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54화: 아들들의 전쟁 (85)
마침내 마음을 굳힌 페레이즈 태자는 큰 소리로 휘하 기병들에게 명령했다.
“명령이다. 숲 속으로 들어온 야만족의 보병은 무시해라. 놈들을 강행 돌파하여 그대로 야만족의 궁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라!
다시 한번 말한다, 적 보병은 무시하고 오직 궁수만 노려라!”
200명의 기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각자의 말에 뛰어 오른 다음, 페레이즈를 따라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숲 속으로 들어섰던 케르비오 족의 보병 2천명은 당연히 갑작스럽게 괴물이 튀어나온 것처럼 질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이즈다! 그 놈이 여기 있다!”
케르비오 족 보병 가운데 몇 명이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페레이즈 태자가 도끼창을 휘두르면서 달려오는 모습을 목격하고 당장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던 것이다.
그 비명 소리에 보병들을 지휘하던 프리트만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하필이면 다른 적장도 아니고 페레이즈가 직접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왔다는 사실에, 그는 순간적으로 절망에 빠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케르비오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페레이즈의 출현에 완전히 당황해서 공황 상태에 빠졌고,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뒤돌아서 도망치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페레이즈가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단숨에 전멸 당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페레이즈와 플로젠 기병들은 공황에 빠진 케르비오 보병들을 무시한 채 그대로 전력 질주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숲을 빠져나가 버렸다.
실수로 그들의 진로에서 얼쩡거리던 병사 몇 명이 말발굽에 짓밟히거나 창에 맞아 죽긴 했지만, 완전히 방심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것 치고는 딱히 큰 피해라고 할 수 없었다.
프리트만은 물론이고 막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려던 병사들까지 죄다 어리둥절해서 걸음을 멈추었을 정도였다.
“부족장님, 페레이즈 놈이 왜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간 걸까요?”
얼떨결에 죽을 뻔했다가 또 얼떨결에 목숨을 건진 케르비오 병사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프리트만에게 물었다. 물론 그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음, 그러니까 페레이즈, 저 놈은 지금 자기네 진영에 화살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아군 궁수들을 빨리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건 전혀 눈에 안 들어오는 게 분명하다.
정말 어리석은 놈이야. 놈이 방금 작정하고 공격했으면 기습을 당한 우리는 꼼짝 없이 다 죽었을 텐데 말이다.”
프리트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름대로 페레이즈의 생각을 추측해서 말했다. 그러자 부하 병사들이 또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페레이즈를 뒤쫓아가서 놈의 배후를 쳐야 하나요?”
질문을 받은 프리트만은 ‘페레이즈가 없는 곳을 공격하라’고 명령한 카를로만의 지시를 떠올리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건 안돼. 내가 카를로만 왕자님께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페레이즈가 없는 곳을 공격하라는 것이다.
페레이즈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언덕을 내려와서 아군 궁수를 공격하러 갔으니, 우리는 거꾸로 놈이 없는 적 진영을 공격해야만 한다.
마침 적 진영은 아군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받고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있을 테니 우리가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거다.”
프리트만은 부하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다들 겁먹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페레이즈는 여기 없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놈이 자리를 비웠을 뿐만 아니라, 아군 궁수들의 화살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적 진영을 공격하러 갈 것이다.
모두 어서 대오를 정비하고 여차하면 적진에 불을 지를 수 있도록 나뭇가지를 주워서 횃불을 만들도록 해라.”
프리트만의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페레이즈의 출현 때문에 잠시 놀랐던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지시 받은 대로 플로젠의 언덕 위 진영을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에서 프리트만이 내린 이 결정 때문에, 케르비오 족의 궁수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페레이즈가 이끄는 기병들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그때 카를로만은 휘하에 남은 보병 1천명과 함께 플로젠 진영이 있는 언덕의 중턱 보다 조금 아래쪽 비탈에 포진해 있었다.
그는 화살 세례를 견디다 못한 적병이 갑작스럽게 언덕 아래로 쳐 내려올 때를 대비하여 잔뜩 경계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렁찬 함성과 함께 플로젠 기병대 수백 명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나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케르비오 족은 3천명의 궁수들이 언덕 서쪽의 들판에서 동쪽을 바라본 채 서 있었으며, 그 가운데 대열 앞쪽에 있는 2천명이 장궁을 이용하여 적 진영을 향해 부지런히 화살을 날리는 중이었다.
궁수들의 좌측과 우측, 그리고 정면에는 각각 1천명의 보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카를로만은 그 보병대 가운데 정면에 배치된 1천명의 보병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플로젠 기병대는 궁수들의 좌측, 방위로 따지면 북쪽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저쪽은 방금 전에 프리트만이 2천명을 이끌고 간 작은 숲이 있는 방향인데? 설마 적 기병대가 미리 그 숲에 숨어 있다가 지금 갑자기 뛰쳐나온 거란 말인가?”
카를로만은 크게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적 기병대의 출현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낸 프리트만의 2천 병력이 이미 적 기병대에게 전멸된 것이 아닌가 몹시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언덕 위의 적 진영 부근에서 시끄러운 함성과 함께 요란한 전투 소음이 들려오자 그는 대뜸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 프리트만의 2천 병력은 전멸 당한 것이 아니라 지금 북쪽에서 적 진영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로구나!
그렇다면 적 기병대는 페레이즈가 직접 지휘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페레이즈가 없는 곳을 공격하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프리트만은 그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적 기병대가 아니라 진영을 공격하는 거야.
이건 전부 내 잘못이다. 명령을 잘못 내렸어.”
카를로만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뜯으면서 괴로워했다. 옆에 있던 크리겔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왕자님, 왜 그러십니까? 프리트만은 페레이즈가 없는 곳을 공격하라는 왕자님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잖아요? 뭐가 어떻게 잘못된 겁니까?”
그러자 카를로만 보다 먼저 생각이 깊은 코르제가 대신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 왕자님이 프리트만에게 기대한 역할은 적이 공격해 오면 그걸 최대한 저지하고 궁수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어.
그런 맥락에서 페레이즈가 직접 반격을 가해올 경우에는 적 진영을 공격해서 그 자가 자기 진영이 걱정되어 전력을 다해 아군 궁수들을 추격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지.
반대로, 페레이즈의 부하가 언덕 아래로 공격해 내려올 경우에는 그 측면이나 배후를 쳐서 마찬가지로 아군 궁수들을 지켜주는 게 프리트만이 이끈 2천명의 역할이야.
다시 말해, 명령의 본질은 궁수들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지 페레이즈가 없는 곳을 공격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크리겔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프리트만은 자기 역할에 충실하게 페레이즈가 자리를 비운 적 진영을 공격하고 있는 거잖아?
그러면 페레이즈가 자기 진영이 걱정되어 후퇴할 거 아니야?”
이번에는 카를로만이 무겁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페레이즈가 설마 진영에 남아 있는 기병을 박박 긁어서 과감하게 언덕 아래로 내려와 숲 속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페레이즈가 보병을 1천이나 2천명쯤 데리고 언덕 아래로 쳐내려 올 경우에는 전력이 약화된 적 진영을 공격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야. 그 자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미리 숲 속에 숨어 있었다는 말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며, 동시에 수천 명의 적 보병이 그대로 진영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아군 2천명이 적 진영을 공격해 봤자 페레이즈는 공격을 멈추고 진영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을 거다.
진영에 충분한 병력이 남아 있을뿐더러, 애초부터 그런 상황을 각오하고 공세에 나섰을 테니까.”
코르제가 옆에서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프리트만의 2천 병력은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숲에서 최대한 페레이즈의 기병을 붙잡고 늘어짐과 동시에 전령을 보내 카를로만 왕자님께 돌발 상황을 생겼다는 사실을 신속하게 보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아군 궁수들이 공격을 멈추고 안전하게 철수하거나, 하다 못해 여기 남아 있는 보병들이 한쪽으로 집결하여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페레이즈의 기병을 막아낼 수 있었겠죠.
프리트만이 저런 식으로 페레이즈의 기병을 내버려둔 채 적 진영을 공격하니, 보십시오, 아군 궁수들은 적 기병대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카를로만은 한숨을 쉬면서 코르제에게 말했다.
“코르제, 자네 말이 다 맞아. 차라리 좀 무리가 있더라도 자네를 지휘관으로 삼아서 2천 병력을 이끌고 숲으로 가게 했어야 했어.”
코르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부족장의 조카이고 일개 기병에 불과한지라, 2천 병력을 지휘할 권한도 권위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시고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제라도 우리가 페레이즈가 나타난 아군 궁수의 좌측으로 달려가야 합니까?”
카를로만은 다시 한번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이미 늦었어. 저길 봐. 페레이즈가 직접 이끄는 기병대가 얼마나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잘 보라고.
지금 우리가 달려가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궁수들의 정면까지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 거다.”
코르제가 카를로만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플로젠 기병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다 말고 신속하게 방향을 전환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페레이즈가 지휘하는 기병 200명은, 원래 적 궁수들의 좌측을 노리고 돌진했다.
하지만 그쪽 방향에 포진하고 있던 케르비오 보병 1천명은 의외로 방심하지 않고 전열을 잘 갖춘 채 대비하고 있다가, 플로젠 기병대가 출현하자 즉시 장창으로 기병 돌격을 저지할 태세를 보였다.
덕분에 방금 전에 코르제가 걱정했던 것처럼 궁수들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기병대에게 짓밟히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수 있었다.
페레이즈는 정면에 있는 적 보병들의 전열이 잘 갖추어진 것을 보자, 도끼창을 높이 치켜들어 부하 기병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플로젠 기병대는 그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방향을 오른쪽으로 급 전환했다.
그들이 케르비오 궁수의 좌측에 포진한 보병대의 장창 바로 앞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틀면서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카를로만은 새삼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쯤 되자, 한창 적 진영에 사격을 퍼붓던 케르비오 궁수들도 플로젠 기병대의 출현을 깨닫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만, 키오나는 아직 주변에 호위하는 보병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휘하 궁수 2천명에게 동요하지 말고 계속해서 적 진영에 화살을 퍼부으라고 다그쳤다.
그때까지 케르비오 궁수들이 적 진영에 퍼부은 화살은 수만 발에 이르렀다.
심지어 궁수들은 처음 가지고 있던 화살을 모두 다 썼기 때문에 대열 중간중간에 배치된 마차에서 새로운 화살을 보급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대열 앞쪽의 궁수 2천명이 화살을 보급 받아 가면서 장궁으로 플로젠 진영에 사격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의 후방을 지키는 것은 예비 병력으로 남아 있던 궁수 1천명이었다.
그 지휘관은 키오나의 남동생인 키에란으로, 그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당황했지만 얼른 1천명의 궁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 기병대가 나타났다! 단궁을 좌측으로 겨냥해라!”
키에란의 지시에 따라 1천명의 궁수들은 즉시 좌측으로 몸을 돌리고, 그쪽에서 한창 급격히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플로젠 기병대를 향해 단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병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아무리 평생 산짐승을 사냥해 온 명사수들이라고 해도 결코 조준이 쉽지는 않았다.
산짐승들과는 달리 페레이즈 태자가 이끄는 기병대는 다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역전의 용사들이었으니까.
그 와중에서도 일부 궁수들은 용케 플로젠 기병 몇 명의 어깨와 허벅지를 명중시키는 신기를 발휘했다.
다만, 기병들은 어깨와 허벅지를 좋은 갑옷으로 단단히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무시한 채 오직 페레이즈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용감하게 말을 달렸다.
단궁 사격을 하는 궁수들과 내달리는 기병들 모두 나름대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침내 페레이즈가 이끄는 기병대는 케르비오 궁수들의 좌측을 지키고 있던 보병대를 크게 우회하여 적 진형의 뒤쪽에 도착했다.
그곳은 플로젠 진영에서 가장 먼 곳이었으며 배후에 파로크 성채가 있었기 때문에 배치된 케르비오 보병대가 없었다.
물론 케르비오 족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궁수들의 우측을 지키고 있던 보병대 1천명이 최대한 빨리 후방으로 이동하여 필사적으로 적 기병대를 저지하려고 했다.
만약 그들이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고 조금만 머뭇거렸더라면, 키에란이 이끄는 1천명의 궁수들은 순식간에 플로젠 기병대 200명에게 짓밟히고 말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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