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99화: 아들들의 전쟁 (30)
이렇게 용맹한 야만족들이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갖추고 플로젠 왕국 남쪽 국경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프레데일과 파드무스도 페레이즈 태자의 장기적인 안목에 대해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태자가 말을 계속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야만족을 신속하게 격파하여 케르비오 왕국의 건국을 확실하게 저지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그 용맹한 병사들을 우리가 지휘하여 서쪽의 네필린과 북쪽의 카스트레아를 공격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기반도 함께 닦아야 한다.
이번 전쟁에 대한 나의 목표는 이렇게 확고부동하게 정해졌으니, 그대들은 다소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프레데일과 파드무스는 즉시 머리를 숙이고 태자에게 복종의 뜻을 나타냈다.
그들 세 사람은 곧이어 기병들을 지휘하여 신속하게 북동쪽 언덕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플로젠 측의 부상병과 시체는 모두 회수하여 말에 싣고 갔기 때문에, 그들이 철수한 이후 들판에 즐비하게 남아 있는 시체는 전부 케르비오 병사들의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북동쪽 언덕에서부터 이곳 들판까지 수많은 케르비오 족의 시체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거의 시체나 다름 없이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중상자도 일부 섞여 있었지만, 어차피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23일 오전에 한바탕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결과, 플로젠 측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약 90명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
케르비오 측은 부상자들이 거의 대부분 방치되거나 확인 사살을 당한 탓에 부상자는 없고 전사자만 약 600명이 발생했다.
플로젠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교환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젠 측은 빠른 시간 내에 케르비오 족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교환비를 더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서 한층 더 높은 목표와 기준을 설정하고자 했다.
반면에 케르비오로서는 기준을 아무리 낮게 잡아도 도저히 성공한 전투라고 평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23일 오후, 파로크 성채에서는 어젯밤과 같은 장소인 대연회장에서 부족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작전 회의가 열렸다.
이미 오전 전투의 결과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무거웠다.
카르스덴 왕자는 상당히 불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곁에는 어느새 고문관이나 참모 같은 입지로 격상된 크로키가 서 있었다.
그가 계속 나직하게 카르스덴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칼마르는 무척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과연 저 간사한 크로키가 카르스덴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생각하면 그는 그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따름이었다.
마침내 크로키와 뭔가 의논을 마친 카르스덴이 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오전에 있었던 전투 결과에 대해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오.
참으로 말을 꺼내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리석고 무모한 카를로만이 경거망동을 하는 바람에 귀중한 아군 병사가 대략 600명이나 희생되었소.
이는 내 동생이 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결과 발생한 참사요.
형으로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을 제대로 단속하고 가르치지 못했으니 나 또한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나는 그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면서 이번 참사의 책임을 법과 원칙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오.”
카르스덴은 어디까지나 동생이 그의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행동한 탓에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카를로만은 비록 내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이지만, 나는 왕국의 지도자로서 공정을 기하기 위해 그에게 엄한 처벌을 내릴 생각이오.
여봐라, 죄인 카를로만을 이리로 데려와라!”
카르스덴이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미리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장한 병사 둘이 카를로만을 데리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카를로만은 진작에 직속 부하들을 시켜서 자기 자신을 밧줄에 꽁꽁 묶은 상태였으며, 자진해서 신분이 낮은 죄인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장내에 있던 부족 대표들, 특히나 카를로만이 구해준 프리트만과 그의 아버지인 프라티온은 미안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그 젊은 왕자를 바라보았다.
카를로만이 형의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자, 카르스덴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매서운 목소리로 동생을 꾸짖었다.
그는 어느새 장내에 동생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생겨났음을 느꼈기 때문에 아까보다 한층 화가 나 있었다.
“카를로만,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지? 파로크 성채의 북쪽 성벽에서 대기하는 건 좋지만, 분명히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내 말이 틀렸느냐?”
카를로만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형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명령하셨고,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동생이 명령을 똑똑히 들었음을 인정하자, 카르스덴은 언성을 더 높였다.
“그런데 너는 감히 케단 부족의 연로한 부족장을 선동하여 병력을 500명이나 빌려가지고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네가 공을 탐내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소중한 아군 병사들이 600명이나 희생되고 말았다.
심지어 전사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진과 너무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어서 썩기 전에 시체를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지 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그 전사자들 모두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케르비오 왕국의 귀한 젊은이들이다. 그것도 물론 잘 알고 있겠지?”
카를로만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이면서 말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전사자 가족들에게는 실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다. 넌 앞으로 영원히 그 가족들을 볼 낯이 없을 거다.
너에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신이 공을 탐내서 경거망동을 하는 바람에 당신 남편, 아들, 형제가 죽었다고 뻔뻔스럽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카르스덴이 동생을 꾸짖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준엄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이라고 해서 봐주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에 대한 부족 대표들의 반응은 다소 엇갈렸다.
일부 부족장들은 그의 엄격함과 공정함을 칭송했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부족장들은 아무리 그래도 친동생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면서 떨떠름한 입장이었다.
“카를로만, 넌 비록 내 친동생이지만, 나는 네 경거망동으로 인해 희생된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의 억울함을 위로하기 위해 널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명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카르스덴의 매정한 말을 듣고, 카를로만은 그저 더 깊이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저는 형님의 엄한 명령을 어기고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형님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벌해 주십시오.”
카를로만은 아까 칼마르가 충고한 그대로 최선을 다해 억울한 심정을 억누르면서 무조건 몸을 낮추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프리트만과 프라티온 부자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소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프리트만이 카르스덴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존경하는 카르스덴 왕자님, 동생인 카를로만 왕자님은 개인적인 공적을 탐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적 기병에게 쫓기는 저를 구하려고 출진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오전의 전투에서 수많은 아군이 희생된 것은 전적으로 제가 무능한 탓에 벌어진 참사입니다. 엄벌을 내리시려면 이 무능한 놈을 벌해주십시오.
목숨 걸고 저를 구해준 카를로만 왕자님이 처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 보느니, 차라리 제가 처벌을 받고 싶습니다.”
뒤이어 프라티온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카를로만 왕자님은 막내 아들을 구해 달라는 저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출진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들을 구하는 일인데, 제가 무슨 그에 대해 선동을 당하고 말고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잘못을 따지자면 카를로만 왕자님에게 명령 불복종을 강요했으며, 북쪽 성벽을 수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음에도 사사로이 병력을 출진시켜 아들을 구하려고 했던 이 늙은이의 죄가 더 큽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된 책임을 통감하오니, 부디 저를 엄하게 처벌하시고 카를로만 왕자님은 선처해 주십시오.”
그들 부자는 단지 말로만 선처를 호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재빨리 카를로만의 양쪽에 자리잡고 나란히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들의 간곡한 호소를 듣자, 잔뜩 화가 나 있던 카르스덴마저 약간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때 옆에 있던 크로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카르스덴 왕자님, 이제 분명히 아셨겠지요? 보시다시피, 카를로만은 이미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왕자님께서는 동생을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처벌하려고 하시는 것뿐인데, 벌써 그를 따르는 파벌이 감히 왕자님의 뜻을 무조건 거역하고 나서지 않습니까?
이대로 카를로만을 그냥 내버려두면 장차 더 큰 파벌 싸움이 벌어질게 뻔합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엄한 처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당초 마음 먹으신 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소신 있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카르스덴은, 크로키의 말을 듣자 눈 앞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선왕 시절부터 공을 많이 세운 늙은 부족장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불쌍한 모습이 아니라, 머리가 굵어진 동생이 어느새 자신만의 파벌을 구축하여 형과 맞서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늙은 부족장에게 대놓고 동생과 파벌을 만들 셈이냐고 꾸짖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르스덴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프리트만은 어디까지나 나의 명령에 따라 북동쪽 언덕의 적을 공격했을 뿐이니 비록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명령 불복종은 아니오.
또한 프라티온 부족장은 막내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카를로만의 꼬드김에 넘어갔을 뿐이며, 딱히 본인이 직접 맡은 수비 구역을 이탈한 것은 아니니 큰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물론 두 사람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오전 싸움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나의 동생 카를로만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소.”
카르스덴은 여기서 프라티온과 프리트만 부자의 얼굴을 차례차례 바라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대들이 나의 동생을 감싸주는 건 형으로서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나는 케르비오 왕국의 지도자로서 법과 원칙을 어기고 동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소.
그대들의 뜻은 이미 잘 알았으며 동생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할 때 충분히 참고할 것이오. 그러니 어서 일어나서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프라티온은 이 말을 듣자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경험이 풍부한 이 노인은 카르스덴이 동생을 제법 깊이 의심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카를로만을 옹호하는 모습이 일종의 파벌 행동처럼 비쳤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이다.
프라티온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서더니, 갑자기 윗도리를 훌훌 벗어 던지고 상처투성이의 상반신을 전부 드러내어 보여주었다.
늙고 쭈글쭈글한 그의 몸에는 온갖 흉터 자국이 가득했다. 카르스덴을 포함하여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 늙은 부족장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
“카르스덴 왕자님, 이 늙은이가 돌아가신 선왕 폐하를 모시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기 시작한 것이 벌써 40년 전의 일입니다.
그 긴 세월의 흔적은 바로 이 몸뚱이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뱃가죽의 상처는 선왕 폐하를 지키기 위해 적의 창을 대신 몸으로 막은 흔적입니다.
그리고 이 어깨의 상처는 10년쯤 전에 선왕 폐하를 거역한 부족장과 결투를 단둘이 벌이다가 놈의 도끼에 베여 거의 팔이 잘려나갈 뻔했을 당시의 흔적입니다.
그 사악한 악당 놈은 결국 용케 죽지 않고 도망쳐서, 나중에 기어코 제 아내를 죽이고 말았지요. 그 사건은 왕자님께서도 아마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늙은 부족장의 수많은 흉터를 보고 쓸쓸한 회상을 들으면서 회의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 모두 저절로 숙연해졌다.
심지어 크로키까지도 잠시나마 할 말이 없어졌을 정도였다.
“선왕 폐하를 위해 40년 동안 충성을 다 바친 이 늙은이에게 남은 거라곤 상처투성이 몸뚱이와 무능하고 순진한 막내 아들뿐입니다. 물론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늙은이도 결국 사람인지라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단 하나 남은 아들을 먼저 보내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프라티온은 여기서 손으로는 그의 아들 프리트만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눈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카를로만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마터면 먼저 조상신 곁으로 떠날 뻔한 아들이 카를로만 왕자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게 비록 형님의 엄한 명령을 어긴 행동이었다고 할지라도, 이 늙은이와 제 아들은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감히 간청 드립니다. 이 간청이 카르스덴 왕자님께 법과 원칙을 어기시라고 부추기는 행위라는 점은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늙은이가 지난 40년 동안 선왕 폐하와 이 나라에 대해 충성과 헌신을 다 바쳤음을 감안해서, 부디 이번 한번만 동생인 카를로만 왕자님을 선처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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