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14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00)

‘이봐, 거기 젊은이? 괜찮으냐? 조금만 참아라! 내가 지금 구하러 가겠다!’

일루리아는 열수층 깊은 곳에 빠진 젊은 남자가 있으며, 그 주변의 아르케 흐름으로 보아 아직 생명 활동이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자 당연히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언뜻 봐도 제법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그런 상태에서 이렇게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은근히 감탄스러웠다.

저 친구도 분명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까운 인재를 많이 잃어버렸다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일루리아였다.

또다시 저런 인재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그녀는 이 긴박한 와중에서도 바이크를 몰고 빠르게 그쪽으로 접근했다.

‘이 따스한 느낌은 뭐지?’

일루리아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거의 다 죽어가던 이아테스는 갑자기 기분 좋은 따스한 기운이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한 추위에 떨다가 갑자기 따뜻한 봄 햇살을 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루리아가 자신이 지닌 다섯 개의 코어를 펌프처럼 이용하여 물 속에 남아 있는 아르케를 최대한 끌어들여 힘을 보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아테스도 자연스럽게 사방에서 몰려오는 막대한 아르케의 흐름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이아테스 또한 불 속성의 레드 코어가 다수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루리아가 만들어낸 아르케의 흐름과 상성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렇게 상성이 좋은 아르케의 흐름에 휩싸이자 쇠약해졌던 기운이 급속히 회복되면서 팔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기운이 빠르게 회복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가 그 극한 상황이 갑자기 해소되는 극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에, 꽉 막혔던 곳이 툭 터지듯이, 머릿속에서 좀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젊은 친구! 내 손 잡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잖아?’

그러는 동안 어느새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일루리아가 이아테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이 불쌍한 젊은이를 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손이 닿자마자 그 부분을 연결 통로로 삼아서 자신의 아르케를 신속하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비록 두 사람의 주된 아르케 속성은 레드 아르케로 동일하다고 해도, 엄밀히 말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루리아의 아르케에는 단순 계산으로 화이트 아르케가 대략 40% 정도, 이아테스의 아르케에는 브라운 아르케가 약 33% 정도 섞여 있었으니까.

거기다 같은 레드 아르케라고 해도 사람마다 신체적 특징이 다른 것처럼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남에게 자신의 아르케를 나누어주어 힘을 보충해준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일루리아가 하는 것처럼, 특별한 변환 장치 없이 화이트 아르케는 최대한 제외하고 레드 아르케만 적절히 조절하여 주입해주는 일은, 주사기 하나만 가지고 혈액형이 다른 사람에게 수혈을 해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일루리아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이 신중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면, 힘을 보충해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레드 아르케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일루리아가 주입한 레드 아르케가 이아테스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두 사람의 아르케 흐름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부작용 없이 부드럽게 연결되었다.

동시에 이아테스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던 모종의 변화가 결정적으로 자극을 받아 마침내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네 번째 코어의 각성이었다.

주변의 강한 열기, 특히나 일루리아의 영향으로 인해 네 번째 코어의 속성 역시 레드 코어로 결정되었다.

이제 이아테스는 3개의 레드 코어와 1개의 브라운 코어를 지니게 된 셈이었다.

‘이 친구 보게! 이 와중에 새로운 코어를 각성했네!’

경험이 풍부한 일루리아는 당연히 손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만으로 이아테스가 새로운 코어를 각성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방의 체내를 순환하는 아르케의 비율은 레드 66% 대 브라운 33%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레드 아르케의 비율이 급격히 치솟았으니, 그녀로서는 눈 앞의 젊은이의 머릿속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훤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건 둘도 없는 기회다!’

일루리아는 코어가 각성하는 순간, 일시적으로나마 아르케의 출력이 급상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출력 상승은 실로 막대하여, 평소에 억지로 흉내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 역시 과거에 코어 각성 순간의 엄청난 출력 상승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위기에서 빠져 나온 경험이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그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두 사람의 아르케가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만약 일루리아가 까딱 힘 조절을 잘못했다면, 출력이 급상승한 상대방의 아르케가 그대로 그녀 쪽으로 역류하여 체내 순환계에 큰 손상을 입힐 위험성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일루리아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정도로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전세를 뒤집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코어의 각성으로 인한 출력 상승 덕분에, 이아테스의 몸은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진 상태였다.

거기다 가까운 곳에는 마침 일루리아가 잔뜩 끌고 온 아르케가 가득하기까지 했다.

연료가 잔뜩 쌓여 있는 공간에 횃불을 집어 던진 격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아르케는 순식간에 뜨거운 레드 아르케로 실체화되면서 무서운 기세로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물 속에 투하되어 있었던 타베스의 폐기물이 견디지 못하고 타버리면서 아르케가 더더욱 많아지는 선순환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지닌 레드 코어를 합치면 무려 6개, 전체 코어의 숫자는 총 9개나 되었다.

거기다 코어 각성으로 인한 순간적인 출력 상승까지 더하면, 일시적으로나마 활용할 수 있는 힘은 실로 막대한 양이었다.

그 대신 잠시라도 망설이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곧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힘이기도 했다. 서둘러 이 힘을 사용해서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이, 젊은 친구! 여기 꼭 잡아!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 다시 빠져나갈 수 없어!’

일루리아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이번 사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이사엘라는 곧장 지하 수맥을 타고 자비의 대륙으로 가서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연찮게 찾아온 이 기회를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연히 블랙 코어를 각성하여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기세 등등한 이사엘라에게 한방 제대로 먹일 수가 있을 터였다.

‘젊은 친구!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어서!’

일루리아는 아직도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의 아르케를 최대한 이용하여 이아테스에게 강한 메시지를 보내려고 노력했다.

이아테스는 여전히 모든 것이 얼떨떨한 상황이었지만, 비슷한 속성의 레드 아르케를 타고 전해지는 그 메시지를 어찌어찌 알아 들었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고분고분 일루리아가 시키는 대로 바이크의 조종간 한쪽을 붙잡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레드 코어 6개, 거기다 코어 각성으로 인한 출력 급상승의 효과까지 더해져, 바이크의 변환 장치는 물론 동력계 자체가 과부하로 녹아 내릴 만큼 엄청난 양의 아르케가 유입되었다.

당장 바이크에서 과부하 경고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일루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 경고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아예 제한 장치를 박살내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든 게 다 끝장인데 그런 하찮은 경고 따위는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제한 장치가 망가지자, 바이크는 주변에서 유입된 레드 아르케에 완전히 휩싸이면서 시뻘건 불덩어리처럼 변한 채 엄청난 속도와 기세로 위쪽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건 질주를 넘어 거의 폭주나 다름이 없었다.

[이건 또 뭐야?]

한창 지하 열수층에서 사전에 준비해 놓은 타베스 수프를 흡수하면서 기분 좋게 덩치를 불리고 있던 이사엘라는, 아래쪽에서 웬 강력한 불덩어리 하나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루리아와는 달리 실전 경험이 심각하게 부족한 이사엘라는 지금 이 순간이 중대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편들어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주었던 ‘우연’이라는 요소가, 이번에는 저쪽을 편들었다는 사실도 빨리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그저 자신과 연결된 이형성체들을 보내어 어설프게 그 불덩어리를 막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그런 어설픈 방어 동작으로는 이판사판 돌진해 오는 일루리아와 이아테스의 바이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일루리아는 원래부터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한 돌격 전술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냥 무모한 것이 아니라 그 돌격이 먹힐지 어떨지 여부를 판단하는 안목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에 전설의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공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상대방이 경험 부족에다 자아 도취가 겹치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일루리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앞을 가로막는 이형성체들을 닥치는 대로 불태우면서, 이사엘라의 본체를 향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갔다.

물론 전체적인 힘의 크기를 비교하면 여전히 이사엘라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원래 자기 보다 우세한 적을 상대할 때에는 이런 식으로 적의 심장부를 과감하게 기습하는 돌격 전술이 대단히 효과적인 법.

이사엘라는 돌진해 온 바이크와 충돌하는 순간에서야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완벽하게 허를 찔린 그녀는 그대로 바이크에 부딪힌 상태에서 강제로 위쪽을 향해 떠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이사엘라는 자신이 아까 기세 좋게 파고 들었던 바위산 정상으로 도로 밀려 나와 바이크와 함께 높이 솟구쳐 올라갔다.

그건 마치 검붉은 불꽃과 연기를 내뿜으면서 화산이 폭발하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 화려한 ‘화산 폭발’과 동시에, 이사엘라가 지하 수맥을 통해 자비의 대륙 본토로 직접 침투해 들어간다는 거창한 계획도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실로 한 순간의 방심이 낳은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였다.

이사엘라를 지상까지 도로 밀어내는 엄청난 일을 해낸 수공양용 바이크는, 결국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상공에서 장렬하게 폭발해 버렸다.

그런데 이사엘라의 본체와 충돌한 상태에서 아르케가 잔뜩 충전된 바이크가 강한 폭발을 일으키자, 그 또한 당하는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사엘라는 갑작스러운 사태 변화와 연이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잠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바이크가 폭발하기 직전, 일루리아는 얼른 이아테스를 데리고 탈출하여, 아직 붕괴되지 않은 바위산 중턱쯤에 무사히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둘 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으며, 무엇보다 싸울 힘과 투지도 충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네가 혹시 이번에 태스크 포스팀을 이끌고 여기 투입된 이아테스 팀장이냐?”

일루리아는 지상에 착지하여 한숨 돌리자마자 이아테스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일루리아님 아니십니까? 오래 전에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아테스도 한숨 돌리자마자 당장 일루리아를 알아보면서 그 와중에서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오, 날 알아보다니 기쁘구나. 우선 새로운 코어를 각성한 걸 축하한다. 이제 코어가 4개 맞지?”

“그렇습니다.”

“새로운 코어를 각성하는 경험은 언제나 흥분되는 법이지만, 네 번째 코어의 각성은 더더욱 뜻 깊은 일이지.

4개부터는 아르케를 이용해서 신체를 재구성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다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한가하게 신체를 재구성하고 있을 시간이 없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부상을 당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난 견딜 만 하다. 넌 어떠냐?”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고 배에 구멍이 뚫려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아테스가 입술을 꽉 깨물면서 하는 말을 듣고 일루리아는 모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너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야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당연히 더 싸울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새로운 코어를 각성했는데,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죽더라도 끝까지 저 괴물과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일루리아는 이아테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아까 자신과 그의 아르케가 연결되었을 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성이 좋았던 것을 떠올리자 더더욱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질문까지 던지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