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17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03)
“그렇다고 해도, 이건 화이트 코어를 지닌 클리엔스를 이용해서 만든 장검이 아닙니까? 저는 화이트 코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애당초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닌 코어와 속성이 완전히 다른 클리엔스를 길들여서 사용하는 건, 골드 코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아테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전설의 영웅이 모처럼 호의를 베풀어 자신이 아끼는 최고 등급의 무기를 빌려주겠다고 하는데, 그걸 이 핑계 저 핑계로 자꾸만 거절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민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방금 일시적인 동맹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완전히 길들여서 네 클리엔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잠시 동맹을 맺고 함께 싸우는 것뿐이니, 코어의 속성 같은 건 아무런 상관 없단 말이다.
그러니까 날 믿고 일단 이걸 받아서 한번 손에 쥐어 봐라.”
일루리아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이아테스가 또 뭐라고 거절하기 전에 아예 바이크 위에서 ‘플래티너스 아퀼라’라고 불리는 그 장검을 휙 던져주었다.
이아테스가 얼떨결에 문제의 장검을 정확히 받아 쥐고 보니, 순간적으로 살짝 위화감이 들긴 했다.
하지만 곧 지금까지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바람 속성의 화이트 아르케가 자신의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라서 무척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답답한 실내에 갇혀 있다가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는 실외로 나간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떠냐? 상쾌한 느낌이 들어서 나쁘지 않지? 나도 처음에 화이트 코어를 각성했을 때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아주 상쾌합니다.”
이아테스가 신기한 표정으로 장검을 바라보면서 대답하자, 일루리아는 빙긋 웃었다.
“그럼 된 거다. 비록 그 아이가 성격이 좀 까다롭긴 해도, 이제부터 한동안 너한테 힘을 빌려줄 거다.
다만, 거듭 말하거니와, 그 아이는 일시적으로라도 네 클리엔스가 된 것이 아니다.
클리엔스는 그냥 무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의지와 생각을 지닌 존재라는 걸 명심해라.
이 친구와 나 사이에 형제의 유대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에게 있어서 딸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우리 사이의 강한 유대는 단 한 순간이라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그저 내 부탁을 받고 잠시 널 도와주러 파견되었을 뿐이다.
이 말의 의미를 항상 잘 새기면서 힘을 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는 널 순순히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면서 반항할 것이다.”
일루리아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이아테스로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할 뿐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한테 이 장검을 빌려주시면 일루리아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아테스가 또 다른 걱정을 말하자, 일루리아는 웃으면서 다른 한 자루의 검을 바이크 위쪽에서 쑥 뽑아내었다.
“나? 나한테는 이 아이가 있으니까 괜찮다.”
일루리아가 뽑아낸 것은 방금 전의 장검 보다 훨씬 더 크고 묵직한 양손 대검이었다.
크기가 너무 커서 크리스탈룸으로는 검신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페룸 합금으로 검신을 만들고 크리스탈룸 결정체를 중간중간에 박아 넣은 물건이었다.
물론 그 결정체들은 어디까지나 검의 위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보조 장치일 뿐, 저 무기의 핵심은 손잡이에 왕홀 보석처럼 박혀 있는 결정체 안에 있는 클리엔스의 코어였다.
그건 일루리아의 세번째 클리엔스인 부엉이로부터 추출한 레드 코어가 틀림 없었다.
이아테스는 문득 일루리아가 저 대검을 빌려준다면 자신이 좀더 잘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왜 이왕 무기를 빌려줄 거면, 네가 좀더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 아이를 빌려주지 않는지 의아하게 느껴지겠지?”
일루리아는 이아테스의 표정을 보자마자 대뜸 속마음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아테스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일순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아니야. 스스로 염치가 없다고 자책할 건 없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내가 이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를 빌려준 이유는 바로 이클리프 때문이다.
네가 이번에 가면 이클리프와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 친구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니 말이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항상 이클리프 보다 한 수 아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대견하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네가 이제 비록 코어 4개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친구 역시 타베스 칩을 자기 머릿속에 집어 넣어 일시적으로 출력이 상승한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을 거다.
거기다 지금은 그 친구와 길게 싸우고 있을 여유가 없어. 다시 말해,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우면서 기습으로 신속하게 결판을 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냐?”
여기까지 듣고 나자, 이아테스는 그제서야 일루리아가 굳이 화이트 코어를 지닌 무기를 빌려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아무리 이클리프가 영리하다고 해도, 제가 설마 화이트 아르케를 이용해서 기습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기 힘들 테니, 그 허점을 노려서 일격에 끝장을 내라는 말씀이로군요.”
“그래. 너라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줄 알았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그 아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잠깐 힘을 빌리는 대등한 동맹 관계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이클리프가 너한테 새로운 동맹이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상황에서 일격으로 결판을 내 버리란 말이다.
방심해서도 물론 안 되지만,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사정을 봐 줘도 안 된다. 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알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아테스는 일루리아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고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 봐라. 나는 이제부터 이사엘라와 결판을 내겠다.
나중에 싸움이 끝나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오늘 아까운 많은 인재를 잃었는데, 너 같은 훌륭한 젊은이까지 또 잃고 싶지는 않다.”
일루리아의 마지막 말에는 유능한 인재를 아끼는 훌륭한 윗사람다운 높은 품격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아테스는 새로운 인격을 부여 받고 관리국에서 일한 이래, 자신의 재능을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해주는 윗사람을 만난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물론 한때 자신이 속한 팀의 팀장이었던 이클리프가 자신을 형제처럼 여기면서 높이 평가해주긴 했지만, 그건 하루 아침에 형성된 유대 관계가 아니라서 단순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비록 예전에 먼발치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곤 해도, 일루리아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본 건 오늘이 완전히 처음이었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안된 자신을 이 정도까지 깊이 신뢰하면서 아끼는 무기를 선뜻 빌려준다는 건, 절대로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아테스는 결코 바보가 아닌지라, 상대방이 지닌 인재를 보는 안목과 그릇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아주 깊은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이클리프는 이 대륙이 멸망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자신과 싸움으로써 허무한 심정을 달래면서 보내고 싶어 했었다.
반면, 이아테스는 가령 오늘 이 대륙이 멸망하든, 아니면 대륙을 구한 다음 반역죄로 체포되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일루리아 같은 훌륭한 영웅을 위해서 싸울 수가 있다면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이클리프나 내가 진작에 이런 좋은 윗사람을 모시고 싸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관리국 국장 이베리스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지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전사 기질이 다분한 이아테스의 입장에서는 일루리아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상관의 모습 그 자체로 느껴졌다.
아마 이클리프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면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아테스는 속으로 새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일루리아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인 다음, 몸을 돌려 자기 부하들이 있는 장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화이트 아르케의 힘을 지닌 ‘새로운 동맹’을 얻었기 때문에, 몸이 평소 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야말로 나는 듯이 달려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달리는 속도가 빨랐다.
“자, 그러면 나도 싸울 준비를 해 볼까?”
일루리아는 이아테스가 달려가는 모습을 잠깐 바라 보고 나서, 잠시 뽑았던 대검을 도로 꽂은 다음,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의 위쪽 장갑판을 발로 툭툭 쳤다.
그러자 바이크는 그 뜻을 알아듣고 상부 장갑판을 좌우로 젖히면서 형태를 변형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대기권을 돌입하고 단독으로 싸우느라 완전 방호 상태였는데, 이제는 주인이 탑승해야 하니 형태를 변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머리 아파! 이제 정말 끝인가? 끝내려면 제발 빨리 좀 끝내라!”
한편, 이런 긴박한 와중에서도 이르피오와 이그시아는 여전히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면서 단 둘이서 멍하니 주저 앉아 하염없이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산 정상이 요란하게 붕괴하면서 거대한 검은 구름이 지하로 뚫고 들어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무시무시한 화산 폭발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 검은 기운이 도로 지상으로 밀려나오는 엄청난 광경.
곧이어 대기권 밖에서 웬 시뻘건 불덩어리가 강하하더니, 그 불덩어리에서 나온 바이크가 이사엘라와 한바탕 짧고도 화려한 공중전을 벌이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을 그들도 물론 전부 다 생생하게 목격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놀라고 두렵긴 해도 더 이상 뭘 어쩌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만사를 다 포기하고, 어차피 상실자가 될 거라면 빨리 상실자가 되어서 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만을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문자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와서 그들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너희 둘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그 사람은 바로 일루리아와 작별하고 달려온 이아테스였다.
아까 네 번째 코어를 각성하면서 일시적으로 출력이 상승한 덕분에 기본적인 치유력도 함께 상승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상처가 회복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온몸 곳곳에 심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는데다가, 배에는 창에 깊이 찔린 자국이 고통스럽게 남아 있었다.
때문에 겉모습만 보면 여전히 만신창이 같다는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는 일루리아가 자신을 믿고 큰 일을 맡겼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평소 이상으로 투지와 활기가 넘쳐 있는 상태였다.
그 바람에 고통도 잠시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이아테스 팀장? 살아 있었어?”
만사를 다 포기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서 상실자가 되거나 세상이 멸망하기만 기다리던 두 사람은 놀라움에 반가움이 뒤섞인 채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허겁지겁 그에게 다가갔다.
이아테스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바닥에 꽂은 다음, 그들 두 사람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너희들 괜찮으냐? 많이 고통스럽지? 고생 많았다.”
이아테스는 딱한 마음에 최대한 부드럽게 위로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원체 부드럽게 위로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본인이 생각해도 어째 지나치게 딱딱한 말투 같아서 다소 미안하게 느껴졌다.
“괜찮지 않아! 우리는 이제 다 틀렸어. 곧 상실자가 될 거라고! 지금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죽겠어.”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자, 이아테스는 내심 불쌍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상시에 좀 더 잘해줄 걸, 지금 갑작스럽게 따뜻하게 위로해주려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무척 후회스러웠다.
그러다가 문득 일레시아가 근처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일순 후회하는 마음을 잊은 채 다시 물었다.
“일레시아는 어디 있지? 함께 있는 게 아니었나?”
이 말을 듣고 이그시아가 흠칫 놀라면서 물었다.
“팀장이 일레시아가 여기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아?”
“방금 전에 일루리아님을 만나서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대충 전해 들었다.
그분께서는 너희들이 일레시아를 도와서 이레니아를 구출하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 일레시아는 지금 어디 있는 거냐?”
이르피오는 이아테스가 거듭 재촉해서 묻자 살짝 민망한 듯 대꾸했다.
“그게 저······ 일레시아는 혼자서 이레니아를 구출하겠다고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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