릴 틈도 없이, 확실한 자기편인 케렌 부족 사람들을 모아 놓고 희생제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확실한 심복인 키오나, 부족 대표 회의에도 참석했던 키오나의 오빠 칸레이.
그 외에도 칸레이와 키오나의 남동생인 키에란, 키오나의 아버지이자 케렌 부족의 늙은 부족장인 클로리안 등 4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었다.
“카란드라님과 형님께서 부족 대표 회의에 참석하고 계신 동안 부족 정찰병이 달려와서 보고했습니다.
칼빈 부족의 카로이가 직접 수천 명의 병력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공교롭게도 희생제가 열리는 19일 밤이 아니면 20일 아침에 카르몬 요새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키에란이 먼저 상관에게 보고하는 듯한 투로 카란드라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래, 이게 다 카로이, 그 놈이 꾸민 짓이었어!
마음 같아서는 그 놈이 여기 오기 전에 희생제를 끝내버리고 싶지만, 가장 중요한 제물인 플로젠의 포로가 더 일찍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이거 참 짜증나게 됐네.”
카란드라가 짜증스럽게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칸레이가 입을 열었다.
“현재 서쪽 초원 지대는 카로이를 확실하게 지지하고, 북쪽 평야 지대는 카르스덴 왕자님을 지지합니다.
즉, 이곳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국왕이 누가 되는지가 결정될 겁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카로이 쪽이 조금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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