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27화: 아들들의 전쟁 (58)
“그건 죽어도 안 됩니다. 아저씨가 정히 이제 그만 쉬고 싶다면, 그 동안 세운 공적에 합당한 최고의 예우 속에서 은퇴를 해야 마땅합니다. 이런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방식은 절대로 용납 못합니다.
저는 아저씨와 함께 사면 받지 못한다면 그냥 같이 형벌을 받을 겁니다. 저 혼자만 사면 받는 건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카를로만의 당당한 태도를 보고, 처형대 아래 광장에 밀집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광장이 다시금 크게 소란스러워지자 크로키는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칼마르의 손목을 절단하고 카를로만을 극적으로 사면한다는 멋진(?) 각본을 갑작스럽게 전면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카를로만을 제압하고 칼마르의 손목을 잘라 버려라!”
크로키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단검을 들고 카를로만에게 덤벼들었다.
칼마르는 손목 절단형을 받기 위해 밧줄에서 풀려난 상태인 반면, 카를로만은 여전히 상반신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심지어 그의 등에는 채찍으로 호되게 얻어 맞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기까지 했다.
때문에 힘센 병사 여러 명이 덤벼들면 금방 제압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힘과 기술은 절대로 만만치 않았다.
카를로만은 덤벼드는 병사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날렵하게 피했고, 교묘하게 기회를 잡아 발로 걷어차거나 어깨로 들이 받아서 병사들을 연거푸 처형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밧줄에 묶인 상태에서 사납게 날뛰는 그의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맹수 같았다. 칼마르는 일이 점점 커지는 걸 보고 안타까웠지만 감히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카를로만이 여러 명의 병사들과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자, 처형대 아래에 있던 프리트만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몸이 달아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성격이 불 같았던 그 젊은 부족장은 즉시 주변에 있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더는 못 참겠다! 우리도 처형대로 올라가서 카를로만 왕자님을 보호하자! 모두 나를 따라와라!”
프리트만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처형대 계단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자, 옆에 있던 크리겔이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크리겔의 입장에서는 부족장인 프리트만이 함부로 무력을 써서 카를로만을 도와주었다가 그가 다스리는 켄다 부족 전체가 피해를 입을까 봐 무척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트만은 이미 확고부동하게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카를로만이 눈 앞에서 칼마르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돌발 행동을 저지른 거였다면, 프리트만도 마찬가지로 눈 앞에서 카를로만이 꽁꽁 묶인 채 크로키의 부하들과 난투를 벌이는 꼴을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리트만은 한사코 말리는 크리겔의 손을 뿌리친 다음, 부하들과 함께 처형대 계단 쪽으로 용감하게 달려갔다.
그러자 처형대 주변을 엄중하게 경비하고 있던 크로키의 부하들이 즉시 창을 들고 그들을 막아 섰다.
프리트만과 부하들은 무장을 하지 않은 맨손이었지만, 경비병들 또한 다짜고짜 창으로 같은 편 부족장을 찔러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덕분에 실질적으로는 맨손 대 몽둥이의 싸움과 비슷한 양상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눈 앞에서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지자 광장에 모여 있던 다른 병사들도 덩달아 흥분하게 되었다.
부족 대표들은 휘하 병사들이 행여나 소란에 말려들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부하들을 진정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부족 대표들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바람에 광장 일대는 오히려 한층 더 소란스러워지고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쯤 되자 크로키로서도 극적인 사면 연극 각본을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비상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옆에 있던 부하가 건네주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주변 건물의 지붕과 가까운 성벽 위에 배치된 궁수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중부 산악지대에서 온 정예 궁수들은 사전에 정해진 신호를 보자 얼른 화살을 시위에 얹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은 처형대 위에 있는 카를로만을 겨냥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처형대 주변에서 경비병들과 난투를 벌이는 프리트만과 그 부하들을 조준했다.
처형대 위와 아래에서 모두 사람과 사람이 얽혀서 혼란스럽게 싸우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예 궁수들은 이럴 때 뭘 어떻게 해야 정확한 사격이 가능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크로키가 깃발을 힘차게 휘둘러서 발사 명령을 내리자, 궁수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화살을 발사했다.
어려서부터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날렵한 짐승들을 잡으면서 살아온 그들은, 크로키의 부하들을 피해서 카를로만, 프리트만, 프리트만의 부하들만 정확히 노렸다.
순식간에 프리트만의 부하들이 거의 대부분 등이나 어깨에 화살을 맞고 즐비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프리트만도 하마터면 화살에 맞을 뻔했지만, 부하 가운데 한 명이 온몸으로 그를 감싸고 보호해서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나마 궁수들이 일부러 급소를 피해서 쏘았기 때문에 즉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카를로만 또한 눈치 빠른 칼마르가 벌떡 일어나서 자기 몸을 방패로 삼아서 지켜준 덕분에 화살을 맞지 않았다.
그 대신 충직한 칼마르는 등에 화살이 세 발이나 꽂히고 말았다. 그들 주변에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화살이 나무 바닥에 잔뜩 박혀 있기까지 했다.
“칼마르 아저씨, 괜찮습니까?”
카를로만이 놀라서 칼마르를 붙잡으면서 물었다. 다행히 칼마르는 고통 속에서도 의식이 있었으며 치명상은 아닌 듯했다.
이와 같은 정예 궁수들의 놀라운 활 솜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겁을 집어 먹으면서 광장의 소요가 순식간에 크게 가라앉았다.
크로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렁차게 소리쳤다.
“엄정한 법 집행을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든 이렇게 된다! 모두 소란을 멈춰라! 어서!”
크로키는 기세 등등하게 다시 한번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 신호에 맞춰서 높은 곳에 있던 궁수들이 재차 활 시위를 당겨서 프리트만과 카를로만을 겨냥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호해준 덕분에 방금 전에는 용케도 화살에 맞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그들 두 사람을 보호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광장 밖에서 뿔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궁수들은 깜짝 놀라서 겨냥했던 활을 다시 내렸다.
“이건 케렌 부족의 부족장의 뿔 피리 소리가 아닌가?”
카를로만도 칼마르를 부축하는 한편 궁수들의 화살을 경계하고 있다가 흠칫 놀랐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니, 모여 있던 군중들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물러서서 길을 내주는 가운데, 카란드라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으로 보아 여간 화가 난 게 아닌 듯했다.
그녀의 뒤에는 중부 산악지대에서 카르스덴을 지지하는 부족들을 대표하는 케렌 부족 부족장의 딸인 키오나가 있었다. 방금 전의 뿔 피리는 바로 그녀가 분 것이 틀림없었다.
현재 파로크 성채에 있는 산악지대 출신 궁수들은 카르스덴을 지지하는 부족들이 뽑아서 파견한 정예 병력으로, 원래 그들을 통합해서 지휘하는 사람은 키오나였다.
따라서 궁수들의 입장에서는 키오나가 뿔 피리를 불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자, 당연히 크로키의 명령 보다 직속 상관인 그녀의 명령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멈춰라! 처형도 싸움도 당장 멈추란 말이다! 강한 적을 코 앞에 두고 같은 편끼리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카란드라가 처형대로 다가오면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선대 국왕의 장녀이자 카르스덴과 카를로만 형제의 누나이고, 선왕이 직접 임명한 케르비오 왕국 전체의 종교 지도자인 샤먼이기도 했다.
그녀의 권위는 특히나 이곳 북부 평야지대에서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카란드라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소란스럽게 떠들던 군중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으며, 많은 부족 대표들이 그녀를 향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방금 전까지 크로키의 부하들을 상대로 기세 좋게 날뛰던 카를로만과 프리트만 또한 단숨에 기가 꺾여서 두려운 표정으로 카란드라의 눈치만 살폈다.
산악지대 출신의 궁수들은 모두 키오나의 명령에 복종했지만, 처형대 주변을 지키던 크로키의 부하 병사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이번 형 집행을 책임진 크로키 역시 크게 당황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 영리하다고 자부하던 크로키조차도 갑작스럽게 카란드라가 처형장에 난입할 줄은 미처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운명의 장난인가 하면서 마음 속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원래 카란드라는 지원군과 함께 하루 이틀 후에 파로크 성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제 카르스덴에게 보낸 전령이 돌아와서 파로크 성채의 분위기가 여러 모로 심상치 않더라는 내용의 보고를 하자, 카란드라는 불길한 예감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전령은 카를로만이 참수형을 선고 받기 이전에 성채를 떠났지만, 그 시점에서도 이미 카를로만은 거듭된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가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카르스덴이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페레이즈와 무모하게 정면 대결을 벌였다가 많은 병력을 잃었다. 거기다 카를로만은 명령 불복종 죄로 감옥에 갇혀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 소식만으로도 영민한 카란드라를 초조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카란드라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가장 빠른 말을 타고 키오나 및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린 채, 지원군 본대 보다 한걸음 먼저 파로크 성채로 달려왔던 것이다.
카란드라와 키오나는 말이 지쳐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여가면서 밤새 들판을 질주하여 정오 무렵에 아슬아슬하게 파로크 성채 남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들은 대부분 키오나를 잘 아는 중부 산악지대 출신의 궁수들이었지만, 처음에는 즉시 성문을 열지 않고 머뭇거렸다.
“죄송합니다, 카란드라님, 키오나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가 카르스덴 왕자님께 먼저 보고를 드리고 허락을 받은 다음에 최대한 빨리 성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수비병들이 떨떠름하게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급한 카란드라는 전에 없을 만큼 무섭게 화를 내면서 호통을 쳤다.
“뭐가 어째? 나는 선왕 폐하의 장녀이자 왕국의 샤먼이며, 카르스덴 왕자의 누나이다. 너희가 감히 나를 문전 박대할 셈이냐?
거기다 세상에 누나가 먼 길을 다녀왔는데 동생이 문을 안 열어주는 법도 있단 말이냐? 굳이 가서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당장 문을 열어라!”
키오나도 옆에 있다가 아버지한테 받은 뿔 피리를 높이 들어올리면서 소리쳤다.
“나는 케렌 부족 부족장의 딸 키오나다. 너희들은 전부 나와 마찬가지로 산악지대 출신이지? 그럼, 너희 모두 원래 내 지휘를 받는 부하들일 것이다.
이건 내 아버지께서 나한테 내려주신 뿔 피리로, 산악지대 부족 대표들의 합의에 따라 이 뿔 피리는 너희들에 대한 나의 지휘권을 상징한다.
당장 문을 열고 카란드라님을 맞이 해라. 그렇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 죄로 너희들을 즉결 처형하겠다.”
즉결 처형이라는 말은 그냥 경고로만 그치지 않았다. 키오나의 뒤에 있던 호위병들은 즉시 화살을 시위에 얹고 성벽 위를 겨냥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겁을 집어 먹은 수비병들은 더 이상 군소리 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서 카란드라와 키오나를 맞이 했다.
성채 안으로 들어온 카란드라에게, 수비병들은 민망한 표정으로 현재 중앙 광장에서 카를로만과 칼마르의 형벌이 집행되는 중이라서 성채 안의 경계가 특별히 강화된 상태라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카란드라는 당연히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즉시 키오나를 데리고 광장으로 달려갔으며, 마침 한바탕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절묘한 순간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카란드라님, 잠깐 기다리십시오. 지금 이 곳에서는 카르스덴 왕자님의 명령을 받은 크로키님이 책임지고 집행하는 형벌이······”
카란드라가 처형대로 향하고 있을 때, 크로키의 부하 병사 가운데 한 명이 눈치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 순간 누구 한 놈만 걸리라면서 잔뜩 벼르고 있던 키오나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은 문제의 눈치 없는 병사가 들어올린 손에 정확히 명중했다.
손바닥 한복판에 화살이 꽂힌 병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나동그라졌다.
“잘 들어라! 누구든 감히 카란드라님의 앞을 가로 막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불만 있냐? 불만 있으면 앞으로 나와라!”
키오나가 활과 화살을 들고 소리치자 크로키의 부하 병사들은 모두 겁을 집어 먹고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는 근처 건물 지붕과 성벽 위에 배치된 궁수들까지 모조리 그녀의 명령을 따르게 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칫 함부로 카란드라나 키오나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그대로 수많은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절묘한 각본이 전부 엉망이 된 크로키는 속으로는 몹시 짜증이 났지만, 겉으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처형대 위로 올라온 카란드라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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