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64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50)
물론 일루리아가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는 것과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잠시 당황하기는 했어도, 보안요원들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보안부 소속 요원들은 근본적으로 관리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에 비해 프레임에 의한 사고의 통제를 좀더 강하게 받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만, 일루리아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당신을 막는 것이 저희들의 사명입니다!”
직급 높은 보안요원이 이렇게 소리치면서 가장 먼저 피스톨의 방아쇠를 당겼다.
“쏴라! 저 사람은 이 정도 실탄으로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마구 쏴서 제압하란 말이다!”
그 보안요원이 우렁차게 소리치자, 다른 보안요원들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앞다투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십 발의 탄환이 일루리아를 노리고 날아왔다.
“어째 이럴 것 같더라.”
일루리아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뜸 왼손을 쫙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주변 공간에 충만해 있던 아르케가 바람 속성을 지닌 화이트 아르케로 실체화되면서, 지하 창고 안에서 엄청난 위력의 일진광풍이 일어났다.
십여 자루의 피스톨에서 일제히 발사된 페룸 합금탄은, 순식간에 그 백색 돌풍에 휘말려 들면서 모조리 무력화되고 말았다.
“사격 중지!”
그 직급 높은 보안요원이 크게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거센 돌풍은 수십 발의 탄환을 빨아들인 채 빠르게 압축되었고, 곧 어린애 몸집 정도 크기의 작은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일루리아가 앞으로 내민 양손 사이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았다.
그냥 무력화되는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수십 발의 탄환은 이제 완전히 일루리아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아르케에 의해서 신체가 재구성된 사람은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보안요원들뿐만 아니라, 일레시아까지 모두 놀라서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수십 발의 탄환은 희뿌연 색을 띤 회오리 바람에 휘말린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은근히 장관이었다.
페룸이나 크리스탈룸 같은 매개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런 식으로 주변 공간에 충만한 아르케를 자유자재로 원격 조종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아르케에 의해 신체가 재구성된 사람만이 가능한 가장 중요한 재주였다.
일레시아도 당연히 말로는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 앞에서 그런 재주를 생생하게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날 원망하지 마라!”
다음 순간, 일루리아는 자신의 양팔을 좌우로 힘껏 벌려서, 양손 사이에서 안정되적으로 돌아가고 있던 회오리 바람을 일시에 터뜨려 버렸다.
소용돌이치면서 어지럽게 회전하던 탄환들은, 그와 동시에 마치 집속탄이 터져서 확산될 때처럼 보안요원들을 향해 우박처럼 퍼부어졌다.
순식간에 탄환 수십 발의 집중 사격을 받은 꼴이 된 보안요원들은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나동그라졌다.
다만, 몸에 걸친 특수 방탄 제복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들은, 전부 충격을 받고 기절했을 뿐, 생명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물론 그건 일루리아가 적당히 힘을 조절하여 사정을 봐 주었기 때문이었다.
“악!”
멍하니 구경하던 일레시아는 퍼뜩 그 탄환 가운데 몇 발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예민한 감각으로 탄환이 날아온다는 사실까지는 지각할 수 있었으나, 그걸 피하거나 막을 만한 신체적 능력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몸에 걸친 옷도 보안요원들처럼 방탄 기능이 우수한 특수 제복이 아니라, 탄환을 얻어 맞고 치명상을 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아, 미안!”
하지만 탄환이 명중하기 직전, 일루리아가 얼른 웅크린 일레시아를 꽉 끌어안고 자신의 몸으로 감싸서 보호했다.
날아오던 탄환들은 그 든든한 인간 방패(?)를 전혀 뚫지 못하고 당장 모조리 분쇄되고 말았다.
“놀랐잖아요. 조심하셔야죠!”
일레시아는 얼떨결에 일루리아의 품에 안긴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불평했다.
“미안, 미안. 오래간만이라서 내가 잠깐 방향 조절을 실수했다. 하하하.”
일루리아는 호탕하게 웃은 다음,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세를 고치면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일레시아의 손을 붙잡더니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갑자기 왜 이러세요?”
일레시아는 크게 당황해서 부끄러운 듯 손을 잡아 빼면서 말했다.
“아니, 징그럽다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을!
내가 이래봬도 은하계 전역을 누비면서 활약할 때에는 제국 사교계에서 남녀 불문하고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특히나 귀부인이나 귀족 영애들은 나랑 대화 한번 나누려고 줄을 섰을 정도라니까!”
“그게 무슨 자랑인가요? 저는 귀부인도 귀족 영애도 아닌데, 왜 이러세요?”
“천만의 말씀. 제국 전체에서도 너처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아가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맙소사, 듣는 사람이 귀를 틀어 막고 싶을 지경이네요. 아니, 원래 이렇게 느끼한 분이었어요?”
“응, 나 원래 이런 성격이야. 이제부터는 내가 널 귀족 영애처럼 잘 에스코트할 테니 안심해라. 하하하.”
일루리아가 즐겁게 웃고 있을 때, 갑자기 또 다른 페름 합금탄 두 발이 연이어 날아와서 그녀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이번에는 거의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 맞은 것이었지만, 두 발의 탄환 모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강력한 아르케 보호막에 부딪히는 순간, 탄환들은 바람 속성의 화이트 아르케에 의해 일단 산산조각으로 분쇄되었고, 곧이어 불 속성의 레드 아르케에 의해 깨끗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앗, 따가워!”
그래도 무방비 상태에서 직격을 당했기 때문에 벌레에 쏘인 듯 따끔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일루리아는 움찔하면서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저격소총을 든 보안요원 두 명이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맨 뒤쪽에 서 있었던 덕분에 방금 전 탄환 세례에서 화를 면한 것 같았다.
그들 두 사람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신속하게 두 번째 탄환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야, 이 놈들아!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방해하기냐?”
일루리아는 이번에는 오른손 손바닥을 쫙 펼치고, 어디서 났는지 금속제 고리 하나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일레시아가 자세히 보니, 그건 아까 열심히 암호를 해독하여 풀어버렸던 바로 그 구속용 초커였다.
질 좋은 페름 합금으로 만들어진 문제의 초커는 오른손 손바닥 위에서 불 속성을 지닌 레드 아르케를 대량으로 흡수하면서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라 흐물흐물해졌다.
그 상태에서 일루리아가 왼손을 그 위에 갖다 대자, 초커는 바람 속성을 지닌 화이트 아르케의 힘에 의해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열된 상태에서 급속 회전하는 바람에, 그 초커는 원심력에 의해 넓고 납작한 모양으로 펼쳐져서 원반형 고리로 변형되었다.
일루리아의 양손 사이에서 붉게 달아오른 채 한동안 빠르게 회전하던 그 원반형 고리는, 어느 순간 두 명의 보안요원들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이 들고 있는 저격소총을 절단한 다음, 크게 원호를 그리면서 되돌아왔다.
막 두 번째 탄환을 발사하려는 순간 소총이 보기 좋게 썰려 버리자, 요원들은 둘 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일루리아는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돌아온 고리를 오른손으로 다시 받아 든 다음, 동시에 왼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재차 강렬한 돌풍이 일어나면서 두 명의 보안요원은 속수무책으로 거기에 휩쓸렸다.
그들은 그대로 지하 창고 천장까지 날려 올라가 한차례 호되게 부딪힌 다음, 다시 좌우 벽으로 각각 날려가서 잡동사니 더미 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열풍의 성기사······”
그 과정에서 강하게 휘몰아친 뜨거운 바람을 온몸에 뒤집어 쓴 일레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뭐? 방금 뭐라고 했냐?”
일루리아는 되돌아온 고리를 검지 손가락에 걸어서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물었다.
“일루아님, 과거에 열풍의 성기사라는 별명이 붙었던 적이 있었죠? 지금 보니까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아서요.”
이 말을 듣고 일루리아는 손을 내저으며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방금 전에 느끼한 표정으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아가씨 어쩌고 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 그 별명! 낯간지러우니까 제발 날 그렇게 안 불렀으면 좋겠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는 몰라도, 은하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찾아내서 혼내주고 싶었단 말이다.
다만, 당시 아직 살아 있던 성녀가 재미있으니까 내버려두라고 말리는 바람에 마지 못해 가만 있었을 뿐이야.”
일루리아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여기까지 말한 다음, 화제를 억지로 돌리려는 듯 손가락에 걸고 있던 원반형 고리를 일레시아에게 보여주었다.
“그보다 이거 어떠냐? 내 목에 채워져 있던 초커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었다. 워낙 질 좋은 페룸 합금이라 버리기가 아까워서 말이야.”
“완전히 차크람처럼 생겼네요? 원래부터 이런 투척 무기를 좋아하세요.”
“굳이 말하자면, 나는 모든 무기를 다 좋아하지. 풀어버린 초커를 보는 순간,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고.”
일루리아는 웃으면서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바닥에 쓰러졌던 보안요원 한 명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자신을 향해 피스톨을 겨누는 것을 포착했다.
직급이 가장 높아서 다른 요원들에게 열심히 명령을 내리던 바로 그 남자였다.
“거참, 이제 좀 그만해라!”
일루리아는 상당히 귀찮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그 보안요원을 향해 다가가더니, 머리를 세게 걷어차서 기절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가 떨어뜨린 피스톨을 집어 들어 일레시아에게 건네주었다.
“너, 이거 해킹해서 쓸 수 있겠지?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있어라.”
“뭐, 보안부 무기에는 정당한 소유자가 아니면 쓰지 못하는 잠금 장치가 있긴 한데, 해킹하려고 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일레시아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장전된 피스톨을 받아 들었다.
물론 그녀도 기본적인 전투 훈련을 받긴 했지만, 이런 무기를 손에 쥔 게 너무나 오래간만이라서 몹시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 괜찮을까요?”
일레시아가 주변에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10여 명의 보안요원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당연하지. 보안부 특수 방탄 제복이 지닌 방호력을 얕보면 안 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다들 맨몸으로 훈련용 탄환을 얻어 맞은 정도의 충격을 받고 쓰러진 것뿐이야.”
와, 맨몸으로 훈련용 탄환을? 그것도 무진장 아플 텐데. 그래도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일레시아는 쓰러진 보안요원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그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아까는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걱정하는 거냐?”
일레시아가 안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루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게 말이죠. 그때는 정말 원망스러웠는데, 일루리아님한테 일방적으로 당하고 나가 떨어지는 꼴을 보니까 갑자기 불쌍해 보여서요.
약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정심이라고나 할까요?”
“차라리 이렇게 호되게 당한 게 잘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제는 이베리스가 이 놈들을 만에 하나라도 업무 태만으로 징계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괜히 날 나쁜 놈 만들지 말고, 이거나 좀 거들어다오.”
“네? 뭘요?”
일레시아가 묻자, 일루리아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그 옷은 사이즈도 전혀 맞지 않고 군데군데 찢어진 허름한 작업복이었다.
“내 꼴을 좀 봐라. 사이즈도 맞지 않는 이런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동쪽 바다에 갈 수는 없잖아?
보아하니, 이 놈이 입고 있는 제복의 사이즈가 나랑 제일 비슷한 것 같은데, 홀랑 벗겨서 입고 나가야겠다.”
그것도 그렇겠다 싶어서, 일레시아는 시키는 대로 일루리아가 기절한 보안요원의 몸에서 제복을 벗기는 작업을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 게 생각나서 질문을 던졌다.
“이 제복을 벗겨 입은 다음에는, 아까 말씀하신 뒷길로 나가면 되는 거죠?”
“뒷길? 그게 뭔데?”
일루리아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까 아무도 모르는 뒷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네, 분명히 저더러 아무도 모르는 뒷길을 알려줄테니 빨리 떠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똑똑히 들었는걸요.”
일레시아가 황당해 하는 걸 보면서도, 일루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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