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6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52)
이처럼 부모가 카리타스 총독부에 내는 기부금의 크기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체제하에서는, 기부금을 전혀 내지 못할 경우 당연히 상실자 아이를 맡길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돈이 없는 부모에게는 결국 이전처럼 아이를 아무렇게나 버리라고 강요하는 결과밖에는 안 된다.
어느새 총독부가 거대한 사업체가 되어 버렸다면서 크게 못마땅하게 여기던 성녀는 바로 그 점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또다시 한바탕 지루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진 끝에, 최종적으로 타협안이 만들어졌다.
즉, 부모가 배양 회사에서 인수해가지 않은 상실자 아이, 부모가 아무렇게나 불법적으로 유기한 아이, 그리고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돈을 낼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아이를 맡기고 싶은 경우,
이런 경우에도 행성 카리타스 총독부가 기부금 없이 상실자를 받아서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단, 총독부는 상실자를 무조건 기부금 없이 받아준다면, 결과적으로 기부금을 내고 아이를 맡긴 부모들을 역차별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 오래잖아 기부금이 줄어들어 자금 부족으로 카리타스의 보호 시설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게 되리라는 논리였다.
따라서 총독부는 기부금 없이 받아준 상실자는 반드시 일정 회수만큼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배양 캡슐에서 선천적 상실자가 만들어질 확률을 단 0.01%라도 낮추고 싶은 민간 배양회사에서부터, 사회적 지위가 있는 후천적 상실자를 치료하기 위한 작은 단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의학 연구기관에 이르기까지,
상실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임상 실험을 하려는 수요는 은하계 전역에서 무척 많았다.
실제로 행성 카리타스가 불법 유기 장소였을 당시에는, 몰래 행성 카리타스로 와서 임상 실험을 하기 위해 상실자를 납치해 가는 연구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붙잡혀 인격 삭제형을 당한 연구자 중에는, 마지막 유언에서 자신의 행동을 과거 구인류 시절, 시체 해부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몰래 사형수의 시체를 파 가지고 가서 해부한 의사에 비유한 사람도 있었다.
기부금 없이 카리타스 총독부에 맡겨진 상실자는, 바로 그런 상실자와 관련된 각종 연구에서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조건이었다.
기부금 대신 임상 실험 대상을 원하는 민간 배양회사나 연구 기관이 일정한 대가를 총독부에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즉, 기부금 없이 맡겨진 상실자는 각 대륙의 하층민 신분을 부여 받고 평범하게 생활하되, 가끔씩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남몰래 연구소로 끌려가 비밀 임상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사전에 정해진 회수의 임상 실험이 무사히 끝나면, 대상자는 최소한의 기부금을 낸 것으로 간주되며,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는 식이었다.
성녀는 이런 임상 실험 제도를 두고, 구인류 시절에 외계인에게 납치 당해 인체 실험을 당하고 풀려났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고 비꼬기도 했었다.
다만, 아무리 안전하고 신중하게 실시되는 임상 실험이라고 해도, 어쨌든 임상 실험은 임상 실험.
대상자는 언제 임상 실험의 부작용으로 인해 길거리에서 픽 쓰러져서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
물론 행성 카리타스 내 어떤 컨셉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젊은 하층민 한 명이 길거리에서 픽 쓰러져 죽는 것을 신경 쓰면서 이 세상이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나 위화감을 품지는 않을 터였다.
이렇게 해서, 기부금 없이 임상 실험 대상으로 선천적 상실자를 받아주는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행성 카리타스의 각 대륙에는 자연스럽게 여러 곳의 임상 실험 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민간 배양 회사나 연구기관의 출장소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었지만, 나중에는 상실자에 대한 연구가 미래에 큰 돈이 되리라고 판단한 카리타스 총독부가 직접 연구소를 확장하고 연구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선천적 상실자가 아니라 후천적 상실자 가운데에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실된 코어 기능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전재산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행성 카리타스 제 1대륙, 즉, 현재 자비의 대륙에 위치한 파미아 화산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임상 실험 연구소 또한 총독부에서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는 연구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연구소에서 200년 전 위험한 오염물질인 타베스를 이용하여 선천적 상실자에게 코어를 만들어주자는 취지의 실험을 무모하게 진행했다가, 그만 행성 전역이 거의 다 타베스에 의해 오염되고 만 대참사가 터졌던 것이다.
따라서 200년 전 대참사의 원인을 자세히 따져보면, 당시 카리타스 총독부의 과도한 상업주의가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성녀 에클레시아가 스스로 희생한 덕분에 행성 카리타스에서는 제 1대륙만이 간신히 오염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일이 이쯤 되자, 제국 황실은 온갖 비난 속에서 뒤늦게 행성 카리타스의 운영 체제를 대폭 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행성 카리타스의 총독을 성녀 에클레시아의 양녀인 ‘에렌라르테’로 교체하고 지위를 부왕으로 격상시킨 다음, 운영 자금으로 기부금 대신 막대한 황실 지원금을 약속했다.
동시에 각 대륙에 설치되어 있던 관리국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남은 제 1대륙 관리국의 실질적 권한을 크게 강화했으며, 성녀를 따르던 이베리스와 이스카엘을 공동 국장으로 삼아서 사업이 아니라 제대로 된 거주민 관리를 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탄생한 카리타스 부왕궁과 자비의 대륙 관리국은, 무엇보다 기부금 제도부터 없앴다.
그 제도가 이번 대참사의 근본 원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행성 거의 전역이 타베스에 오염되어 은하계의 다른 부분에서 엄중히 격리되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이래저래 기부금 제도는 존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대신, 상실자는 아르케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구 인류처럼 평범하게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비의 대륙에 남아 있는 상실자 거주민들끼리 자연스럽게 후손을 남겨서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외부 개입을 최소화하기로 방침을 크게 바꾸었던 것이다.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에게 안정적이고 멋진 역사의 출발점을 만들어주기 위해, 성녀를 따르던 영웅들이 직접 거주민들을 이끌고 암흑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다음, 정치, 종교, 학문을 모조리 재편하였다.
머릿속에 코어도 없는 수많은 거주민들을 일일이 세뇌하여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를 몽땅 지우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될 초기 조건을 세세하게 입력하는 건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고대 왕국은 암흑시대를 통해 멸망했으며, 이제 영웅들의 지도하에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자연스러운 역사의 변천 과정을 거주민들에게 실제로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녀를 따르던 영웅들은 거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될 새로운 나라들을 대륙에 세웠다.
예를 들어, 관리국의 코드네임으로 ‘일루리아’라고 불리는 ‘루드레이아’는 ‘카스트레아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대륙 동부에 카스트레아 왕국을 세웠다.
또한 코드네임이 ‘이센티스’인 ‘블리트로프’는 ‘가르데스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대륙 서부에 가르데스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타베스를 이용한 치료약 개발 실험이 비록 대참사로 끝나긴 했어도, 그 실험의 결과, 살아 남은 거주민들은 아르케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게이지 수치가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
따라서 자비의 대륙 관리국은 관리상 편의와 역사 발전의 다양성을 위해 거주민들의 미약한 아르케 속성을 대략적으로 구분한 다음, 그들 각자에게 독자적인 유전적 특징을 부여하고, 거주 지역을 구분해서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자극해주기로 결정했다.
예를 들어, 대참사 이후 미약하나마 레드 아르케 속성을 지니게 된 거주민들은 붉은 머리를 지닌 플리아인이라고 하여 대륙 동부의 카스트레아 왕국 백성이 되었다.
또한 블루 아르케 속성을 지닌 거주민들은 파란 머리를 지닌 발리아인으로서 대륙 서부의 가르데스 왕국 백성이 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상에 도합 4왕국 2신전이 세워지고, 각 지역별로 서로 다른 아르케 속성을 지닌 서로 다른 인종의 거주민이 살게 되자, 나름대로 역동적인 역사 전개를 위한 초기 조건은 잘 갖추어진 셈이었다.
자비의 대륙 관리국과 행성 카리타스 부왕궁은 거기서 딱 개입을 멈추었다. 지상 거주민들이 주어진 초기 조건에서 출발하여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더 이상의 간섭을 배제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만, 정말 불가피한 경우에는 ‘예외적 역사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특별 허가를 받아서 지상 거주민의 역사에 간섭하기로 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위해 관리국 요원들이 행상인으로 위장하여 지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감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은하계 전역에서는 여전히 낮은 확률로 상실자 아이가 계속 배양 캡슐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확률은 아주 낮아도 매일매일 배양 캡슐에서 탄생하는 아이의 전체적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새로 탄생하는 선천적 상실자의 숫자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행성 카리타스가 더 이상 새로운 상실자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곳곳에 행성 카리타스를 본떠서 작은 보호시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당연히 역부족이라서 결국 또다시 많은 아이들이 함부로 버려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사회 문제로 남아 있었고, 일각에서는 그런 상실자 아이들을 모아서 완전히 황폐해진 구인류의 고향 제 1지구의 복원 사업에 투입하자는 의견까지 나오는 실정이었다.
어쨌든 제국 황실과 카리타스 부왕궁은 상실자로 인한 심각한 사회 문제를 잘 알면서도, 어렵게 정해진 새로운 방침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비의 대륙은 이제 성녀 에클레시아의 고귀한 희생을 상징하는 장소였으며, 에클레시아의 양녀인 에렌라르테가 부왕으로서 그 의지를 잇는다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점점 쇠약해지는 제국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전 은하계에 보여주는 중요한 프로파간다 도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행성 전체가 거의 대부분 타베스에 의해 오염된 상태에서, 자비의 대륙에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스카엘이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인종, 국가, 문화가 나누어진 상태에서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내버려둘 경우, 결국 큰 전쟁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게 될 거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자, 그 결과는 뻔했다.
간신히 세운 새로운 방침을 뒤엎고 쓸데없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그는 끝내 공동 국장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끝내 공동 국장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 성녀가 스스로 희생하여 지킨 거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방법을 써야만 한다.”
이스카엘은 잠시 동안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 새삼 확신한 다음, 파미아 화산의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비밀 연구소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곳은 200년 전 대참사가 처음 시작된 불길한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얼씬거리려고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동안 몸을 숨기면서 다음 대책을 세워보기에는 꽤 유리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두 명의 남자가 비밀 연구소에서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다가 이스카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 중 한 사람은 관리국 기술부의 전 부장인 이덴바르, 다른 한 사람은 관리국 집행부 특수요원인 이드리스였다.
“이드리스, 너부터 빨리 말해봐라. 텍스툼의 첩자 이니에스는 사로 잡았느냐?”
이스카엘이 이덴바르를 제쳐두고, 일단 이드리스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이드리스는 진작부터 이스카엘의 대의를 따르기로 맹세하고, 그에게 각종 기밀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이스카엘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텍스툼의 첩자인 이니에스에게 접근하여 행동을 함께 했던 터였다.
바로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이니에스를 배신하여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스카엘이 나름대로 자신의 지략을 총동원하여 오랜 시간 공들여서 치밀하게 준비한 이중 첩자 계획이었음에도, 이드리스의 대답은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텍스툼의 다른 첩자들은 모두 잡았습니다만, 이니에스는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스카엘은 혀를 찼다.
텍스툼과의 중요한 연결고리인 이니에스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은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게 실패했다니 정말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