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45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31)
요새 내부에 잔류한 이형성체들은, 대륙을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날뛰고 있는 주인의 의지 자체는 그대로 전달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극히 공격적이었으며, 심지어 어떻게든 빨리 밖으로 나가서 자신들의 주인에게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날카로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지금 이아테스는 머릿속에 코어가 넷이나 되는데다가, 손에는 이클리프가 쓰던 창까지 들려 있었기 때문에 이형성체 몇 놈 정도는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장검을 빼서 쓸 필요도 없었다.
아니, 겨우 이 정도 잔챙이 적을 처리하기 위해 장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간, 스스로의 의지가 있고 자존심과 콧대가 엄청나게 높은 플래티너스 아퀼라가 절대로 협력하려 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벌써부터 장검이 자신의 힘을 빌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아테스는 이제 더 이상 별 필요가 없어진 구식 태블릿을 멀찌감치 던져 버린 다음, 이클리프의 창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답답했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낯선 무기인 이 창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연습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아주 좋은 희생양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는 당연히 예전에 검술뿐만 아니라 창술 훈련도 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평소 자주 쓰던 무기가 아니라서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쩐지 이클리프의 사고 방식이 나한테 전염된 것 같군.’
눈 앞에 나타난 적에 대해 골치 아프다는 생각 대신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자신을 보면서, 이아테스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곧이어 그는 3개의 레드 코어를 크리스탈룸 창날에 동조시키고, 브라운 코어 1개는 창대에 동조시켰다.
그러면 불 속성의 레드 아르케가 잔뜩 충전된 창날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며, 페룸 합금으로 만들어진 창대는 중력 속성의 브라운 아르케 덕분에 금속 결합이 강화되어 한층 더 튼튼해질 터였다.
이런 식으로 새로 손에 넣은 무기를, 새로 각성한 것까지 포함하여 총 4개의 코어와 동조시킨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나름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아테스로서도 실제로 싸워보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겁 없이 달려오는 이형성체를 향해 마주 달려가면서 힘껏 창을 내질렀다.
붉게 달아오른 크리스탈룸 창날이 당장 이형성체의 가슴 한복판을 관통했다.
다음 순간, 창날이 관통한 가슴 한복판에서부터 이형성체의 온몸이 빠르게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흡사 불이 잘 붙는 기름 종이에 작은 불씨가 떨어진 것 같았다.
불씨가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불길이 둥그렇게 번져 나가면서 종이 전체가 다 타 버리는 것처럼, 이형성체의 온몸은 붉게 물든 창날에서부터 시작되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강한 화염에 삼켜져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각되어 버렸다.
이아테스는 이미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찌르고 있게 된 창을 끌어 당겨 회수한 다음, 이어서 덤벼드는 이형성체는 창날이 아니라 창대로 후려 갈겼다.
그 창대도 중력 속성의 브라운 코어의 힘으로 인해 강도는 물론이고, 타격력 자체가 크게 강화되어 있었다.
그 창대로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이형성체는 순식간에 목 위쪽 부분이 산산조각 나면서 사라졌으며,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이 소멸하고 말았다.
이아테스는 자신의 코어와 동조시킨 창의 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자 속으로 살짝 놀라는 한편, 자기도 모르게 한층 더 힘이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심, 이래서 이클리프가 세상이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 보니, 설마 이 창에 이클리프의 잔류사념 같은 게 남아 있어서 자신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망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 망상과는 별개로, 오래잖아 이아테스는 격납고로 통하는 복도에서 배회하고 있던 이형성체들을 싹 쓸어 버렸다.
그가 격납고 내부 출입문 앞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보니, 복도에는 약간의 신체 잔해를 제외하면 한바탕 싸운 흔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크게 힘든 싸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이클리프의 창을 사용하는 방법은 어느새 손에 많이 익은 것 같았다.
복도와 연결된 격납고 내부 출입문은 이아테스가 다가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르 열렸다.
당연한 소리지만, 격납고는 출입이 허락된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보안 구역이다.
그런데 그 출입 허가 여부는 어디까지나 요새의 메인 시스템이 판단하는 것이고, 그 메인 시스템은 지금 일레시아가 통제권을 장악한 상태이니 무사통과가 가능한 것이다.
일레시아가 자신을 지켜보면서 꼼꼼하게 도와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아테스는 새삼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아테스가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격납고 내부에도 이미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제법 길게 연결된 철제 계단 아래로, 수공양용 바이크 몇 대와 비상 탈출용으로 보이는 작은 잠수정이 한 대 보관되어 있는 광경이 내려다 보였다.
거기다 뜻밖에도 훤한 조명 아래에서 이형성체 두 놈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모습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저 놈들이 어쩌다가 격납고 안에 들어와 있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은 두 놈 모두 안절부절 못한 채, 아래층에서 바이크와 잠수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격납고 외부 출입문 방향만 애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밖으로 나가서 자기들 주인과 합류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이아테스라는 적대적인 존재가 자신들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이형성체 두 놈은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 철제 계단을 뛰어 올라와 위층의 내부 출입문 쪽으로 달려와서 덤벼들려고 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좌우 계단으로 나누어 올라와 거의 동시에 협공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역시나 둘 다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신체가 이상하게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이미 이형성체와 몇 차례 싸워본 이아테스로서는 그런 흉측한 모습을 봐도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아테스는 두 놈 가운데 한 놈은 오른손만을 사용해서 창을 내질러 간단히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소각시켜 버렸다.
나머지 한 놈은 아예 창을 쓸 필요도 없이 손가락을 쫙 뻗은 왼손을 내밀어 섬뜩하게 뒤틀린 모양을 한 머리를 단단히 움켜쥔 다음, 그대로 브라운 아르케를 집중시켜 악력을 몇 배나 증가시켰다.
그 바람에 머리를 고스란히 강력한 분쇄기 안에 집어 넣은 꼴이 된 이형성체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두개골이 우지직 박살이 나면서 금세 소멸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격납고 내부도 순식간에 말끔히 정리되었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공양용 바이크 가운데 하나가 자동적으로 동력이 켜지더니, 레일을 따라 외부 출입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대기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아테스에게 저 대기 장소에서 이 바이크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메인 시스템의 통제권을 장악한 일레시아가 도와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아테스의 입장에서는 아까부터 이번 사건에 뛰어든 이후 거의 처음 제대로 된 관리요원의 도움을 받는 듯한 느낌이라서 묘하게 감동하는 기분까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아테스는 긴 철제 계단을 이용하여 아래층으로 내려온 다음, 대기장소에 미리 준비된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그는 바이크의 조종간을 붙잡으려다가 문득 손에 들고 있는 창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그러자 또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바이크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 장병기 보관용 거치대가 자동으로 열렸다.
일레시아가 여기다 창을 꽂아두면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아테스는 얼른 몸을 돌려 창을 그 거치대에 거꾸로 꽂았다.
그러자 거치대의 구멍이 자동적으로 꽉 조여 들면서 창의 모양에 맞게 닫혔고, 창은 그대로 바이크 뒤쪽에 마치 솟아오른 장대처럼 고정되었다.
곧이어 양손이 자유롭게 된 이아테스가 바이크의 조종간을 단단히 붙잡고 발판에 자연스럽게 발을 올리자, 바이크의 조종 방식이 자동에서 수동으로 전환되면서 통제권이 그에게 넘어왔다.
다만, 레일의 통제권은 여전히 메인 시스템, 다시 말해 일레시아에게 있었다.
바이크는 다시금 레일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여, 곧 정면에 자리잡은 거대한 외부 출입문 앞으로 이동해서 잠깐 멈춰 섰다.
아마도 격납고 통제 시스템은 원래 보조 생체 모듈이 전담했을 터였다.
그런데 메인 시스템에는 지금 생체 모듈이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레시아는 이 모든 조작을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인지는, 관리요원이 아닌 이아테스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실제 전투 현장에서 싸우지는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관리요원의 역할. 이아테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새삼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일레시아 같은 책임감 있고 성실한 요원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동시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탁상공론만 일삼는 사람들에 대해 깊은 경멸감을 느꼈다.
그 경멸의 대상에는 결국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인 이베리스 국장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아테스가 탄 바이크가 레일을 타고 외부 출입문 앞으로 이동하여 잠깐 멈춰 서자, 곧이어 뒤쪽에서 중간 격리문이 내려와 닫히면서 바이크가 있는 공간이 격납고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되었다.
그 직후 외부에서 유입된 대량의 바닷물이 격리 공간으로 밀려들어왔다.
동시에 바이크의 보호막이 가동되면서, 내부 동력 시스템에 장착된 크리스탈룸 결정체에 충전되어 있던 화이트 아르케가 바이크 주변에 일종의 에어포켓을 형성했다.
때문에 이아테스는 전혀 물에 젖지도 않았고 호흡에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그렇게 격리 공간 내부에 바닷물이 가득 차자 마침내 외부 출입문이 개방되었다.
그런 다음 레일과 바이크의 연결 부분에서 잠금 장치가 완전히 해제되자, 이제 이아테스는 자유롭게 바이크를 조종하여 요새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바이크를 가속하여 그대로 격납고를 완전히 빠져나갔다.
‘원래는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고, 팀원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요새를 탈출하고 싶었는데······’
혼자 요새의 격납고를 빠져나오면서 이아테스는 내심 씁쓸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팀원들을 모조리 내버려둔 채 자기만 요새를 탈출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은 그런 잡념 같은 건 빨리 떨쳐 버리고 눈 앞의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이아테스가 해수면 방향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완전히 바닷물 밖으로 빠져 나오자, 자동적으로 에어포켓이 걷히면서 동력 시스템이 블루 아르케 중심에서 화이트 아르케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 전환 작업을 위해 수면 위에서 잠깐 멈칫했던 바이크는 신속하게 비행 모드로 바뀌었다. 이아테스는 그 상태에서 바이크를 다시 가속하여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맙소사!”
이아테스가 모처럼 요새 밖으로 나와서 공중에서 암초를 살펴보니, 그곳은 일루리아와 이사엘라가 한바탕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마치 방금 전에 이 암초를 표적으로 삼아 대규모 폭격 훈련이라도 실시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바위섬 표면이 엉망진창으로 박살이 나 있음은 물론, 특히나 암초 중앙부의 바위산 정상은 완전히 함몰된 상태였다.
일루리아와 이사엘라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둘 다 저 함몰된 지형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암초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3대의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천천히 이동하면서 재배열되기 시작한 모습도 보였다.
덕분에 그 동안 포집기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타베스를 모아서 바위산 정상으로 집중시켜 이사엘라에게 힘을 주고 있던 에너지 장벽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암초 주변에 밀집된 타베스를 한창 방어선 밖으로 밀어 내는 중이었다.
마치 아주 세심하게 빗질을 하여 바닥에 널려 있는 먼지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 쓰레받기로 가져가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저렇게 하기 위해서는 3대의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서로 간섭하여 만들어내는 에너지 장벽의 공간 구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아주 정교하게 계산하고, 그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제너레이터의 운용 방법을 다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게 얼마나 골치 아프고 힘든 작업인지 이아테스로서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일레시아는 이런 복잡한 계산과 운용 작업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격납고에서 그를 도와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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