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6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46)

“그러니까요. 출입키라는 건, 황금색 아르케로 예쁘게 충전된 크리스탈룸 결정체가 박혀 있는 물건이에요.

직급이 높은 사람들은, 반지,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등 취향에 따라 출입키를 멋진 장신구 형태로 만들어서 몸에 착용하고 다녀요.

하지만 하급자는 그런 짓을 했다간 당장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대체로 무미건조하게 생긴 금속제 카드에 결정체를 박아 가지고 다니죠.

정말 그런 물건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으신 거예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황금색 결정체가 박힌 반지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장신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한번도 써본 기억은 없지만 말이야.

체포되어 연금될 때 아마 내 개인 물건과 함께 그 반지도 압수되었을 거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 그 반지가 일루리아님 전용 출입키가 틀림 없었을 거예요.

하여튼 보안 등급이 낮은 장소나, 출입키를 지닌 요원이 업무상 자주 출입할 필요가 있는 장소 등의 출입문 암호는 사전에 입력되어 있어요.

하지만 보안 등급의 높은 출입문의 암호는 그때그때 별도로 신청해서 허가를 받은 다음, 보안부에 들러서 미리 암호를 출입키에 입력해서 가지고 가야만 하죠.”

“의외로 절차가 복잡하구나. 난 가는 곳마다 미리미리 문이 열려 있었던 터라 전혀 몰랐다.”

“네네, 그러시겠죠. 하여튼 상황이 급해서 사전에 허가를 받을 여유가 없으면, 보안부에서 원격으로 출입키의 결정체에 암호를 전송해 주기도 해요.

그렇게 암호가 입력된 출입키를 잠금 장치에 있는 결정체에 갖다 대서 문을 여는 거예요.

다만, 이런 경우에는 출입키의 암호는 한번 사용한 다음에 곧 지워지게 되죠.

아까 일루리아님이 기절 시킨 그 사람도 급하게 허가를 받아서 출입키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네요.”

“보안부에서는 어떻게 원격으로 암호를 전송해 주는데?”

“그거야 당연히 통신기를 통해서죠.

아니, 여기서 그렇게 오래 사셨으면서, 출입문 앞에서 통신기가 꽂힌 귀에 무슨 카드를 갖다 댄 채 멍하니 서 있는 요원을 보신 적도 전혀 없으셨어요?

전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네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는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그때까지도 귀에 끼고 있던 통신기를 빼서 일레시아에게 내밀었다.

아까 자신이 기절시켰던 착하고 순진하게 생긴 보안요원에게서 빼앗아 놓은 물건이었다.

“그럼, 이 통신기도 네가 원격으로 암호를 전송하는데 써먹을 수 있냐?”

“네, 구식 전기 회로를 사용한 통신기가 아니라, 미세 결정체가 박힌 신형 통신기라면 당연히 쉽게 가능하죠.

다만, 제 아르케에 맞춰서 좀 조정할 필요가 있겠지만요. 아······”

여기까지 대화를 주고 받는 순간, 일레시아는 퍼뜩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골드 코어가 3개밖에 없는 그녀가 코어 6개로 암호화된 초커의 봉인을 빨리 풀기 위해서는, 코어 3개가 있는 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그런 조력자를 어디서 찾아서 이리로 데려와야 하나 하는 고민만 했을 뿐, 원격으로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일레시아는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우면서, 동시에 할머니의 능청스러움이 살짝 원망스러워졌다.

“일루리아님은 정말 얄미운 분이세요. 좋은 해결책이 있으면 진작에 확실하게 말씀 좀 해주시지 않고요.”

일레시아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무슨 해결책을 얘기했단 말이냐? 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을 뿐이야.”

할머니는 자기가 중요한 힌트를 주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진심인지 아니면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건지는 일단 넘어가자.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까.

일레시아는 통신기를 받아 든 다음, 자신의 몸에 흐르는 아르케와 통신기의 핵심 부품인 미세 결정체를 동조시키는 작업에 당장 착수했다.

“뭘 하려는 지는 몰라도 좀더 서두르는 게 좋겠다.

방금 전에 그 통신기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온 대화 가운데, 여기로 온 보안요원 한 명이 연락 두절 됐으니 누가 가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어.

놈들이 조만간 이리로 들이닥칠 게 너무나도 뻔하단 말이다.”

할머니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본인은 다시 느긋하게 드러누운 채 일레시아가 작업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서두르라는 말을 한 당사자의 태도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됐어요. 됐어. 이제 이 통신기는 완전히 제 것이에요.”

일레시아는 오래잖아 동조 작업을 끝내고 문제의 통신기를 자신의 귀에 끼웠다.

그러자 원래부터 귓속에 삽입되어 있던 내장형 통신기와 새로 끼운 외장형 통신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아까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할지는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침대에 드러누워서 잠시 빈둥대면서 기다리던 할머니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 그거요. 네, 생각해 둔 사람이 있긴 하죠. 아니, 애당초 선택의 여지가 워낙 없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에요.

지금 갑자기 도와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은 그 사람밖에는 없어요.”

이 말을 듣고 할머니는 호기심이 생긴 듯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너랑 친하냐? 이렇게 반역죄를 뒤집어 쓸 게 뻔한 일이라도 목숨을 걸고 도와줄 만한 사람인 거야?”

“나름대로 친하다면 친하긴 한데요. 이런 반역 행위를 선뜻 도와줄 정도의 친분은 물론 아니에요.

아마도 제가 지금부터 도와달라고 연락을 하면, 본인은 완전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기분일 걸요? 두고 두고 저를 엄청나게 원망할 거예요.”

“뭐라고? 이레니아를 구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날벼락을 떨어뜨릴 작정이란 말이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도 희생시킬 수 있다니, 그거 완전히 이베리스 같은 발상인데?

역시 이베리스가 괜히 너한테 이런 일을 맡긴 게 아니었구나.”

할머니가 짐짓 놀리듯 말하자, 일레시아는 투덜거리면서 쏘아붙였다.

“제발 이런 판국에 그런 무서운 농담 좀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양심에 찔려서 죽겠는데, 국장님 같은 발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양심에 찔리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도, 지금 일레시아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곧 집행부 메인 통제실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 이노비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너 미쳤어? 본인이 수배자가 된 걸 몰라서 그래?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연락하다니, 날 죽일 셈이야?”

예상했던 대로 이노비아는 일단 조심스럽게 비밀 통신에 응하긴 했다. 그리고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불평부터 늘어 놓았다.

일레시아는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이 지금 얼마나 새파랗게 질려 있을지, 그 얼굴이 똑똑하게 상상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통신을 받아줘서 고마워. 지금 이레니아쪽 상황은 어때? 솔직하게 말해줘.”

일레시아가 묻자, 이노비아는 한숨을 쉬면서 대꾸했다.

“아, 이제 보니 역시 그게 걱정되어서 연락했구나. 하긴 너라면 어째 그럴 것 같더라. 그래서 혹시나 해서 끊지 않고 통신을 받아준 거야."

아무래도 이노비아는 상대방이 통신을 시도한 목적을 일순 멋대로 착각한 것 같았다. 일레시아는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은데,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현재 이레니아가 포함된 태스크 포스팀하고는 완전히 연락 두절 상태야.

그래서 정말 뭐라고 해줄 말이 전혀 없어. 알았으면 이제 통신 끊는다. 행운을 빌게.”

안되지, 안되지! 여기서 통신이 끊어지면 곤란해!

일레시아는 잽싸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잠깐! 연락 두절 상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나 대신 태스크 포스팀의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잖아? 이레니아가 정확히 어떻게 된 건데?”

일레시아는 실제로 이레니아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노비아의 미안한 마음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베리스 국장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이레니아가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제 10요새가 있는 암초 내부로 들어가서, 요새 경비팀 팀장인 이클리프의 로봇 클리엔스와 맞닥뜨려 싸움이 벌어진 시점에서 연락이 끊어졌단 말이야.”

뭐? 경비팀 팀장이 자기 클리엔스를 시켜서 앞을 가로막았다고? 정말 요새의 메인 시스템을 제어하는 생체 모듈인 이사엘라가 이상해진 게 맞나 보네.

그 바람에 이레니아가 엄청 고생하고 있는 모양이야.

일레시아는 이미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소식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 사정을 위에 보고하긴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감감무소식이야.

암초 내부는 구식 무인기 스캔 따위로는 전혀 들여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윗선에서 무슨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나로서도 뭘 더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어.”

뭐, 실제로 윗선에서 무슨 대책을 마련하긴 했지. 바로 내가 지금 그 대책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중이니까 말이야.

일레시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새삼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서 이노비아는 또다시 불안한 듯 빨리 통신을 끊으려고 했다.

“이레니아를 좀더 잘 챙겨주지 못한 건 너한테 정말 미안한데, 이 비밀 통신은 제발 빨리 끊자.

나, 겁 많은 사람인 거 알잖아? 너랑 이 정도로 대화한 것만 해도 나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레시아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미리 준비했던 심한 말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오, 그러세요? 그렇게 겁이 많아서 이스크마 비서관하고 짜고 나를 속인 거야?”

이노비아가 순간 크게 움찔했다는 사실을, 일레시아는 통신기 너머에서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다.

“속이다니 내가 뭘 속였는데? 난 적어도 거짓말은 안 했어.”

“비록 말의 내용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제 3자와 짜고, 내 앞에서 마치 잡담처럼 그런 말을 꺼낸 것도 엄연히 속인 건 속인 거잖아?

설마 그만한 이치를 모르진 않겠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노비아는 일단 완강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원래부터 남을 잘 속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황해서 말문이 자꾸만 막히는 게 빤히 보였다.

일레시아는 이렇게 근본 바탕이 착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야만 하는 자기 자신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여기서 머뭇거리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생각에 계속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시치미 떼지 마. 아까부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모든 정황이 네가 이스크마 비서관하고 짜서 나한테 바람을 불어 넣은 거라고 생각하면 딱 맞아 떨어지던데?

부왕궁 근위대가 멋대로 다른 대륙으로 들어간 누군가를 추적하느라 바빠서 여력이 없다느니, 심지어 일루리아님의 이름까지 함부로 거론했지?

어쩐지 너처럼 겁이 많은 사람이 그런 민감한 화제를 입에 담는 게 뭔가 좀 이상하긴 했어.”

“아, 그건 저······”

일레시아는 숨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이노비아를 계속 궁지로 몰아붙였다.

“잠깐 쉬면서 다른 부서 사람한테 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스크마 비서관인 거지?

비서관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들려준 다음, 내가 국장님한테 불려가면 태스크 포스팀의 매니저 업무를 인수하라고 시켰지? 그렇지?

하긴, 비서관도 다른 부서 사람이긴 하니까, 거짓말은 안 한 게 맞네. 그건 인정할게.”

“미안.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제발 통신 좀 끊어줘.”

이노비아는 대답이 궁해서 그런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일레시아는 상대방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한가지만 물어보고 끊을게. 대가로 뭘 약속 받은 거야? 날 속이는 대가로 무슨 큰 상을 약속 받은 거냐고?

직급을 확 올려준대? 아니면, 너도 이스크마 비서관처럼 국장님 직속의 비서관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것만 솔직히 말해봐. 날 팔아서 그렇게 출세하고 싶었어?”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무 것도 약속 받은 거 없어!”

이노비아는 억울하다는 듯 강하게 부인했다.

“난 그냥 국장님의 특별 지시라는 말 때문에 감히 거역할 수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했던 것뿐이야. 나도 정말 그러기 싫었어. 이건 진심이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네가 이스크마 비서관한테 그런 지시를 전해 들었으면 어떻게 했겠어?

아무리 국장님의 특별 지시라고 해도 옆자리 친구를 속이는 짓은 못하겠다고 딱 잘라서 거절할 수 있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