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74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60)
한바탕 싸움이 끝나자 이아테스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대검을 들고 길을 막았던 소르데스 넷은 순식간에 전멸해 버렸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대검 가운데 하나는 그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이번 싸움을 통해, 이아테스는 이들이 왜 200년 전 성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단지 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는데 그쳤을 뿐인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소르데스의 전투력이, 완전히 무시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강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애매모호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자비의 대륙 지상 거주민은 머릿속에 코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은하계 전역에 흘러 넘치는 아르케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코어를 적어도 하나 이상 지니고 있는 관리국 요원들에 비하면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약했다.
제아무리 지상 거주민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해도, 관리국 요원과 일대일로 싸운다면, 싸움 좀 잘하는 어린애가 어른에게 덤벼든 것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 터였다.
그렇게 약했던 지상 거주민이, 타베스에 의해 먼저 이형성체가 되고, 다시 교정 작업을 거쳐 소르데스로 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경우, 최종적으로 신체 능력이 대충 코어를 1개 지닌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강해지는 건 틀림 없었다.
이 점은 이아테스가 이번에 짧게나마 맞붙어 싸워보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 자체는 확실히 놀라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래 봤자 겨우 코어 1개 수준밖에 안 된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현재 자비의 대륙 밖, 전 은하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코어를 최소한 1개 이상 지녔으며, 심지어 코어가 1개 밖에 없는 사람은 제대로 된 노동력으로 취급 받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즉,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코어가 2개 이상 필요했다.
따라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소르데스가 되어가지고 간신히 코어 1개 수준의 강함을 손에 넣는다는 건, 속된 말로 가성비가 극도로 나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아테스가 이번에 소르데스와 싸우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신체 능력 자체는 강해졌지만, 그 대신 아르케를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코어가 전혀 없는 지상 거주민 조차, 어쨌든 대뇌에 누스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약하게 나마 아르케를 사용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게 워낙 미약한 수준인데다가 제대로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에, 코어가 1개 이상 존재하는 사람에 비하면 실질적으로 사용을 못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간주될 뿐이었다.
그래도 지상 거주민 가운데에는, 아르케 전도성이 좋은 페룸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들면, 한번 전투에서 수많은 적을 가볍게 썰고 다니는 자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에 반해, 이 소르데스란 놈들은 분명 신체 능력 자체는 강해졌는데, 그 대신 아르케를 지상 거주민 보다 더 사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상 거주민들이 쓰는 페룸 무기 보다 전도성이 훨씬 좋은 페룸 합금 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교전했을 때 단순 무식한 물리적 충격 이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르데스가 무조건 지상 거주민 보다 강해졌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역시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국, 신체 능력만 강할 뿐, 아르케를 전혀 쓰지 못하는 소수의 소르데스가 전투에 참여한다고 해 봤자, 200년 전이든 지금이든 그들이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을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이들이 과거의 성전에서 전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은하계의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 훨씬 더 컸다는 소리를 듣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만, 만약 먼 훗날 누군가에 의해 소르데스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완성되고, 그 결과 수만이 넘는 소르데스가 체계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관리국에 덤벼든다면, 그 때는 수적으로 열세인 관리국 요원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이아테스로서는 그저 분에 넘치는 사치일 뿐이었다.
“쓸데 없는 생각 말고, 어서 이클리프를 쫓아가야지.”
이아테스는 여기서 고개를 마구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린 다음, 대검과 방패를 든 채 동굴 안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로에서는 또다시 시커먼 폐기물과 초록색 액체가 기세 좋게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현자력 182년 7월 16일 이른 새벽. 자비의 대륙 동쪽 해안.
지상 거주민들의 행정 구역으로는, 플로젠 왕국의 북동쪽 국경 부근으로, 조금 더 북쪽에는 고원 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대륙 중앙부의 관리국 본부 타워에서부터 그곳까지 쉴새 없이 달려온 일루리아는, 높은 언덕 위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수평선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머지 않아 동쪽 수평선 위로 서서히 해가 떠오를 터였다.
“해뜨기 직전 동쪽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아름답구나.”
일루리아는 과거 ‘카스트레아’라는 이름으로 대륙 동부 지방에 자신의 이름을 딴 왕국을 세운 바 있었다.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땅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 세월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 걸까?
이유야 어쨌든, 동쪽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일레시아의 눈에는 지나칠 만큼 감상적으로 보였다.
“저, 일출 직전 수평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시는 건 좋은데요. 해가 떠오른다는 말은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도 돼요.
어서 빨리 저 아름다운 바다를 건너갈 방법을 찾지 않으면, 잠시 후에 떠오르는 태양이 이 대륙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일출이 될지도 몰라요.”
보다 못한 일레시아가 옆쪽에서 꿈도 낭만도 없는 현실적인 말로 찬물을 끼얹었다.
대륙의 거의 절반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내내 일루리아의 품에 안겨 있었던 그녀는, 지금 완전히 탈진한 듯 바위 위에 주저 앉아 있는 상태였다.
엄청나게 지쳤을 뿐만 아니라, 말투로 보아 신경도 무척 날카로워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넌 왜 그렇게 지친 거냐? 널 안고 여기까지 달려온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붉게 물든 수평선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일루리아가, 그제서야 일레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여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셨잖아요? 완전히 폭주하는 바이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단 말이에요.
떨어지지 않고 안겨 있는 것도 의외로 큰일이었다고요.”
일레시아는 한번 깊은 한숨을 쉬더니 짜증을 섞어가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저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신 우리 편, 그러니까 일루리아님의 부하라는 그 꼬마 말인데요.”
“누구? 아, 이크루아 말이냐? 꼬마라니? 실제 나이는 너보다 한참 나이가 많을 거야.”
“실제 나이가 몇 살이든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고, 하여튼 그 이크루아라는 꼬마랑 대화하느라고 진이 다 빠졌어요.
세상에, 어쩌면 말을 해도 그렇게 재수 없게 할 수가 있는 거죠?
저도 이레니아한테 종종 성질 더럽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꼬마에 비하면 저는 완전히 천사라고요, 천사!”
일루리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하하하, 이크루아가 말을 재수 없게 한다는 건 인정하마. 나도 가끔씩 느끼는 일이니까.
하지만 일 처리 하나는 정말 확실하게 하고 거기다 의리까지 있어서, 이럴 때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다. 그러니 천사 같은 네가 좀 참아라.
어쨌든 제 10요새 상공에서 접촉하기로 단단히 약속한 건 틀림 없겠지?”
“네, 그건 확실히 약속했어요.”
“그럼 됐어. 이크루아는 한번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킬 거야. 수고했다.”
일레시아도 물론 지금이 마냥 지친 기색을 드러내거나 짜증을 낼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루리아가 적당히 달래자 곧 기분을 풀고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재수 없는 꼬마가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정작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서 제 10요새까지 가지 못하면 전부 헛일이잖아요?
도대체 저 거친 파도를 어떻게 넘어가실 거예요?”
일레시아가 파도가 제법 사납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들이 있는 언덕의 한쪽 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는데, 그 절벽 아래쪽에서는 거센 파도가 쉴새 없이 와서 부딪히고 부서지는 모습이 보였다.
“글쎄, 나도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줄곧 생각해 봤는데, 훔치든 빌리든, 지상 거주민들이 쓰는 배를 구해서 타고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일루리아가 이렇게 말하자, 일레시아는 기가 막혔다. 아니, 기껏 생각해낸 방법이 겨우 그거란 말인가?
“지상 거주민의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간다고요? 여기 사람들 항해술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 몰라서 그러세요?”
“그건 당연히 잘 알지. 지상 거주민들이 멋대로 먼바다에 나가면 곤란하니까 항해술 발전에 적절히 제약을 가하자는 정책이 결정될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이 말을 듣고 일레시아는 한층 더 언성을 높였다.
“잘 아시는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격납고로 가서 에어바이크를 훔치자고 했던 거 아니에요?
저라면 에어바이크의 잠금 장치 정도는 쉽게 해킹해서 타고 갈 수 있었어요. 그랬으면 진작에 제 10요새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거참, 그 놈의 격납고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못 버린 거냐? 너도 참 끈질기구나.”
일루리아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리고 서서히 밝아지는 해안가를 찬찬히 살피다가, 문득 언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돛단배에 시선이 멎었다.
보아하니, 어부 한 명이 그 돛단배에 각종 어구들을 싣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 일찍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마침 잘 됐다! 저기 저 돛단배를 타고 가자.”
일루리아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잽싸게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레시아는 깜짝 놀라서 주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요! 지금 그 모습으로 지상 거주민과 함부로 접촉하면 안 돼요!”
일레시아가 허둥지둥 뒤쫓아갔지만, 기본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일루리아는 이미 그녀를 한참 앞질러간 상태였다.
심지어 그 어부가 행여나 자기를 못 볼까 걱정되는지, 언덕을 내려가 해안가를 달리면서부터는 큰 소리로 상대방을 부르고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거기 계신 영감님! 잠깐만요! 배 좀 태워주세요!”
늙은 어부는 누가 멀리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어리둥절해서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어떤 젊은 여자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기절초풍했다.
“다, 당신 누구요?”
늙은 어부는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지만, 일루리아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억센 팔 힘으로 그 불쌍한 노인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조심하세요, 영감님.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저는 절대로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일레시아가 기를 쓰고 달려서 간신히 뒤쫓아왔을 때, 일루리아는 지극히 부드러운 말투와 인자한 표정으로 늙은 어부를 부축하면서 한창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방은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오?
당신 생김새는 아무리 봐도 우리 동부인 같은데,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동부인 가운데 그런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본 일이 없소.
대체 어디 출신이오? 그리고 허겁지겁 뒤따라온 저 소디아인 아가씨와는 무슨 관계인 거요? 어서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가만 있지 않겠소!”
일레시아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일루리아를 바라보았다.
일이 단단히 꼬인 것 같아서 무척 답답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 전설의 영웅이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
설마 네가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거냐고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불쌍한 노인을 기절시키고 배를 훔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무래도 너무 심했고, 혹시 아르케를 이용해서 뭔가 놀라운 재주를 보여준 다음 감탄한 노인이 알아서 배를 바치게 하려나?
일레시아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가능성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다음 순간 일레시아의 예상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일루리아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늙은 어부를 붙잡고 흐느끼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감님, 아니, 선장님,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난데없이 처량한 여인네가 되어버린 일루리아를 보자, 일레시아는 완전히 할 말을 잊어버렸다.
설마 이 전설의 영웅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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