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23화: 아들들의 전쟁 (54)
부족 대표 몇 명이 카를로만에게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카르스덴은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생이 어느새 여러 부족 대표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증명되었으니까. 이건 그가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카르스덴이 지극히 불쾌한 표정으로 선처를 호소하는 부족 대표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을 때, 갑자기 당사자인 카를로만이 나서서 말했다.
“여러분 모두 제발 더는 나서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저는 실로 죽어 마땅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의적인 판단으로 형님의 엄중한 명령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함부로 탈옥했고, 심지어 기병들을 선동하여 멋대로 출진하기까지 했습니다.
저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으며, 충직한 신하인 칼마르 아저씨까지 손목 절단형을 선고 받게 되었으니, 그 죄는 몇 번 죽어도 다 씻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렇게 억지로 저를 변호하시면 오히려 저를 더 수치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형님의 공정한 처분에 깨끗이 승복하고 기꺼이 참수형을 당할 것이니 이제 그만하십시오. 부탁입니다.”
카를로만의 말에는 진심 어린 반성이 담겨 있는 듯했다. 부족 대표들은 다들 입을 다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젊은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를로만이 말을 계속했다.
“지금 우리 왕국은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저 잔학무도한 페레이즈가 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와 있고, 파로크 성채 밖에는 그 자와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케르비오 젊은이들의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이니만큼 평화로운 시기 보다 상벌이 한층 더 엄정해야 합니다. 형님의 친동생인 저라고 해도 죄가 있으면 공정하게 벌을 받아야지요.
그래야만 국가의 기강과 형님의 위엄이 바로 설 것이며, 또 그래야 장차 사악한 외적을 쫓아낼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참수형을 당함으로써 페레이즈와 플로젠 같은 강적을 물리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도끼날 앞에 목을 바칠 것입니다.”
카를로만이 당당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카르스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이놈이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다 파악했구나.
내가 형식적으로 참수형을 선고하여 위엄을 세운 다음, 처형 직전에 사면하여 관대함을 드러내 보일 계획임을 눈치챈 게 분명하다.
역시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 놈이라니까.’
물론 카를로만이 눈치챘다고 해서 현재 진행중인 이 ‘정치적 연극’을 도중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될 터.
카르스덴은 마음을 다잡고 짐짓 위엄을 살려서 크게 소리쳤다.
“그거 참 당당하구나, 당당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투사인 줄 알겠다.
하지만 어쨌든 빈말로나마 반성하고 승복한다니 넘어가주마.”
카르스덴은 여러 부족 대표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카를로만의 참수형과 칼마르의 손목 절단형은 모두 내일 정오에 성채 중앙 광장에서 집행할 것이오.
모든 부족 대표들은 빠짐없이 참석해서 형 집행을 지켜보도록 하시오.
우리 왕국의 법과 원칙이 왕자에게도 예외 없이 엄정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란 말이오. 알겠소?”
이 말을 듣고 부족 대표들은 하나 같이 두려운 표정으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카르스덴은 자신이 성공적으로 모든 부족 대표들의 기강을 잡고 복종을 이끌어 냈다고 생각하면서 한층 더 위엄 있게 말을 계속했다.
“그 외에도 카를로만의 탈옥을 돕고 함께 출진한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 역시 엄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 자들 모두 채찍으로 30대를 치고 10일 동안 감옥에 가둘 것이다. 또한 말과 장비를 전부 압수하여 일반 보병으로 강등시키도록 하겠다.
아울러 카를로만의 선동에 넘어간 어리석은 기병들 가운데 제비 뽑기로 10명을 뽑아서 채찍으로 30대를 치고 10일 동안 감옥에 가두어라.
알아 들었으면 당장 저들을 끌고 나가도록 해라.”
카르스덴의 최종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즉시 카를로만과 칼마르,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을 난폭하게 질질 끌고 나갔다.
프리트만도 앞서 처벌을 선고 받긴 했지만 채찍질이나 투옥형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질질 끌려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카를로만을 지지하는 다른 몇몇 부족 대표들과 나란히 서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험하게 끌려나가는 젊은 왕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를로만이 끌려나가자 카르스덴이 회의를 마무리 짓는 발언을 했다.
“이것으로 오늘 회의는 끝내겠소.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나라가 어려울수록 법과 원칙이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하오.
여러분 모두 내 친동생조차 잘못을 저지르면 예외 없이 공정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오.
그러니 다들 돌아가서 각자 거느린 병력을 정비하여 한치의 빈틈도 없이 다음 전투를 대비하시오.”
카르스덴은 마지막으로 희망찬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소. 아까 전령이 도착했는데, 내 누님인 카란드라가 곧 5천명의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오.
중부 산악 지대에서 정예 궁수 2천명, 거기다 서부 평야 지대에서 정예 기병 3천명을 지원군으로 파견했다고 하니 페레이즈의 운명은 이제 끝이오.
놈은 어리석게도 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와 있어 병력이나 물자를 보충할 방법이 없는 반면, 우리에게는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계속 가세해 올 테니 말이오.
누님의 지원군이 합류하면 내가 조만간 페레이즈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작전을 세워서 알려주겠소.
다음 전투에서는 부디 오늘 전투에서처럼 큰 실책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자가 없길 바라겠소.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이오.”
카르스덴은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크로키와 함께 먼저 회의장을 나섰다. 부족 대표들도 어두운 표정으로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그날은 밤늦게까지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과 카를로만을 따라 출진했던 기병들이 가혹하게 채찍을 얻어 맞는 소리가 파로크 성채 안에서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카를로만은 어둠 컴컴한 지하 감옥 안에서 잠들지 못하고 또렷이 깨어 있었다.
채찍으로 얻어 맞은 상처가 여전히 아팠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불편하여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카르스덴이 정치적 연극을 위해 동생인 자신에게 일부러 참수형 같은 과중한 형벌을 선고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 정오에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카르스덴은 관대한 듯 아량을 베풀어 많은 부족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동생의 목숨을 살려줄 가능성이 높았다.
머리로는 그런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더라도, 심정적으로는 친형이 자신에게 참수형을 선고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서 정치적 연극을 벌인다는 사실 자체가 썩 즐거울 턱이 없었다.
거기다 이게 정치적 연극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카를로만의 추측일 뿐, 카르스덴이 갑자기 정신줄을 놓고 대책 없이 친동생을 진짜로 처형해 버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 때문에 칼마르는 손목 절단형을 선고 받았고, 자신의 명령을 따른 죄밖에 없는 직속 부하들과 기병들까지 억울하게 채찍형을 받았다.
이래저래 카를로만으로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채찍으로 얻어 맞은 직속 부하들과 기병들은, 마침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카를로만의 감방 맞은 편에 갇혀 있었다.
다들 신체가 건강하고 체격이 건장한 젊은 남자들이었지만, 억지로 참아보려고 해도 채찍질을 당한 상처에서 밀려오는 고통이 워낙 심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그들 모두 지저분한 감방 안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서 저절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들려오는 그 괴로운 신음 소리 또한 카를로만의 가슴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다 큰 사내들이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한가? 다들 조용히 하게. 카를로만 왕자님께서 다 듣고 계시네.”
그때 채찍으로 얻어 맞은 기병 가운데 한 명이 나서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 역시 채찍으로 호되게 얻어 맞은 등이 온통 피투성이였지만 목소리만큼은 무척 호기롭게 들렸다.
카를로만은 어차피 잠이 오지 않는 김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거기,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누군가?”
통로 건너편 감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카를로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젊은 병사는 얼른 창살 쪽으로 바싹 다가와서 대답했다.
“필론 부족 부족장의 조카인 코르제입니다, 왕자님. 절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카를로만은 당연히 코르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패하고 전의를 상실한 기병들을 설득하여 다시 출진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 젊은이를 지목하여 함께 가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으니까.
거기다 코르제는 전투 중에 카를로만에게 제법 뛰어난 안목에서 나온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코르제, 자네 이름과 얼굴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네. 하필 재수 없게 채찍형을 당하는 제비를 뽑았나 보군.”
카를로만이 딱한 듯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코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제비를 뽑기 전에 그냥 제가 먼저 채찍으로 얻어 맞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아무도 절 말리지 않기에 내친 김에 앞으로 걸어 나가서 형틀에 묶여 가장 먼저 채찍으로 맞았지요.
어차피 벌을 받을 거면 차라리 먼저 받는 게 더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카를로만은 이 말을 듣고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아니,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나? 운 나쁘게 제비 뽑기에 당첨된다면 몰라도 일부러 자원해서 채찍으로 얻어 맞을 것까지는 없었잖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딱히 얻어 맞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울분이 치밀어서 채찍질이라도 당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카를로만 왕자님께서는 함정에 빠진 아군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출진하신 건데, 내일 정오에 억울하게 참수형을 당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너무나 황당하고 분해서 저도 왕자님과 조금이라도 고통을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참수형과 채찍형은 서로 비교가 안 되겠지만요.”
코르제의 말은 진심으로 울분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러자 카를로만의 옆 감방에 있던 칼마르가 불쑥 말했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질 필요 없네.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설마하니 정말로 많은 부족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친동생을 처형하시겠나?
처형 직전에 적당히 사면하실 게 분명하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코르제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뭐, 저도 바보는 아니니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저 또한 부족장의 조카로서 어렸을 때부터 정치란 게 뭔지 귀동냥으로 들은 바가 있으니까요.
정치판에서는 법이란 것도 결국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며, 짐짓 엄한 벌을 내리는 척 하면서 나중에 적당히 사면하는 촌극이 종종 벌어진다는 것도 당연히 잘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동생의 목숨을 가지고 정치적 목적을 위한 연극을 벌인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코르제가 열변을 토하자 감옥 안에서 끙끙 앓던 다른 병사들도 고통을 잠시 잊고 그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했다.
그들은 모두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이거나, 그의 설득에 호응하여 보병 선발대를 구하기 위해 출진했던 기병들이었다.
당연히 카를로만에 대한 호감과 충성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카르스덴 왕자님을 진심으로 깊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용맹과 군사적 재능을 잘 알기 때문에, 카르스덴 왕자님이라면 선왕 폐하의 뒤를 이어 플로젠 놈들을 몰아내고 우리 왕국을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외부의 적이 아니라 친동생을 괴롭히고 견제하는데 더 많은 힘과 노력을 쏟는 모습을 보고 정말 크게 실망했습니다.”
코르제의 발언이 점점 선을 넘는 듯한 기미를 보이자 칼마르가 얼른 언성을 높여서 꾸짖었다.
“입 닥쳐라! 말 조심해라. 카르스덴 왕자님께서는 여전히 내가 충성을 바치는 주인이시다. 네가 감히 그분을 모욕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카를로만도 그 말을 거들어서 코르제를 나무랐다.
“칼마르 아저씨의 말이 옳다. 형님은 지금 간사한 크로키의 농간 때문에 잠시 판단력이 흐려져 있는 거야.
나는 형님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분의 성격을 잘 안다. 형님은 원래 포부가 크고 현명한 분이야. 반드시 곧 정신을 차리실 거다.”
그래도 코르제는 물러서지 않고 더욱더 열을 올려서 말했다.
“두 분께 더 큰 야단을 맞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간사한 자의 농간에 잠시라도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지도자로서는 실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곧 정신을 차리실 거라고 하셨는데, 그게 대체 언제란 말입니까?
친동생을 억울하게 처형하고, 페레이즈가 우리를 다 죽인 다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셔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네?”
코르제의 강경한 말을 듣고 같은 감방 안에 있던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 사이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면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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