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85화: 아들들의 전쟁 (16)

[아르케 관련 특이 현상에 대한 특별 보고.

수신자: 자비의 대륙 관리국 연구부 부장 이오렌스 귀하.

보고자: 관리국 집행부 9-5 구역 담당 특수요원 인드리크.

현자력 182년 7월 20일 0시 31분. 대륙 남동부 케레돈 산 정상 부근에서 퍼플 아르케의 방전 현상을 확인.

자연적인 방전 현상이 아니라, 충전된 크리스탈룸 결정체를 이용하여 지상 거주민이 종교적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인공적으로 방전을 유도한 것으로 파악됨.

방전 유도에 사용된 크리스탈룸 결정체의 유출 경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함. 이상.]

* * * * * *

이렇게 해서, 희생제가 끝난 이후, 샤먼인 카란드라와 칼빈 부족의 부족장인 카로이는 조용한 방에 단 둘이 마주 앉았다.

그 방은 케렌 부족의 늙은 부족장인 클로리안이 특별히 마련해준 회담 장소로, 부족장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는 카로이의 부하이자 대립 샤먼인 페르구스, 그리고 클로리안의 아들인 칸레이가 각자 1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고 엄중하게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카로이는 먼 길을 달려왔음에도 깔끔한 차림인 반면, 카란드라는 방금 전까지 심혈을 기울여서 희생제를 집전했기 때문에 얼굴이 온통 땀 범벅이었다.

야광 물감으로 칠한 각종 주술적인 문양들도 엉망진창으로 지워져 있어서 영 보기 흉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카로이는 오히려 그녀의 모습에 대해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란드라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오. 조상신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음에도, 오로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희생제를 연출할 수 있다니 말이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당신의 신앙심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정치가 무엇이고, 종교가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존경스러울 뿐이오.”

카로이가 진담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그 말투와 표정이 무척 능글맞게 보여서 카란드라는 어쩐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거 참 황송한 말씀이로군요. 그런데 저를 그렇게 존경한다면서, 왜 페르구스 같은 사람을 샤먼으로 세워서 저와 대립하게 하셨는지요?

제가 알기로 그 사람 역시 신앙심 같은 건 전혀 없을 텐데요? 그는 원래 카로이님의 아버님 대에서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기병 지휘관이 아니던가요?”

카란드라도 지지 않고 비꼬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정녕 그걸 몰라서 물으시오? 만약 페르구스 같은 대립 샤먼이 없고, 북쪽 평야 지대 출신인 카란드라님이 케르비오 족 전체의 유일한 샤먼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싫든 좋든 서쪽은 북쪽에 복종하거나 최소한 심각한 간섭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당연히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소.

그러니 대응책으로 아버님 대에서부터 충성을 다 해온 믿을 만한 심복을 대립 샤먼으로 세울 수밖에 없지 않겠소?”

카로이는 디 알면서 왜 묻느냐는 투로 태연히 대답했다. 카란드라가 계속해서 따지듯 말했다.

“서쪽이 북쪽에 복종하거나 간섭 받기 싫다고요? 그게 대립 샤먼을 세울 정도로 큰 문제인가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그 무엇보다 통합된 케르비오 왕국을 원하셨습니다. 통합된 왕국 내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나 다 같은 케르비오 왕국의 일부에요.

그런데 굳이 어느 지방이 어느 지방에 복종하기 좋다 싫다 따질 이유가 있을까요?”

“그건 그저 이상론에 지나지 않소.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당신 역시 북쪽 평야 지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서쪽 초원 지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요.

네필린 놈들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원한을, 선왕 폐하께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셨고, 카란드라님도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소.

나는 그게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오.”

“저도 당연히 네필린 놈들이 싫습니다. 그 놈들이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거꾸로 카로이님은 우리 북쪽 사람들이 저 악독한 플로젠 놈들에게 억압 받고 수탈 당한 사연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계신가요?

플로젠 놈들은 우리를 야만족 취급하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언제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 공급원쯤으로 여기고 있어요.

아마 카로이님도 북쪽 땅에서 1년 정도만 살아본다면 우리가 왜 네필린 보다 플로젠을 먼저 치려고 하는지 이해하게 될 거예요.”

“나도 카란드라님과 북쪽 평야 지대 사람들이 왜 플로젠 놈들을 그렇게 미워하는지 당연히 잘 알고 있소. 플로젠 놈들도 물론 아주 나쁜 놈들이오.

하지만 악독함에도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소. 우리는 네필린 놈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수탈 대상이 아니라 아예 사냥감 취급을 당했단 말이오.

내가 다스리는 칼빈 부족에는 놈들에게 재미 삼아 사냥 당하는 바람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오.

나도 플로젠 놈들이 정말 싫지만, 네필린 놈들은 싫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대륙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 같은 족속들이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네필린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가 놈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도시를 짓밟아서, 우리와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을 뿐이라오.”

카로이는 아까까지의 능글맞은 태도 대신 은근히 살기를 띤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선왕 폐하께서 케르비오 족 전체의 통일된 힘을 하나로 모아서 네필린을 먼저 공격하여 우리의 피맺힌 원한을 갚아주셨다면, 우리는 그분께 영원히 절대 복종했을 거요.

그렇게 네필린 놈들에게 충분히 복수한 다음에는, 우리 서쪽 사람들도 직접적으로 아무런 충돌이 없었던 플로젠 놈들을 공격하는 일에 당연히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터.

하지만 선왕 폐하께서는 서쪽 사람들의 피맺힌 원한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플로젠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셨소.

그분께서 아주 조금만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융통성을 보이셨다면, 서쪽 사람들은 분명 6개월 전에 선왕 폐하와 함께 페레이즈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을 것이오.”

“그럼, 모든 게 제 아버지인 선왕 폐하의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건 좀 무례한 말씀이 아닌가요?”

카란드라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항의하듯 말했다. 하지만 카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혹시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소.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마주 앉았으니 마음 속에 품었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다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오.

플로젠 보다 네필린을 먼저 치는 것이 우리 서쪽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일이니 말이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카로이님은 선왕 폐하를 돕지 않았던 것처럼, 제 동생인 카르스덴 왕자도 돕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요?

동생이 방침을 전환해서 전력을 다해 서쪽의 네필린을 먼저 치자는데 동의하지 않는 한?”

“카르스덴 왕자님 또한 선왕 폐하처럼 통합된 케르비오 왕국이 먼저 플로젠부터 쳐야 한다고 융통성 없이 주장한다면, 나와 서쪽 사람들은 당연히 거기에 순순히 복종할 수가 없소.

그건 그저 북쪽 평야 지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일 뿐, 서쪽 초원 지대 사람들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방침이니 말이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우리 백성들을 사냥하고 있는 네필린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무조건 플로젠과 먼저 싸운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따라서 그런 방침을 내세워 서쪽 사람들을 어떻게든 굴복시키고 통합하려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악착 같이 저항할 수밖에 없소.

그리고 그 저항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나는 카란드라님과 대립하는 샤먼을 세웠던 것이오.”

카란드라는 겉으로는 카로이와 기세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저 재수없고 교활한 인간인 줄 알았던 카로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식견이 높다고 해도, 카로이가 끝내 카르스덴을 돕지 않겠다고 한다면, 카란드라로서는 그를 정치적인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흠, 보아 하니, 앞으로도 계속 내 동생 카르스덴이 통합 케르비오 왕국의 국왕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실 작정인 듯하군요.

중부 산악 지대 부족장들을 포섭하고 선동해서 동생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저까지 샤먼 자리에서 밀어내거나 혹은 샤먼을 셋으로 늘리려고 하면서요.

카로이님의 생각이 확고부동하다면, 여기서 무의미하게 대화하느라고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겠네요.”

카란드라는 짐짓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카로이가 설마 뻔한 얘기만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테고, 틀림 없이 준비해온 다른 얘기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하고 그 본론을 빨리 꺼내라는 뜻으로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이었다.

카로이도 그녀의 뜻을 짐작한 듯 웃으면서 말했다.

“진정하시오. 겨우 이런 오래된 입장 차이만 확인하자고 내가 여기까지 달려왔겠소? 그건 당연히 아니오.

서로간의 입장 차이는 입장 차이이고, 언제까지 우리끼리 대립하고 다툴 수는 없는 일.

내가 지금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급하게 달려온 것은 바로 뿌리 깊은 서쪽과 북쪽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함이오.”

“어떻게 대립을 극복하실 생각인가요?”

카란드라가 묻자, 카로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제시하는 몇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서쪽 평야 지대 부족들은 카르스덴 왕자님이 새로운 케르비오 국왕이 되는 것에 동의하도록 하겠소.

그것도 이번에야말로 케르비오 족 전체의 지지를 받는 명실상부한 통합 왕국의 국왕이 될 것이오.

또한 내가 이번에 이끌고 온 3천명의 병사들이 오늘밤에라도 즉시 북쪽으로 강행군하여 카르스덴 왕자님이 있는 파로크 성채로 갈 것이오.

뿐만 아니라, 중부 산악 지대에서 나를 따르는 부족장들에게도 카르스덴 왕자님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겠소.

잘만 되면 며칠 내로 서쪽과 중부 지대에서 약 1만명 가량의 지원군이 카르스덴 왕자님에게 합류할 것이오.”

카란드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그녀는 그 조건이란 게 뭔지 무척 궁금했다. 틀림 없이 보통 조건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 자신도 그 조건에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까지 들었다.

“어디 한번 그 조건을 말씀해 보세요.

설마 제가 샤먼 자리에서 물러나고 카로이님이 세운 대립 샤먼인 페르구스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소? 첫 번째 조건은 우리 입장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오.”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어떻게 보면 간단한 조건이오. 카르스덴 왕자님이 최대한 많은 부족 대표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서약하는 것이오.

플로젠을 먼저 쳐서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과 독립을 승인하게 만든 다음, 더 이상 무리하게 플로젠을 공격하지 않고, 통합된 케르비오 왕국 전체의 창 끝을 네필린 쪽으로 돌린다는 서약을 말이오.

카란드라님이라면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많이 양보한 조건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소."

“뭐······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네요.”

카란드라는 어쩐지 카로이에게 말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일단은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덧붙일 말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 조건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선왕 폐하 시절에도 논의되었던 것 아닌가요?

당시에는 플로젠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혀서 지치게 만든 다음,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과 독립에 동의를 얻어내는 대가로, 지친 플로젠에게 함께 동맹을 맺고 네필린을 공격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하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나왔었죠?

플로젠은 어차피 네필린을 치려고 케르비오의 물자와 인력이 필요한 상황.

그러므로 완전히 통합된 케르비오 왕국이 동맹을 맺고 함께 네필린을 공격하자고 한다면, 플로젠의 입장에서도 무조건 싫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요.”

카로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카란드라님은 영리한 분이오. 잘 기억하고 있구려.

그렇소. 그런 식으로 플로젠과 동맹을 맺고 네필린을 치면, 서쪽 초원 지대 사람들로서도 단독으로 네필린을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네필린의 영토를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니 나쁠 것이 없소.

플로젠, 북쪽 사람, 서쪽 사람, 모두가 최선 아니면 차선의 이득을 얻는 결과이니 최적의 방안이 아니겠느냐고 긍정적으로 논의되었었소.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왜 그 방안이 채택되지 못했는지도 기억하고 계시오?”

카란드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그 방안은, 언뜻 들어보면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만약 플로젠 놈들이 끈질기게 우리 왕국의 건국과 독립을 승인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하는 문제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바람에 플로젠 놈들과의 전쟁이 장기화 되면, 과연 서쪽 초원 지대 사람들이 언제까지 네필린을 치는 일을 뒤로 미루고 플로젠과의 전쟁에 계속 협력해줄 것인지도 큰 의문이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