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46)
쿠라토르와 일루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힘 겨루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거대한 기계 쿠라토르의 날개에 집중된 화이트 아르케는 일종의 보호막을 형성하여, 일루리아가 필사적으로 방출한 레드 아르케 빔의 뜨거운 열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개방된 출입문에 틀어 놓은 에어커튼이 밖에서 들어오는 열기를 차단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만, 3쌍의 날개가 모든 열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쿠라토르의 출력과 증폭 시스템이 효율적이고 막강하다고 해도, 일루리아 또한 즉결 처형에 맞서서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빔의 출력이 제법 상당했던 것이다.
덕분에 빔의 열기 가운데 일부가 화이트 아르케의 보호막을 뚫고 금속제 날개로 스며들었으며, 결국 일부 깃털이 벌겋게 녹아 내리긴 했다.
만약 이대로 일루리아가 빔을 계속 퍼부어댄다면 좀더 많은 깃털을 녹일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최대 출력으로 빔을 방출할 수 있는 지속 가능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루리아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강력한 빔을 무한정 방출할 수는 없었다.
폐활량이 엄청난 가수라고 해도 숨쉬지 않고 영원히 노래를 계속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후, 여기까지인가?”
일루리아는 결국 숨을 헐떡이며 빔 방출을 중단했다. 몸 안에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다 쥐어짜서 빔을 날린 상태였다.
그녀로서는 나름대로 사력을 다한 셈이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상대가 너무 강했다.
쿠라토르의 금속 날개는 표면의 깃털이 약간 녹아 내리긴 했지만 뼈대까지 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날개의 보호를 받은 쿠라토르 본체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일루리아가 빔 방출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자, 거의 전부 소모되었던 아르케가 그녀의 몸 안에서 급속히 재충전되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함몰 지형 내부에 있던 타베스는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일레시아가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재배열하면서 에너지 장벽으로 타베스를 최대한 긁어 모아 방어선 밖으로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스카엘이 반쯤 클라데스화 된 이사엘라를 크리스탈룸 관 안에 집어 넣어 데려간 상태였으니까.
거기다 아까 이스카엘과 쿠라토르가 강력한 실버 아르케와 골드 아르케로 힘 대결까지 벌였으니, 이 주변에 타베스가 아예 남아날래야 남아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일루리아가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연료나 탄약이라고 할 수 있는 원초 아르케는 주변 공간에 풍족하게 널려 있었다.
원초 아르케는 우선 강력한 펌프처럼 동작하는 5개의 코어에 의해 사방팔방으로부터 그녀의 몸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거기서 코어를 거치면서 대략 레드 아르케 60%, 화이트 아르케 40%의 비율로 정해진 속성을 띤 채 실체화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순환계를 이용해서 몸 안팎의 필요한 곳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일루리아의 몸에서 이와 같은 재충전과 회복 과정이 무척 신속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문제는 비슷한 재충전과 회복 과정이 쿠라토르의 거대한 몸체 안에서 더 빨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전투에 활용 가능한 원초 아르케가 주변에 널려 있는 상황은, 마찬가지로 아르케를 주된 동력으로 하는 쿠라토르에게도 똑같이 유리한 환경이었다.
방금 전의 힘겨루기에서 소모된 힘을 한발 먼저 회복한 쿠라토르는, 일루리아가 회복할 시간을 넉넉히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쿠라토르는 몸을 보호하던 3쌍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아무런 손상이 없는 본체를 다시 드러낸 다음, 그대로 입 부분을 크게 벌려서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골드 아르케의 파동을 쏟아냈다.
쿠라토르의 ‘입’은 그야말로 커다란 파동 발생 장치.
이번에는 평범한 대화 메시지가 아니라, 아까처럼 강력한 정신 공격 펄스가 실려 있는 파동이 일루리아를 향해 물밀듯이 밀려가기 시작했다.
원래 이베리스가 가지고 있는 골드 코어만 해도 5개나 되는데, 그 출력이 쿠라토르의 동력계를 통해 몇 배로 증폭되었으니, 이번에 뿜어져 나온 골드 아르케의 그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일루리아의 입장에서 가장 꺼려질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취약한 속성의 공격은 바로 지금 밀려오는 골드 아르케 정신 공격이었다.
아까도 이사엘라에게 기습적으로 정신 공격을 당해서 하마터면 머릿속 코어의 통제권을 다 빼앗기고 큰일날 뻔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베리스의 정신 공격 솜씨는 이사엘라 보다 훨씬 뛰어나서 은하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연히 더 상대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일루리아는 아직 아르케의 재충전이 덜 끝난 상태에서, 다급하게 왼손에 들고 있던 플래티너스 아퀼라 장검으로 자신의 정면을 향해 최선을 다해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오른손의 대검 피어싱 아울은 일루리아를 도와서 방금 전에 전력으로 레드 아르케 빔을 방출한 탓에 다소 지쳐 있었다.
때문에 그나마 덜 지치고 힘이 남아 있는 장검을 이용해서 바람의 칼날을 날렸던 것이다.
초승달 비슷한 모양으로 날카롭게 밀집된 화이트 아르케의 칼날은, 물밀듯이 몰려오는 골드 아르케 파동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 정면 충돌했다.
당연히 출력의 크기만 놓고 보면 바람의 칼날이 골드 아르케 파동 보다 훨씬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스카엘처럼 실버 아르케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 같은 게 없는 일루리아로서는, 골드 아르케를 이용한 정신 공격에 맞서려면 이 방법 외에는 당장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날카롭게 날아간 바람의 칼날은, 마치 예리한 커터가 두꺼운 종이를 자르듯이, 물밀듯이 몰려오는 골드 아르케의 파동을 좌우로 쫙 갈라 놓았다.
좌우로 갈라져서 몰려오는 골드 아르케의 파동 사이에 절묘하게 버티고 서 있으면, 일루리아는 그나마 정신 공격의 영향을 덜 받게 될 터였다.
정말 본인이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한심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고, 실제로 잠시 동안은 약간 효과가 있었다.
일루리아는 아까 이스카엘이 정신 공격을 막은 직후, 크게 약화된 골드 아르케가 잠깐 밀려오는 것으로 끝났던 당시에 경험했던 가벼운 현기증만 다시 느꼈을 뿐이었다.
문제는 일루리아가 날린 바람의 칼날이 골드 아르케의 파동을 전부 다 갈라 놓기 전에 소멸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워낙 근본적인 출력 차이가 컸던 데다가, 일루리아가 힘이 덜 회복된 상태에서 급하게 자기 몸을 보호하려고 칼날을 날렸기 때문에 더더욱 오래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즉시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멀쩡한 나머지 골드 아르케의 파동이 고스란히 일루리아를 덮쳤다.
그 파동에 실린 정신 공격 펄스가 즉시 일루리아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보통 골드 아르케의 정신 공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당연히 골드 코어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골드 아르케에 실린 정신 공격 패턴을 분석한 다음, 그걸 상쇄할 수 있는 골드 아르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아까 이스카엘이 했던 것처럼 조금 무식한 방법을 써서 실버 아르케로 골드 아르케를 초기화시켜 원초 아르케로 되돌려버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정신 공격 패턴이고 뭐고 죄다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루리아는 골드 코어도 실버 코어도 없어서 앞선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쪽도 쓸 수가 없었다.
물론 모든 종류의 실체화된 아르케는 이질적인 아르케에 대해 어느 정도 저항성을 지니기 마련이었지만, 이 정도로 밀려오는 골드 아르케의 출력이 강하면 그런 기본적인 저항성 따위는 사실상 무의미했다.
일루리아의 몸 밖을 보호하던 레드 아르케와 화이트 아르케는 약간의 저항성을 보였음에도, 오래잖아 밀려온 골드 아르케에 휩쓸려 집어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곧장 일루리아의 체내로 침투한 골드 아르케는, 그대로 아르케 순환계를 타고 그녀의 머릿속 코어로 침입하여, 파동 내에 실려 있던 정신 공격 패턴 신호를 5개의 코어에 쏟아 부었다.
다만, 거기서 코어 자체에 미리 설정된 보안 암호에 차단되는 바람에 정신 공격이 잠깐 지연되었다.
일루리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까 이사엘라의 정신 공격 당시에 버텼던 것처럼 정신력을 집중하여 최대한 저항하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일루리아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비유하자면, 플래티너스 아퀼라나 피어싱 아울처럼 강력한 아르케를 사용하는 무기를, 아르케가 없는 평범한 금속 방패로 방어하려는 것처럼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미약한 저항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베리스는 아까 일루리아를 머리카락 케이블로 일시적으로 구속했을 때, 일루리아의 머릿속 코어에 설정된 보안 암호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고, 이번에 방출한 골드 아르케에 그 보안 암호를 해독하는 신호를 포함시켜둔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일루리아의 코어에 정신 공격 방어용 보안 암호를 설정해준 이크루아는 골드 코어가 4개뿐이라, 골드 코어가 5개나 되는 이베리스로서는 그 보안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저항은 무의미했으며, 이베리스가 쿠라토르의 강력한 증폭 시스템을 이용하여 시도한 정신 공격은 크게 성공했다.
보안 암호가 뚫린 코어는 외부에서 밀려온 골드 아르케의 파동에 실린 정신 공격 패턴 신호가 내부로 침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바람에 인해 우선 코어의 기능이 크게 저하되었고, 곧이어 코어와 정신 사이의 상호 작용 덕분에 충격이 전달되어 일루리아의 정신 또한 순식간에 아득해지고 말았다.
물론 일루리아는 아까 이스카엘이 방어하기 이전에도 한번 쿠라토르의 골드 아르케 파동 정신 공격을 당하여 운동 신경이 마비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에는 머릿속에 있는 코어의 보안 암호까지 다 뚫렸던 것은 아니라서 이 정도까지 근본적으로 코어가 손상을 입지는 않았었다.
말하자면 피부는 좀 심하게 다쳤어도 뼈는 멀쩡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번에는 보안 암호까지 뚫리는 바람에 코어의 손상과 신경의 마비 정도가 그때보다 훨씬 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건 날 잡으려고 만든 기계로군.”
일루리아는 맥 없이 주저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쿠라토르는 아까 일루리아가 상대했던 거대화된 이사엘라 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 분명했다.
물론 단순히 출력의 크기만으로 따지자면, 거대화된 이사엘라도 충분히 엄청났다.
심지어 당시에는 타베스 때문에 암초 일대에 원초 아르케가 크게 부족한 상태였던 터라, 지금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절대로 더 낫지는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싸움에서 유리함과 불리함은 단순히 힘의 차이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되는 법.
그때 이사엘라의 주된 힘의 원천은 타베스였는데, 일루리아의 레드 아르케는 타베스를 불태워 소멸시키는 데 있어서 실버 아르케와 쌍벽을 이룰 만큼 아주 효율이 좋았다.
어둠을 정화시키는 데에는 역시나 불 속성 공격과 빛 속성 공격이 최고인 것이다.
거기다 이사엘라가 똑똑하긴 해도 실전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는 약점 또한, 일루리아가 나름대로 공략 방법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 바 있었다.
만약 이베리스가 쿠라토르를 타고 거대화된 이사엘라와 싸웠다면, 아마도 순식간에 박살이 난 다음, 조각 조각난 부품들이 타베스에 의해 오염된 채 이사엘라에게 흡수되어 덩치만 더 불려주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베리스의 골드 아르케는 타베스 앞에서는 무력할 뿐만 아니라, 이사엘라도 골드 코어를 3개씩이나 가지고 있었으니, 더더욱 상성이 좋지 않았을 터.
이베리스가 이사엘라보다 실전 경험이 압도적으로 풍부하다는 것 정도는 이 정도로 상성이 나쁜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반면에, 타베스를 쉽게 태워버리는 레드 아르케도, 골드 아르케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별다른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베리스의 쿠라토르는 거대화된 이사엘라를 이기기가 어렵고, 거대화된 이사엘라는 일루리아를 이기기가 어렵고, 일루리아는 쿠라토르를 이기기가 어려운, 그야말로 물고 물리는 상성 관계가 성립되는 셈이었다.
그런 상성 관계를 너무나 잘 아는 이베리스는 자비의 대륙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끝내 쿠라토르를 사용하지 않고 버티다가, 싸움이 다 끝난 다음에야 일루리아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루리아는 쿠라토르의 강력한 정신 공격 때문에 순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실자가 된 것도, 코어의 통제권을 이베리스에게 다 빼앗긴 것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이베리스라고 해도 일시적인 영향만 끼치는 골드 아르케의 파동에, 코어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 같은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데 충분한 정신 공격 패턴을 전부 다 담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머리카락 케이블로 연결된 상태에서도 하기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