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36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22)
코어 기능 상실.
이것은 선천적으로 코어를 단 하나도 각성하지 못하는 자비의 대륙 거주민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관리국 요원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마음 한쪽 구석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선천적 상실자인 자비의 대륙 거주민은 관리국의 체계적인 보호를 받지 않고서는 은하계 어디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
그러한 사실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관리국 요원들이었으니, 자신들도 언젠가 저런 한심한 꼴이 되면 어쩌나 하면서 괜히 걱정스럽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평소부터 은근히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일이 지금 이그시아와 이르피오에게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그시아가 가지고 있던 1개의 레드 코어와 1개의 화이트 코어, 이르피오가 가지고 있던 2개의 레드 코어는 이제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맨 처음 코어를 각성한 이후 줄곧 두 사람의 몸을 순환하면서 신체를 보호 및 강화해주고 있던 아르케의 가호 또한 전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들 두 사람은 오래 전에 멸망한 구인류 혹은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전 은하계에 충만한 아르케의 힘을 전혀 인식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런 젠장!”
이그시아와 이르피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끈지끈 아프던 머리가 갑자기 이상하다 싶을 만큼 개운하고 편안해지자, 자신들의 코어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퍼뜩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치 앓던 이가 쑥 빠져나간 것처럼 어쨌든 고통에서 해방되긴 했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진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자비의 대륙 지상 거주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폐인, 즉, ‘후천적 상실자’ 신세가 되었으니까.
평소 무척 두려워하면서 제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기원했던 일이 정확히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느낀 절망과 원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항상 열등하다면서 경멸하고 업신여기던 자들과 동일한 신세가 되었다는 수치심과 모멸감도 극도로 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피눈물 보다 더 진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다만 자비의 대륙과 대륙 관리국을 무수히 저주하고 욕할 뿐이었다.
이제는 상실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저주하고 욕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현실이기도 했다.
자신들을 배양 캡슐에서 유전자 합성으로 맞춤 기계처럼 만들어 내어 한 평생 실컷 부려먹다가, 결국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상실자가 되게 만든 자비의 대륙 관리국, 그리고 그 관리국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인 자비의 대륙.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자비의 대륙과 관리국을 위해 억지로 봉사하다가 끝내 상실자가 된 두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대륙이고 관리국이고 모두 다 박살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마음 속에 가득 찬 부정적인 감정의 크기는, 어쩌면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클라데스가 되어버린 이사엘라에 못지 않을 수도 있었다.
“딱한 것들. 너희는 지금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니 죽이진 않겠다.
상실자가 된 이상, 어차피 죽든 살든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원망의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하염없이 저주의 말을 늘어 놓는 두 사람 앞에서, 이클리프가 쓴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사실 저런 절망적인 모습은 그의 입장에서도 완전히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 또한 머릿속에 타베스 칩을 삽입하여 일시적으로 출력이 상승된 상태. 따라서 가만 있어도 조만간 저들처럼 상실자가 될 터였다.
머리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똑똑히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 앞에서 방금 전까지 펄펄 날아다니다가 상실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듯했다.
“아니, 저건?”
그러다가 문득 메인 데이터 센터 입구 쪽에 시선이 미치는 순간, 이클리프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거기에는 바로 이아테스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묵직한 양손 대검처럼 보이는 무기를 지팡이처럼 바닥에 짚은 채로 말이다.
“이아테스, 정말 살아있었군. 거짓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어떻게······?”
이클리프가 놀라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지금껏 치열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한쪽에 숨어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일레시아도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대충 지껄인 거짓말이 공교롭게도 사실로 드러났으니까.
이아테스는 복부에 남아 있는 관통상 흔적을 비롯해서 온몸에 화상 자국이 있는 등 만신창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거기다 대검을 들고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기까지 했다.
“일루리아님께서 나를 구해주셨다.”
이아테스가 경악한 이클리프를 향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금 전 눈 앞에서 자기 부하들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상실자가 되는 꼴을 보았기 때문에 도저히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는데, 이클리프는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서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서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다만, 일레시아는 이아테스의 복잡한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전설의 영웅이 너를 구해줬단 말이지? 놀랍군.
그럼, 왜 부하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 않고, 여기로 온 거냐? 설마 아까 못다한 나와의 결투를 마저 끝내기 위함이란 말이냐?”
이클리프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묻자, 이아테스는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전한 곳? 네 새로운 주인 이사엘라가 이렇게 무섭게 날뛰고 있는데, 이 섬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너와의 결투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다만 저 아가씨를 도와달라는 일루리아님과의 약속을 지키러 온 것뿐이다.”
이 말을 듣자 이클리프는 피식 웃으면서, 갑자기 일레시아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물론 이아테스가 실제로 살아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위협 동작일 뿐이었다.
일레시아도 그런 상대방의 속마음을 뻔히 짐작했기 때문에, 함부로 이클리프를 자극할만한 경거망동을 하지는 않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대신 마음 속으로 여차하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아테스, 넌 정말 바보스러울 만큼 책임감이 강하구나.
이 와중에 난데없이 관리국이 아니라 일루리아에게 충성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단 말이냐?
만약 내가 이 아가씨를 죽이겠다고 한다면 넌 어쩔 테냐?”
다소 여유를 찾은 이클리프가 다소 빈정거림을 섞어서 묻자, 이아테스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싸워서 널 죽일 수밖에 없다.”
이아테스는 바닥에 짚고 있던 대검을 양손으로 번쩍 치켜든 채, 천천히 메인 데이터 센터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래, 그거야.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바야.”
이클리프도 무척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창을 들고 이아테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살짝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다만, 실제로 느끼는 긴장의 크기를 따지자면 이아테스 쪽이 아무래도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실력이 앞서는 이클리프의 허점을 노려 단숨에 결판을 내야 한다는 점이 특히나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아끼는 부하 두 명이 상실자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무척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었다.
빨리 결판을 내고 부하들의 상태를 살피고 위로해 주러 가고 싶었다.
거기다 그는 일루리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일레시아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까지 신경 써야만 하는 처지였다.
반면에 이클리프는 진작에 인생의 모든 희망을 다 포기하고 마음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이아테스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에 상당히 들떠 있었다.
따라서 다소 긴장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큰 심적 부담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상실자가 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이아테스와 한판 멋지게 겨루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살짝 긴장한 이유도, 세상이 멸망하든 상실자가 되든 이게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진검 승부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중요한 결투에서 형편 없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다소 긴장감이 들었을 뿐이었다.
“난 잠시 후면 상실자가 될 거다.”
이클리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이아테스가 여전히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걸 잘 안다면, 네 입장에서는 지금 굳이 나와 싸울 필요 없이, 가만 앉아서 내가 상실자가 되기만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거다. 안 그러냐?”
이클리프가 슬쩍 속을 떠보려는 듯이 물었지만, 이아테스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허튼 소리 마라. 내가 조금이라도 그런 눈치를 보였다간, 넌 저 아가씨, 일레시아를 인질로 삼고 위협해서 날 어떻게든 싸우게 만들었겠지. 너야말로 안 그러냐?"
이 대답을 듣고 이클리프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하하하, 역시 날 잘 아는구나. 나 또한 애당초 네가 결코 그런 비겁한 수를 쓰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이클리프는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자신이 먼저 창을 내밀어 공격을 가했다. 이아테스도 얼른 대검을 휘둘러 그 창을 쳐냈다.
아까 지하 플랜트에서 겨루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크리스탈룸 창날과 금속제 칼날 사이에서 자주색과 붉은색 섬광이 서로 얽히고 설킨 채 현란하게 번득이기 시작했다.
이아테스가 휘두르는 묵직하고 투박한 대검은, 사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페룸 합금 방패의 모양을 금속 성형술로 대폭 변형시켜 만든 금속제 칼집이었다.
그 안에는 일루리아가 빌려준 귀중한 ‘플래티너스 아퀼라’라는 장검이 꽂혀 있었다.
즉, 이아테스는 지금 장검이 꽂힌 금속제 칼집을 마치 대검처럼 휘두르고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자세히 보면 대검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딘가 언밸런스하고 어색해 보였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한층 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이게 칼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기습을 가해서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너, 코어를 하나 더 각성했구나. 이제는 레드 코어가 3개지? 그렇지?”
몇 차례 창과 칼이 서로 맞부딪히고 나자, 이클리프가 살짝 놀라면서도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그는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눈치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에, 그새 벌써 이아테스가 네 번째 코어를 각성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물론 타베스 칩을 삽입하여 출력이 크게 증가한 자신의 공격을 한동안 잘 막아내는 이아테스의 모습을 보면서 코어의 숫자가 아까보다 늘어났음을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늘어난 코어를 아직 제대로 사용할 줄은 모르는군.
너 자신도 네 번째 코어를 최적의 효율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전혀 훈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코어가 4개가 되면서 가능해진 입체 배열과 신체 재구성 같은 것도 당연히 하지 못했구나.
이래서는 내 상대가 못 되지.”
이클리프는 네 번째 코어를 각성한 이아테스의 장점과 단점을 순식간에 전부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아테스는 아직 네 번째 코어를 최적의 효율로 사용하지 못하는 반면, 이클리프는 타베스 칩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출력 게이지가 거의 2배 가까이 증폭되어 있는 상황.
실력 격차와 더불어 힘의 차이도 상당히 컸다. 따라서 정상적인 수단만 써 가지고는 코어가 4개가 된 이아테스로서도 거의 승산이 없었다.
물론 조금만 내버려두면 비정상적인 증폭으로 인한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이클리프의 코어가 전부 기능을 상실해 버릴 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아테스나 일레시아가 그의 손에 죽어버린다면, 그 다음에 코어의 기능이 상실되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아테스의 입장에서는 막연하게 저쪽의 기능 상실을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며, 당초 마음 먹은 대로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가해 일격으로 결판을 내는 길뿐이었다.
그 기회는 오래잖아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몇 차례 치열하게 창과 칼이 맞부딪히던 중에, 결국 힘과 기술에서 모두 밀린 이아테스의 대검이 손에서 튕겨져 나가 옆쪽 벽으로 거세게 날아갔던 것이다.
레드 아르케를 한껏 받아들여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그 대검은 곧장 금속제 벽을 뚫고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그 상태에서 대검의 레드 아르케가 빠져나가 칼날이 식어버리자, 이제 어지간해서는 쉽게 빠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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