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72화: 아들들의 전쟁 (03)
제 딴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대비를 해두었다고 확신한 채, 젊은 기사 카시우트는 다음날 다가올 결전에 대비하여 자신의 막사에서 잠시 잠을 청했다.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 채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병사들 못지 않게 그도 무척 지쳐 있었던 것이다.
내일 케르비오 족 최고의 전사로 손꼽히는 카르스덴과 결전을 벌이려면 조금이라도 쉬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정을 전후하여 정말 아주 잠깐 동안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카시우트가 깜빡 잠이 든 사이, 즉, 7월 11일에서 12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되기 직전, 결국 그가 지휘하는 제 3대대는 케르비오 족의 대대적인 기습을 받고 말았다.
실제로 기습을 당하고 보니, 카시우트가 그토록 공들여 마련해둔 모든 대비책이 죄다 헛수고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우선 카시우트가 사전에 파견한 정찰병들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이 밝혀졌다.
그들은 숙영지 인근의 숲 속에 교묘하게 분산 매복해 있던 케르비오 족 정예병 5천명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카시우트가 잡으러 온 카를로만까지 무기를 든 채 매복해서 한밤중이 되기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정찰병들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별로 의욕도 없어서 그냥 대충대충 살펴보고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반면에 케르비오 족 병사들은 일대 지리에 아주 익숙하여 어디에 어떻게 숨어야 할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플로젠의 정찰병들을 비웃으며 동굴과 풀숲 등에 적절하게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약속된 신호에 따라 집결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또한 깜빡 졸기라도 했다간 즉시 군법에 따라 사형시키겠다는 엄명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보초들은 자정 무렵이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을 감시해야 할 백부장도 형식적으로 보초들을 깨우는 시늉만 했을 뿐, 결국 사이 좋게 같이 잠들어 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땅에서 연일 강행군을 한 탓에 모두들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달콤한 잠에 대한 본능적인 유혹이, 사형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위험한 적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긴장감까지 압도하고 말았다.
거기다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마을 촌장은 사실 카르스덴이 특별히 선발해서 파견한 첩자였다.
반년 전에 전사한 카라미르 왕을 충실하게 섬기던 역전의 용사인 그 첩자는, 이미 자신을 감시하는 병사들을 수완 좋게 구워 삶아 친해진 상태였다.
그의 친근한 태도에 방심한 감시병들이 마음 놓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막사 안에서 얌전히 있는 척하던 첩자는 즉시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 첩자는 용케 졸지 않고 있던 보초 몇 명을 뒤에서 기습하여 간단히 죽여 버린 다음, 숙영지의 목책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진영 곳곳에 불까지 질렀다. 그 불이 바로 기습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은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결판이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심각한 원인은, 젊은 카시우트가 아직 자신의 대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많은 병사들에게 있어서, 신임 대대장인 그는 그저 군단장인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중요한 자리에 오른 철부지 기사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아무리 위엄을 갖추고 군사학 서적에서 배운 대로 타당하고 합리적인 명령을 내려 봤자, 병사들은 딱히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결과, 정찰병, 보초병, 백부장, 감시병 모두 각자 맡은 일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대충대충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보니, 플로젠 왕국 제 16군단 제 3대대는 이날 밤 문자 그대로 완벽하게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사냥을 하면서 단련된 케르비오 족 궁수 1천명이, 자기편 첩자가 지른 불을 표적 삼아 일제히 불화살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날아온 1천발의 불화살이 하늘을 눈부시게 뒤덮이면서 숙영지를 향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자, 숙영지 전체는 문자 그대로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다.
곧이어 제 2파, 제 3파로 각각 1천발의 불화살이 잇달아 숙영지를 덮쳤다.
그제서야 꾸벅꾸벅 졸고 있던 보초들과 막사 안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병사들 모두 대경실색하면서 불길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두들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고, 여러 해 동안 열심히 훈련하면서 갈고 닦은 지식과 경험, 특히나 이런 야간 기습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지식을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숙영지가 완벽하게 불바다가 된 다음에는 카르스덴이 직접 엄선한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플로젠 왕국의 정예 기병대에 농락당했던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무엇보다 정예 기병대의 육성에 목숨을 걸었던 터였다.
이날 밤에 그를 따라서 돌격한 기병들은 그렇게 육성한 정예 기병대 중에서 또다시 고르고 고른 최정예 기병들이었다.
그들의 전투마도 수많은 군마들 사이에서 엄격하게 선발된 말들로, 반년 동안 세심하게 훈련 받은 끝에 물과 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도록 단련된 상태였다.
특별히 덩치가 크고 우수한 전투마에 올라탄 카르스덴은, 케르시오 족 특유의 자주색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흩날렸으며, 얼굴에는 물감으로 자기 부족 특유의 문양과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을 그려 넣은 흉악한 모습이었다.
지난 반년 동안 꾹 참고 기다린 끝에 아버지의 복수를 드디어 시작하게 된 이날 밤, 그 젊은 왕자는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맹수처럼 날뛰었다.
얼굴의 그림 때문에 더더욱 무시무시해 보이는 카르스덴은, 선두에서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적병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크고 묵직한 도끼날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플로젠 군단병은 비참하게 토막 나서 즐비하게 쓰러져 갔고, 일부 병사는 육중한 전투마에 충돌하여 불길 속으로 튕겨나가 비명을 지르며 산채로 화형 당하고 말았다.
시뻘겋게 치솟는 불길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거대한 전투마에 올라타서 도끼를 휘두르는 카르스덴 왕자의 모습을 보고, 플로젠 병사들은 더더욱 겁에 질려서 우왕좌왕했다.
그의 뒤를 따라 케르비오 족의 정예 기병대까지 우르르 몰려오자, 다들 살아 남기 위해서 무기와 갑옷을 전부 내팽개친 채 목책 밖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정신 없이 도망치는 플로젠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숙영지가 지옥이고, 거기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히 숙영지 밖에 살 길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케르비오 족의 나머지 보병 병력 수천 명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오는 중이었으니까.
그들은 모두 근접전에서 적을 빠르게 학살하기 좋도록 짧은 칼과 도끼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 적병은 그야말로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었다.
카르스덴의 동생인 19세의 청년 카를로만 또한 그 보병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비록 자기 형 보다는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사려 깊은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자 역시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도 얼굴에 부족의 문양을 칠한 채, 두 자루의 도끼를 휘두르면서 닥치는 대로 도망치는 적병을 쳐 죽이느라 바빴다.
한편, 대대장인 카시우트는 학살이 한 고비를 넘긴 다음에야 허겁지겁 갑옷을 챙겨 입고 칼을 든 채 자기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시뻘건 불길과 부하들의 시체만 보이는지라, 그도 당연히 처음에는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한 와중에서도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병사 몇 명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진정하라면서 퍼뜩 소리를 질렀지만, 평소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던 병사들이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새삼 복종할 턱이 없었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망치기에 바쁘던 병사들은 오래잖아 그가 보는 앞에서 케르비오 족 기마병의 발굽에 짓밟혀 죽어 버렸다.
“이런 젠장!”
카시우트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똑똑히 자각하고 눈 앞이 캄캄했다.
명색이 왕국 남부 총독인 아버지, 장차 페레이즈 태자와 결혼할 누나, 그리고 미래에 처남 매부 사이가 될 태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마치 주마등처럼 일일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젠 돌아가긴 틀렸다. 그냥 여기서 죽자!”
비록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카시우트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묶여 있던 자기 말의 고삐를 신속하게 자른 다음, 급하게 그 말에 올라타서 칼을 휘두르며 용감히 싸우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전부 다 죽거나 달아나서 사실상 혼자 남았음에도, 죽음을 각오한 그 젊은 기사는 몰려오는 케르비오 족 기마병을 상대로 칼 한 자루만 든 채 악에 받쳐서 맞서 싸웠던 것이다.
케르비오 족 기마병들은 모두 말 위에서 싸우기 좋게 긴 창이나 도끼를 들고 있는 반면, 카시우트는 별로 길지 않은 호신용 칼 한 자루만 들고 있었다.
원래 같으면 제대로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하지만 카시우트는 딱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한 채 덤벼드는 기마병 한 명이 휘두른 도끼를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한 다음, 놈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옆구리를 힘껏 베어버렸다.
그 기마병은 가죽 갑옷, 살갗, 갈비뼈, 늑막이 모조리 쪼개지면서 말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졌다.
카시우트는 곧이어 또 다른 적 기마병이 무서운 기세로 창을 내지르면서 돌진해 오자, 잽싸게 몸을 비틀어 피한 다음, 그 창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당겼다.
적병의 몸이 일순 자기 쪽으로 확 쏠리자, 카시우트는 즉시 오른손에 든 칼로 놈의 가슴팍을 깊이 찔러 버렸다.
그 적병 또한 말에서 굴러 떨어져 숨이 끊어졌고, 카시우트는 얼떨결에 긴 기병창 한 자루를 손에 넣게 되었다.
카시우트는 오른손에 든 칼을 던져 버린 다음, 손에 넣은 창을 휘두르면서 또 다른 적 기병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듯 죽기 살기로 창을 휘두르자, 추가로 적 기병 몇 명이 그 창에 찔려서 목숨을 잃었다.
그냥 실전 경험이 부족한 바보 같은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용맹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케르비오 족 기마병들은 살짝 당황하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덤벼라! 이 야만족 놈들아!”
주변에 적병의 시체가 하나 둘 쌓여가자 카시우트도 투지가 한층 더 끓어올라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는 이대로 살아 돌아가면 아버지, 누나, 태자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적병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각오에 불타고 있었다.
애송이 기사의 목숨을 건 발악 때문에 자기 부하들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보자, 카르스덴은 냉큼 가까이에 있던 불 붙은 막사 기둥을 도끼로 후려쳐서 카시우트 쪽으로 날려 보냈다.
불타는 나무 조각이 말 머리에 부딪히자, 카시우트의 말은 길길이 날뛰면서 자기 주인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말도 꽤 좋은 군마이긴 했지만, 불행히도 케르비오 족의 전투마와는 달리 이런 상황을 대비한 집중적인 훈련이 별로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카시우트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얼른 일어나서 창을 다시 고쳐 쥐었다.
그는 마치 창병이 기병을 상대하듯, 창대 끝을 땅에 대고 버티면서, 덤벼드는 적 기병 한 명을 또 창으로 찔러 죽여 버렸다.
하지만 그의 용맹한 발악도 딱 거기까지였다.
곧이어 카르스덴이 직접 달려들어 도끼로 그 창을 단숨에 토막 낸 다음, 유난히 덩치가 큰 자신의 전투마로 카시우트를 거세게 들이 받아 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젊은이라고 해도 전투마와 충돌해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카시우트는 큰 충격을 받고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년의 케르비오 족 한 명이 달려와서 카시우트를 붙잡고 구속하려 했다.
카시우트는 대뜸 그 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카르스덴에 대한 거짓 정보를 알려주고 길 안내까지 자청했던 바로 그 촌장이었다.
오늘밤 자신에게 큰 패배를 안겨준 원흉이 직접 덤벼들자, 카시우트는 큰 충격을 받은 와중에서 당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교활한 첩자 놈! 넌 오늘 내가 꼭 죽인다!”
카시우트는 극도로 화를 내면서 맨손으로 그 촌장, 아니, 첩자와 격투를 벌였다.
문제의 첩자는 비록 중년이었지만 역전의 용사답게 힘이 아주 장사였으며 특히나 맨손 격투에 아주 뛰어났다.
다만, 젊고 용감한 기사가 수치심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죽기 살기로 저항하자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카시우트도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으면서 맨손 격투기를 어느 정도 배운 몸이라서 의외로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투지에 불타고 힘과 기술을 겸비한 두 남자는, 맨 땅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면서 미친 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서로 상대방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관절을 닥치는 대로 꺾는가 하면 몸통을 사정 없이 후려치기도 했다.
둘 다 순식간에 코와 입에서 피가 터지고 온몸이 멍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싸움은 얼른 결판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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