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07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93)
깊은 지하에 있었을 때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클리프가 비밀 출입문 밖으로 나와 보니, 암초 위 지상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다.
엄청난 양의 타베스가 밀집하여 맹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밀도가 워낙 높아서 통상적인 가시 광선까지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일대는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다.
한 눈에도 이거 정말 세상의 멸망이 임박했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클리프가 지켜야 하는 이사엘라는 이미 암초 중앙의 바위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 일대를 뒤덮은 채 소용돌이 치는 고밀도 타베스가 가장 집중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녀 주변에는 많은 이형성체들이 빈틈 없이 밀집해 있어서, 별로 크지 않은 바위산 정상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언뜻 봐서는 마치 유명인을 한번 보겠다고 몰려든 수많은 관중들이, 그 유명인을 깔아뭉개서 죽이기 일보직전인 상황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사엘라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클리프는, 재빠르게 근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전체적으로 타베스가 무서울 만큼 밀집해 있는 이 암초 위에서, 유독 가장자리 한군데에서만 강한 아르케가 소용돌이 치면서 주변의 타베스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엄청난 양의 타베스가 만들어내는 압력을 이겨내고 아르케를 이용하여 안전구역을 만들어 놓다니······
그건 말하자면 깊은 바닷물 속에서 수압을 이겨내고 숨 쉴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코어의 숫자도 많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아르케를 다루는 솜씨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인물이 누군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일루리아가 이미 저기 와 있나 보군.”
이클리프는 오래 전, 그러니까 제 10요새에 사실상 유배되어 경비팀 팀장이라는 이름의 강제 노동에 종사하기 이전, 관리국 본부 타워 내에서 일루리아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같이 일해본 적은 없었어도, 저 사람이 대단한 영웅이라는 소리를 평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 사람은 이사엘라가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방해하는 위험한 훼방꾼일 뿐. 전설의 영웅이고 뭐고 마땅히 전력을 다해 막아야만 하는 존재였다.
“마지막으로 전설의 영웅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운다. 이것 또한 나름대로 멋진 최후겠지.”
이클리프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각오를 단단히 다진 다음, 암초 중앙에 자리잡은 바위산의 중턱을 가로질러 일루리아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베스 칩의 영향으로 코어의 출력이 점점 더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부작용으로 인해 의식이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붕 뜨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게 바로 머릿속의 코어가 실시간으로 망가지고 있는 느낌인 건가?”
이클리프는 자신이 점점 상실자가 되어감을 느끼면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두통이 제법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타베스 칩을 삽입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밀도의 타베스 속에서는 당연히 훨씬 더 큰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정도 두통쯤이야 충분히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일루리아가 있는 암초 가장자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때마침 타베스를 밀어내고 있던 아르케의 소용돌이가 확 걷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고 이클리프는 자신이 운 좋게 정말 기막힌 기습 타이밍을 잡았다는 사실을 당장 직감했다.
저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고 해도, 고밀도 타베스 속에서 안전지대를 만드는 엄청난 중노동을 한 직후이니만큼, 당연히 일시적으로나마 기력이 다 빠진 상태일 것 아닌가?
“기습하려면 지금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다!”
이클리프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여, 과거에 존경했던 영웅을 겨냥하여 매섭게 창을 내질렀다.
그의 예상대로 일루리아는 지친 와중에서도 기민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결국 기습적으로 날아온 창질을 다 피하지는 못했다.
페인트 동작인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은 피했는데, 정작 가장 많은 힘이 실려 있는 마지막 공격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까 이아테스가 당했던 것과 비슷하게, 전기 속성의 퍼플 아르케로 충전된 크리스탈룸 창날이 일루리아의 가슴 한복판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창을 겨냥한 노린 곳에 정확히 찌르긴 했지만, 이클리프는 창대를 움켜 쥔 손에 제법 묵직한 반작용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이 크리스탈룸 창날은 원래부터 굉장히 예리하여 두꺼운 페룸 합금 방어구조차 얇은 천 조각처럼 막 뚫어버리는 물건이었다.
그런데다가 지금은 타베스 칩 덕분에 일시적으로 코어의 출력이 크게 올라가 있었으므로 더더욱 위력이 강해졌을 터였다.
그런 상태에서 별다른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은 사람의 뼈와 살을 관통했을 뿐인데, 어지간한 방어구를 찔렀을 때 못지 않은 묵직한 반작용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찌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클리프는 창이 무뎌진 건가 하고 일순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상대방이 아르케의 힘으로 신체를 재구성한 사람이라고 들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이게 바로 재구성된 신체의 힘인가 하면서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대륙이 멸망하기 전에 이런 신체를 한번 찔러 보고 죽을 수 있다니, 그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클리프는 갑자기 즐거워져서 가만 있지 못하고 장난 섞인 말로 자기 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루리아님. 저는 이곳 제 10요새의 경비팀 팀장 이클리프라고 합니다.
이 저주 받은 대륙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당신 같은 위대한 영웅을 이렇게 한번 제대로 찌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클리프는 일루리아의 정면에서 이렇게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긴 했지만, 곧이어 속으로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창날이 가슴에서 등까지 관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똑바로 자신을 노려보면서 오른손으로 창대를 단단히 움켜쥔 채 굳게 버티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기습 효과를 더 이상 확대시킬 수가 없었다.
만약 일루리아가 중상을 입은 충격으로 맥 없이 휘청거렸다면, 이클리프는 잽싸게 창을 뽑아낸 다음 또 다른 부위에 추가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런 식으로 창대를 움켜쥐고 굳건하게 버틴다면, 창을 더 깊이 찌를 수도 뽑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피차간에 사력을 다한 힘겨루기 국면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나름대로 많은 실전 경험을 지닌 이클리프도, 가슴을 창으로 관통 당한 상태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버티는 사람은 거의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이아테스를 찔렀을 때처럼, 크리스탈룸 창날에 잔뜩 충전되어 있던 전기 속성의 퍼플 아르케가 온몸으로 퍼져서 일루리아의 전신을 마비시켜야 마땅한데, 그것마저도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퍼플 아르케를 아군 병사, 크리스탈룸 창날을 상륙정, 일루리아의 몸을 적진이라고 친다면, 아군 병사가 적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서 막 적진에 내리려다 말고 도로 상륙정 안으로 쫓겨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한 순간의 실수로 치명적인 기습을 당하긴 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추가적인 공격을 허용하지 않다니.
이클리프는 과연 일루리아가 비범한 인물이라고 인정하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만약 방금 전에 엄청난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창을 깊이 찔러 넣을 기회 같은 건 아예 잡을 수가 없었을 게 분명했다.
“이클리프라고 했나? 아주 좋은 솜씨다. 내가 완전히 한방 먹었구나. 이렇게 제대로 한방 먹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너처럼 이런 훌륭한 인재가 여기서 아깝게 썩고 있다가 정신 조작을 당해서 이런 짓을 하게 되다니. 아깝구나, 아까워."
일루리아는 까마득한 애송이로부터 장난 섞인 자기 소개를 들었음에도, 손으로 창대를 붙잡고 버틴 채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여유까지 있었다.
비록 가슴 한복판을 관통 당하긴 했지만, 신체가 아르케의 힘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무거운 상처를 입은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가슴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기관지를 타고 올라와 코와 입에서 울컥 뿜어져 나올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까마득한 후배의 실력을 평가하고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여유를 보인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람은 진짜 전사 중의 전사다. 왜 진작 이런 사람 밑에서 일할 기회가 없었던 걸까?’
타고난 전사 기질을 지닌 이클리프는 상대방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잠깐 놀라긴 했지만, 곧이어 엄청난 흥분을 느꼈다.
이유야 어쨌건, 유명한 영웅과 전력을 다해 싸울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습적으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서 재구성된 신체를 창으로 찔러볼 수 있는 희귀한 경험까지 했으니까.
거기다 타베스 칩으로 인해 코어와 의식이 모두 잔뜩 들떠 있어서 그런지, 그와 같은 흥분이 한층 더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일루리아와 이클리프가 서로 기죽지 않고 정면에서 대치하면서 다음 수를 생각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일레시아는 그야말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저 두 사람과는 달리 전사 기질을 타고 나지 않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일루리아가 눈 앞에서 창에 찔리는 모습을 보자 그저 놀라고 걱정스러울 뿐이었던 것이다.
“설마 저 사람도 타베스 칩을?”
일레시아는 놀란 가슴은 진정시키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절망감만 커질 뿐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클리프도 타베스 칩으로 출력을 증폭시켰음이 거의 틀림없었다.
코어를 3개나 가진 사람이 타베스 칩으로 출력을 증폭시킨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일루리아를 창으로 찔렀는데,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면 좋단 말인가?
이르피오와 이그시아는 겨우 정신 조작에서 벗어났을 뿐, 지금 당장은 도저히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일레시아는 전투요원이 아니라 아예 이클리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사엘라는 이제 곧 격변 현상을 일으켜 클라데스가 될 게 뻔한데, 일루리아는 창에 가슴팍을 관통 당한 상태이고, 그 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 봤자 절망감만 커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일레시아는 문득 이사엘라와 이클리프에게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원한이 크다고 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고 위험한 방법을 써 가면서까지 자비의 대륙을 꼭 멸망시키려 해야 한단 말인가?
그 과정에서, 이레니아는 붙잡혀 가서 강제로 생체 모듈 노릇을 하다가 코어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빠졌으며, 이르피오와 이그시아도 코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지 않았는가?
거기다 자신 또한 평범한 일상이 날아가고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으며, 그나마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고마운 사람인 일루리아는 아까부터 자꾸만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면서 죽도록 고생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부조리하고 부당한 상황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니!’
이렇게 생각하자, 다음 순간, 일레시아의 마음 속에서는 그 동안 참았던 분노와 무력감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내가 아무리 전투 요원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나와 이레니아의 인생을 망쳐 놓은 자들의 뺨이라도 한번 후려갈기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일레시아의 입장에서 이런 격렬한 감정은 거의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 같았다.
평소 논리적이고 냉정한 사고를 하도록 철저하게 훈련 받은 그녀로서는, 지극히 낯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몰라 혼란스럽기까지 한 감정이었다.
격하게 분노하면서, 동시에 그 분노에 잠깐 당혹스러워하던 일레시아는 퍼뜩 깨달았다.
‘아, 이런 감정이 바로 이번 사태가 시작될 때 있었던 고출력 광역 정신 공격의 정체가 아닐까?’
정확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일레시아는 고출력 광역 정신 공격 펄스가,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추출해 낸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감정을 소재로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순간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만약 누군가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정신 공격 펄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그녀 자신도 분명 똑같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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