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22화: 아들들의 전쟁 (53)
카르스덴은 프리트만의 원망스러운 표정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다만, 프라티온 부족장은 어쨌거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순간까지 앞장 서서 적과 싸우다가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해 전사했소.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바쳤으니, 스스로 저지른 실책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따라서 더 이상 이번 전투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을 것이오.”
카르스덴이 더 이상 문책하지 않겠다고 말했음에도 프리트만의 얼굴에서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말은 그의 아버지에게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 전투를 망친 책임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전사했기 때문에 너그럽게 봐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케르비오 왕국의 부족장으로서 무엇보다 명예가 중요한데, 죽은 이후에 그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으니 아들 된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아니, 그냥 기분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프리트만의 마음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카르스덴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지금 당장 살아 남은 켄다 부족 병사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 프리트만이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가는 북부 평야지대 부족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몰려 켄다 부족이 토벌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제 막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장이 된 그로서는 그런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는데 성공했다.
카르스덴은 프리트만의 원망, 불만, 분노를 뻔히 짐작했고, 동시에 그 젊은 부족장이 어쩔 수 없이 처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카르스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젊은 부족장 프리트만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공적과 과오를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앞으로 네가 물려받은 켄다 부족 사람들을 잘 다스리면서 왕국에 충성과 헌신을 다 바치도록 해라.
다만, 너에게는 카를로만의 명령 불복종을 적극적으로 도운 혐의가 있으니, 지금부터 그 죄를 따져 봐야겠다.”
카르스덴은 여기서 교묘하고도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전투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에서 카를로만의 명령 불복종 문제로 말이다.
그 덕분에, 오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카르스덴의 좋은 작전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프라티온과 칼마르의 잘못 때문이라는 결론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카르스덴의 책임은 어느새 관심의 초점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여러분 모두 잘 알다시피, 내 동생 카를로만은 어제 전투에서 감히 나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출진하여 많은 아군 병사들이 희생되게 만들었소.
그 죄만 해도 실로 무거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어서 채찍질과 투옥으로 어리석은 동생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만은 오늘 전투가 한창일 때 직속 부하들을 시켜서 간수들을 기절시키고 사슬을 풀어 탈옥하는 겁 없는 짓거리를 저질렀소.
어디 그뿐이오? 심지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기병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데리고 멋대로 출진하기까지 했소.
이런 식으로 방자하게 거듭 큰 죄를 저질렀으니, 비록 내 동생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엄히 다스려야만 하오. 여봐라, 죄인들을 데려와라!”
카르스덴이 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즉시 병사들이 카를로만은 물론이고, 그의 직속 부하들을 모조리 꽁꽁 묶어서 회의장 안으로 끌고 왔다.
카를로만은 여전히 채찍질 때문에 생긴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상처가 다 낫지 않아 무척 피곤하고 힘들어 보였다.
비록 그가 엄청난 명령 불복종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의 용기와 노력 덕분에 보병 선발대가 완전히 전멸 당하지 않고 400명이라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사정을 잘 아는 부족 대표들은 그의 초췌한 모습에 저절로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칼마르와 프리트만도 카를로만 옆에서 무릎을 꿇고 처분을 기다리도록 해라. 그대들 두 사람도 엄연히 공범이다.”
카르스덴이 명령했다. 칼마르와 프리트만은 순순히 카를로만 옆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꿇었다.
칼마르는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지만, 프리트만은 얼굴에 불만과 반항심이 가득해 보였다.
“카를로만, 넌 이 형이 아예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아니면, 갑자기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너는 어제 오늘, 거듭해서 내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
네가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지은 죄가 이 대륙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엄벌을 면할 수 없는 중죄라는 사실쯤은 잘 알 것이다.
이 판국에 어디 변명할 말이 있으면 한번 해 봐라.”
카를로만은 피곤하고 지친 와중에서도 비교적 당당한 태도로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려 보였다.
“형님, 저는 아무 것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형님을 감히 무시한 것도 미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은, 어디까지나 위기에 빠진 아군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한 불가피한 행동이었고 지금도 그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중죄 중에 중죄라는 사실 정도는 저도 잘 압니다.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후회는 전혀 없다는 말에 카르스덴은 한층 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차피 엄한 처분을 내리기로 결심한 만큼, 굳이 여기서 별도로 시시콜콜하게 야단을 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카르스덴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이번에는 칼마르에게 물었다.
“칼마르, 그대는 궁수들을 잘못 지휘하여 오늘 전투를 다 망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카를로만이 기병들을 선동하여 무단으로 출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성문을 열어주기까지 했소.
그대는 돌아가신 선왕 폐하의 직속 부하였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나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쳐왔소.
나도 그런 그대를 두텁게 신임하여 오늘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우리의 본거지인 파로크 성채를 수비함과 동시에 승리의 열쇠인 아군 정예 궁수들을 지휘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겼던 거요.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참담하게 내 신뢰를 짓밟고 기대를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이오? 변명할 말이 있으면 한번 해보시오.”
상당히 날 선 비난이었다.
비록 카르스덴이 크로키와 사전에 의논한 바가 있긴 했지만, 이 비난에 담긴 칼마르에 대한 실망만큼은 대부분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고지식한 성격의 칼마르는 칼마르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실망했음을 알고,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깊이 조아리기만 할 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카르스덴은 마지막으로 프리트만에게 물었다.
“프리트만, 너는 장렬하게 전사하신 아버님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카를로만을 도와서 병사들을 선동하고 함께 출진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무슨 변명할 말이 있느냐?”
프리트만은 여전히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카르스덴을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저도 아무런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신 듯하니 어서 처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카르스덴은 더는 따져 묻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처벌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프리트만, 너는 카를로만의 명령 불복종을 적극적으로 도운 중죄인이다.
마땅히 엄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네 아버님께서 오늘 전사하셨고 장례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채찍질이나 투옥을 명령하지는 않겠다.
다만, 너는 이제 켄다 부족의 새로운 부족장이니 네 죄는 곧 네 부족의 죄이다.
따라서 네가 아버님께 물려 받은 재산 가운데 절반을 왕국 국고에 상납할 것이며, 앞으로 5년 동안 켄다 부족이 왕국에 바치는 곡물과 병력의 양을 2배로 늘리겠다. 승복하겠느냐?”
“제가 어떻게 감히 승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복하겠습니다.”
프리트만이 다분히 반항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카르스덴은 그의 은근한 무례는 일단 제쳐두고 다시 칼마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칼마르, 그대는 선왕 폐하의 직속 부하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공적을 세웠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나를 잘 섬겨주었소.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오늘 벌어진 중요한 전투에서 궁수들을 잘못 지휘하여 작전을 망쳤고, 카를로만의 명령 불복종을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소.
그 엄청난 죄는 지난 날의 공적만으로 불문에 부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잘못이오.
따라서 나는 법과 원칙을 엄정하게 적용하여, 그대의 재산 가운데 절반을 압수하고 도끼로 왼쪽 손목을 절단하도록 할 것이오. 이에 승복하겠소?”
이 무시무시한 선고를 듣고 회의장 안에 모인 부족 대표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칼마르의 충직함과 성실함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칼마르를 존경한다고 믿었던 카르스덴이 그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자그마치 손목 절단형을 선고하다니······
당사자인 칼마르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회의장 내에서는 많은 부족 대표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카를로만도 당연히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급히 나서서 자기 형을 바라보면서 간곡하게 호소했다.
“형님, 모든 잘못은 어디까지나 저한테 있습니다. 특히나 칼마르 아저씨는 우리 형제한테는 숙부이자 스승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어렸을 때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서 칼마르 아저씨가 우리 형제와 자주 같이 놀아주고, 기본적인 전투술을 가르쳐주었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한테 아무리 화가 나셨다고 해도 칼마르 아저씨를 이렇게 잡범처럼 취급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엄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가혹한 처벌일 뿐이오니, 부디 심사숙고 해서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생이 선처를 호소하는 소리를 듣고 카르스덴은 되레 분노가 극에 달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가혹하다고?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나라고 가슴이 안 아픈 줄 알아?
칼마르 아저씨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네 놈 보다 내가 더 잘 안다. 헌데 그런 충성스러운 신하를 꼬드겨서 이토록 큰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 사람이 누구냐?
바로 네 놈이다, 네 놈이라고! 칼마르 아저씨의 왼쪽 손목이 잘려나가게 된 건 전부 네 놈 때문이란 말이다!
칼마르 아저씨를 소중히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너의 미친 짓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입을 다물어라!”
카르스덴의 성난 외침을 듣고 회의장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카르스덴의 눈치만 보았다.
카를로만은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지만, 지금은 형의 분노를 고려하여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회의장 내부가 다시 조용해지자 카르스덴은 아예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카를로만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카를로만, 너는 비록 내 친동생이지만, 어제 오늘 거듭된 명령 불복종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탈옥까지 했다.
거기다 기병들을 선동해서 멋대로 출진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칼마르 같은 충직한 신하를 꼬드겨 큰 잘못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 죄는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네가 아무리 내 동생이라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왕국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너를 참수형에 처할 수밖에 없다. 승복하겠느냐?”
카르스덴의 입에서 ‘참수형’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든 부족 대표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앞서 손목 절단형을 선고 받은 칼마르마저도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고 두 형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할 말을 잊었을 정도였다.
옆쪽에 꿇어 앉아 있던 프리트만 또한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카르스덴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작 카를로만 본인은 ‘참수형’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형의 의도를 퍼뜩 눈치챘다.
형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직 본인의 정치적 입지가 든든하지 못한 상황에서 친동생을 함부로 사형에 처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과중한 처분을 내려서 자신의 위엄을 세운 다음, 나중에 사면하여 아량을 베풀려는 정치적 연극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칼마르에게 선고한 손목 절단형 또한 마찬가지로 연극일 가능성이 높다.
카를로만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당혹스러웠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부족 대표들 가운데 한 명이 용기 있게 나서서 말했다.
카르스덴의 분노가 두렵기는 해도 카를로만이 참수형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카르스덴 왕자님, 비록 동생분의 죄가 무겁다고는 하지만, 참수형은 너무 과중한 형벌입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부족 대표가 간곡하게 말했다.
“카르스덴 왕자님, 아직 페레이즈 같은 사악한 외적이 우리 땅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친동생인 카를로만 왕자님을 참수형에 처한다면 전체 부족들이 크게 동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형제분들끼리 단합하셔야 합니다.
동생분이 아직 젊고 혈기가 왕성하여 명령 불복종을 저지른 것이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카를로만 왕자님도 잘못을 뉘우치고 더더욱 형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른 몇몇 부족 대표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르스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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