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28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14)
만약 벌레를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인간이, 위대한 신의 눈에는 그 벌레 못지 않게 하찮은 존재로 보인다면, 같은 원리로 인간을 하찮게 보는 오만한 신 역시 더 위대한 초월신의 눈에는 그저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터.
그러므로 이왕 신을 믿으려면 당연히 더 위대한 초월신을 믿어야지, 왜 굳이 인간과 초월신 사이에 낀 중간 등급의 신을 믿느냐는 것이 이베리스의 신랄한 조롱이었다.
이베리스의 조롱 섞인 말을 듣고, 상대방 종교인은 문자 그대로 격노했었다.
그 사람은 신이란 정의상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과 구분되는 초월신 같은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분노에 차서 반론했다.
하지만 이베리스는 그건 자기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 한층 더 심하게 놀려댔을 뿐이었다.
인간이 벌레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가장 위대하다고 잘난 척하는 것이 오만한 생각이라고 한다면, 신이 인간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가장 위대하며 초월신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할 경우, 같은 이치로 그건 훨씬 더 오만한 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이 논쟁의 결과, 당시 하마터면 대판 싸움이 날 뻔했던 것을, 마침 이베리스의 옆에 있던 이스카엘이 간신히 뜯어 말렸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이 은하계 전역에서 구인류가 믿던 제 1지구의 종교는 사실상 전부 소멸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런 논쟁도 그저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 다만, 이사엘라가 이 은하계가 자비의 대륙 못지 않게 하찮은 공간이라면서 비하하는 말을 듣는 순간, 일루리아의 머릿속에 모처럼 그때 그 사건이 생각났던 것이다.
“네 생각은 틀렸다.”
또다시 일루리아의 생각을 읽은 듯, 이사엘라가 말했다.
“너희들이 타베스라고 부르는 우주의 근본 원리는 문자 그대로 원리일 뿐 신이 아니다.
너희도 실상은 나의 그림자이자 빈자리에 지나지 않는 아르케를 어리석게 신성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지전능한 신으로 숭배하지는 않지 않느냐?
우주의 근본 원리는 학습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존재이지, 절대로 숭배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뭐? 그저 학습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근본 원리일 뿐이라고? 세상에 무슨 놈의 원리가 이렇게 난폭하고 잔인하며 또 고통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이베리스만큼 학식이 풍부하지는 못한 일루리아였지만, 예를 들어, 기하학 원리 그 자체가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의 위기에 빠뜨렸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반면에 타베스란 존재는 뭔지는 몰라도 이렇게 그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지 않는가?
이 행성에서 타베스에 뒤덮인 대륙들도 사실상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고 말이다.
그런 판국에 타베스는 단순히 우주의 근본 원리일 뿐이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란 말인가?
차라리 독성 물질이라거나, 성질이 더럽고 난폭한 신적 존재라고 하는 편이 더 말이 되겠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타베스는 우주의 근본 원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주 오래 전, 이 우주에서는 너희 어리석은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나, 진공이 더 이상 진공이 아니게 되었다.
우주의 환경을 바꾸고 진공을 진공답지 않게 만든 근본 원리가 바로 타베스이며, 이 은하계를 제외한 우주 전역은 이미 바로 그 타베스로 충만해진 상태이다.
그 결과 너희가 사는 이 작은 은하계와 우주의 나머지 지역은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환경이 달라지면 생명의 존재 양상도 달라지는 법.
네가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생각한 이 행성의 다른 대륙들이, 사실은 우주 전체로 보면 지극히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환경이라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는 것이냐?”
이사엘라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뿔싸, 일루리아의 화이트 코어가 또 하나 넘어가 버렸다.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이제 일루리아에게 남은 코어는 불과 레드 코어 2개뿐이었다. 그녀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저 말이 맞는다면, 왜 하필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만 특별한 것일까?
우주 전역이 타베스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왜 이 은하계만 예외적으로 타베스의 빈자리, 즉, 아르케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되었단 말인가?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 이유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타베스에게 맞설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걸 궁리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루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꾸만 그런 의문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궁금증은 한창 정신 공격을 가하고 있는 이사엘라에게 물고 늘어질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한때 이 작은 은하계에서 전설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자여, 이 은하계가 타베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공허한 거품이 된 이유를 알고 싶은가?
그러면 우주의 근본 원리인 타베스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참으로 어리석구나!
잘 들어라. 이 보잘것없을 만큼 작고 하찮은 은하계가, 타베스로 충만한 우주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가 된 이유 같은 건 따로 없다.
필연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우연일 뿐이란 말이다.”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 일루리아는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타베스는 왜 이 우연히 만들어진 공허한 거품을 그냥 내버려둔 것일까?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색칠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 생겼다면, 간단히 붓질을 한번 더 해서 그 빈 곳을 말끔하게 메워버리는 것이 보통 아닌가?
“어리석은 것! 아직도 전혀 이해를 못했구나.
우주의 근본 원리인 타베스에게는 이 은하계처럼 작고 하찮은 빈자리를 굳이 꽉 채워서 보기 좋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의지도 전혀 없단 말이다.
다만, 그 거품 안에 살고 있는 몇몇 인간들이 자연스러운 탐구심과 호기심에 의해 우주의 근본 원리에 관심을 가질 경우, 타베스는 그런 인간들에게 기꺼이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줄 뿐이다.”
이사엘라는 여기서 일루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층 더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다. 우주의 근본 원리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실로 크나큰 은총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고 나약한 소녀는 그런 귀한 은총, 즉, 우주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렸다.
그 대신 한때 이 작은 은하계에서 전설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어떠냐? 너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일루리아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름대로 온갖 회유와 설득을 많이 당해 봤지만,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배신을 권유 당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우주의 근본 원리 좋아하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완전히 사기꾼 같구나. 난 그런 웃기는 소리는 절대로 안 믿는다.
너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넌 그냥 잔인한 침략자일 뿐이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너와 맞서 싸울 것이다.”
일루리아는 필사적으로 정신 공격에 저항하는 와중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어 말대꾸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엘라는 빙긋 웃었다.
“아까 말했지 않느냐?
지금 하는 이 말들은 이사엘라라는 이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소녀가 우주의 근본 원리인 타베스 가운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극히 일부만을 이용하여, 자기 멋대로 전체 원리를 유추하고 흉내 내어 말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이사엘라가 말하는 것이 사기꾼처럼 들린다면, 그건 이 소녀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사엘라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사엘라 본인이 말한다는 것이,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실로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생각해 보면, 이사엘라한테 모든 걸 다 뒤집어 씌우는 것 자체도 정말 웃긴 일이었다.
명색의 우주의 근본 원리가 남 탓까지 다 하다니. 이건 아무리 봐도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자처하는 사기꾼 같단 말이야.
“아직도 믿을 수 없단 말이냐? 어리석은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입으로 같은 말을 들려주겠단 말이다.
이렇게까지 큰 은총을 베푸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거라.”
다음 순간, 대체 이사엘라가 무슨 짓을 하려나 싶었던 일루리아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엘라의 모습이 일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헤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했기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 바로 성녀 에클레시아의 모습이었다.
“에클레시아······”
일루리아는 흠칫 놀라면서 그만 순간적으로 정신적 저항의 고삐를 늦추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하나의 레드 코어가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이사엘라에게 넘어갔다.
이제 그녀의 통제하에 남은 것은 프라임 코어 단 하나뿐이었다.
“오래간만이로구나, 우리 착한 루드레이아.”
일루리아는 자신이 정신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이사엘라에 의해 강제로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실제로 방금 전까지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채 목을 움켜쥐고 있던 이사엘라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 상태였다.
그 대신 오래 전에 자비의 대륙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성녀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그게 환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환각처럼 느껴지는 그 성녀 에클레시아가, 기억을 봉인한 이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본명을 부르면서 말을 걸어오자,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 모습 자체는 환각일지 몰라도, 말하는 주체는 진짜 에클레시아라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한번 죽은 사람은 절대로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야 말로, 어쩐 의미에서는 진정한 이 우주의 근본 원리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일루리아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불쌍한 것.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과거에 너와 내가 진리라고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전부 틀린 거였음을 정말 모르겠니?
나는 이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나는 죽음을 통해 마침내 이 좁은 은하계를 벗어나 광대한 우주로 나갈 수 있었으니까.”
성녀 에클레시아는 이런 말과 함께 일루리아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환각이라곤 해도 그 손길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리운 손길이 진짜로 뺨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이 은하계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가상 현실 장치도 이렇게까지 생생한 환각을 만들어지는 못할 듯했다.
“이곳은 정말 놀라운 곳이야. 여기에는 나 말고도 과거 우리 곁을 떠났던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다들 우주의 근본 원리인 타베스 아래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있지. 그러니까 너도 우리 곁으로 오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착하고 현명한 너라면 우리와 함께 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중에 언젠가 이베리스도, 이스카엘도, 모두 다 데려오자. 그러면 우리 모두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을 거야.
우주의 근본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이 재편된 이 넓은 우주에서는 모두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너무나 달콤한 말이었기 때문에 일루리아는 오히려 몇 마디 듣는 순간 벌써 이건 틀림없이 거짓말이로구나 하고 직감했다.
아무리 진짜 같은 환각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까 당사자가 직접 인정한 것처럼, 이사엘라는 타베스에 대한 일부 지식을 바탕으로 어설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환각도 일루리아 자신이 지닌 코어의 통제권을 빼앗으면서 얻은 성녀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이사엘라가 어설프게 성녀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사실을 뻔히 다 짐작했으면서도, 솔직히 말해서, 일루리아는 눈 앞에 나타난 환각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른 건 몰라도 성녀 에클레시아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었으며 거부하기가 상상 이상으로 쉽지 않았다.
아무리 뻔히 보이는 사기꾼 수법이라고 해도 말이다.
“거절한다, 이 나쁜 놈아! 우주의 근본 원리 좋아하네, 더러운 사기꾼 같으니! 어디서 감히 성녀의 흉내를 내는 것이냐?”
일루리아는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어서 말했다.
물론 그 바람에 정신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필요한 집중력이 일순 크게 약해졌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프라임 코어가 하마터면 거의 이사엘라에게 넘어갈 뻔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이 없을 정도로 뻔하고 달콤한 거짓말에 그만 마음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부러 입을 열어서 단호하게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성녀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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