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10화: 아들들의 전쟁 (41)
한편, 카르스덴은 현장 최고 지휘관으로서 싸움터 곳곳으로부터 달려온 전령들을 통해 전황을 자세히 보고 받는 중이었다.
페레이즈의 함정에 빠져 패주한 기병 가운데 한 명이 용케도 그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 왔기 때문에, 그 또한 케르비오 기병대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심지어 페레이즈가 오늘 그가 쓰려는 것과 비슷한 유인 작전을 사용했다는 사실까지도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카르스덴은 바보가 아니었다. 패주한 기병으로부터 자세한 상황 보고를 받자마자 그도 역시 칼마르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적 보병대가 아군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아군 보병대가 페레이즈의 함정에 빠져 아군 기병대와 같은 운명을 맡게 될 위험성마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작전을 중지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도박에서는 실수로 돈을 잃은 것을 아깝게 생각해서 그 돈을 회복하려고 무리하게 도박을 계속하다가는 도리어 더 많은 돈을 잃고 마는 법이다.
차라리 여기서 빨리 포기하는 편이 손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강하게 맴돌고 있었다.
카르스덴이 잠시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침 크로키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크로키의 전갈은 고민스러운 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었다.
그 전갈은, 케르비오 족 보병 선발대가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워 플로젠 보병대를 멋지게 유인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플로젠 보병대는 아군이 거짓으로 패한 척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파로크 성채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중이라고 했다.
크로키는 그 모든 공적을 부상을 입어 가면서까지 노구를 이끌고 싸운 프라티온 부족장에게 돌리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늙은 부족장과 많은 병사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다짐까지 덧붙여 놓았다.
이와 같은 패기 넘치는 내용의 보고를 받자 카르스덴의 마음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그 보고 덕분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상황 판단과 가치 판단이 순간적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그가 여기서 작전을 중지한다면, 오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기병과 보병들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죽음을 당한 셈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족을 무슨 낯으로 볼 것이며, 앞으로 부족 대표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케르비오 왕국의 여러 부족 대표들은 시련을 딛고 병사들이 흘린 피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들은 결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하여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비겁하고 무기력한 지도자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용기를 내서 밀고 나가야 할 때다.
크로키의 희망찬 전갈은 카르스덴의 피를 다시 한번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뜨겁게 만들었다.
불행히도 프리트만이 칼마르의 전갈을 가지고 허둥지둥 달려온 시점은, 카르스덴이 이렇게 마음을 굳히고 크로키가 보낸 전령에게 작전을 계속 진행하라는 내용의 답을 줘서 돌려보낸 직후였다.
“카르스덴 왕자님, 칼마르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아군 기병대가 페레이즈의 간계에 빠져서 많은 전사자를 냈으며, 생존자 가운데 몇 명이 파로크 성채로 돌아 왔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프리트만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카르스덴이 피곤한 듯 말을 잘랐다.
그는 방금 전까지 한참 골치 아프게 고민하다가 겨우 결론을 내린 문제를 다시 처음부터 고민하기가 정말 싫었던 것이다.
“그만 됐다. 아군 기병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페레이즈가 무슨 간계를 사용했는지 역시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요점만 간단히 말해라. 칼마르가 무슨 말을 전하라고 하더냐?”
말솜씨에 자신이 없는 프리트만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마르님은 왕자님께 오늘 작전의 중지를 건의 드리라고 했습니다.
페레이즈가 이제부터 왕자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작전과 유사한 유인책을 사용하여 아군 기병을 전멸시켰는데, 그 놈 휘하의 보병대가 아군의 유인 작전에 그렇게 쉽게 걸려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리트만이 최선을 다해 칼마르의 간곡한 뜻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방금 전에 이미 확실한 결정을 내린 카르스덴은 그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군의 유인 작전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매복 작전을 단 한번이라도 써본 군대는 영원히 매복에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 않느냐?”
“그, 그건······”
말 주변이 그다지 좋지 않은 프리트만은 카르스덴의 핀잔 섞인 반박을 듣고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크게 당황했다.
사실 그는 카르스덴과 논쟁을 벌일 말 재주도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무릎을 꿇은 채 깊이 머리를 숙이면서 감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왕자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제 아버지가 노구를 이끌고 아군 보병 선발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만약 페레이즈가 아군 기병뿐만 아니라 아군 보병에게도 간계를 쓰려 한다면 제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제 아버지의 나이와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이번 작전을 중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카르스덴은 감동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프리트만을 엄하게 꾸짖었다.
“닥쳐라! 네 아버지는 아군 보병 선발대를 이끌고 용감히 싸워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적 보병대를 유인하는데 성공했단 말이다.
그 공적은 왕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런데 네 놈은 새파랗게 젊고 혈기 왕성한 놈이 늙은 아버지만한 용기도 없는 것이냐?
지금 여기서 작전을 중지한다면 네 아버지와 많은 병사들이 흘린 피는 그냥 헛되이 낭비될 뿐이다.
너 역시 네 아버지의 피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을 터. 너야말로 네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겁쟁이 같은 소리는 하지 마라.”
프리트만은 다른 건 둘째치고 그의 아버지가 부상을 입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예? 제 아버지가 부상을 입었다고요? 중상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이미 크로키에게 지시를 내려 놓았다.
만약 네 아버지의 상처가 심하면 즉시 파로크 성채로 후송할 것이며, 전체 보병의 지휘권을 크로키가 인수하라고 말이다.
너는 그런 줄 알고 어서 파로크 성채로 돌아가서 네 아버지가 돌아오면 잘 보살펴 드릴 준비나 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프리트만은 카르스덴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설득해 봐야 소용 없다고 생각했다.
“잘 알겠습니다. 다만, 그래도 칼마르님의 충고를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적 보병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패주하더라도 함부로 추격하시면 안 된다는 충고입니다.”
“내가 그만한 이치를 모를 리가 있겠느냐? 너는 어서 돌아가라.
돌아가서, 칼마르에게 잘 알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궁수들을 지휘하여 적 보병대에게 화살을 퍼부을 준비나 잘 하라고 전하거라.”
카르스덴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프리트만은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기운 없이 파로크 성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 싸움에서는 반드시 적병을 1천명 이상 죽여야 한다. 그래야 아군 기병과 보병 선발대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테니까.”
카르스덴은 프리트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새삼 투지를 불태웠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플로젠 보병대 3천명은 키르기트의 지휘를 받아 질서정연하게 진군하여 파로크 성채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앞쪽에서는 케르비오 족 보병 선발대가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파로크 성채 동쪽 성벽 위에서는 칼마르가 직접 지휘 감독하는 정예 궁수 1천명이 화살을 시위에 얹은 채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중부 산악지대 출신의 그 궁수들은 이미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전부 가늠해 두었으며, 플로젠 보병대가 사정 거리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어떤 방향과 각도로 화살을 쏘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밀한 계산을 다 마친 상태였다.
그들도 아군 기병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자세히 전해 들었으며, 저 멀리서 아군 보병대가 많은 희생을 낸 끝에 간신히 적군을 유인해 오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궁수들은 자신들의 활과 화살에 오늘 전투의 성패가 달려 있으며, 아군 기병과 보병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될지 값진 것이 될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뛰어난 시력을 지닌 그들은 아군과 적군의 보병대가 점점 성채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각자가 평소 애용하던 활을 꽉 움켜쥐었다.
높은 망루에 올라서 궁수들을 지휘하던 칼마르는, 카르스덴에게 작전 중지를 건의하기 위해 보냈던 프리트만이 돌아와서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하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칼마르님. 제가 말 주변이 없어서 카르스덴 왕자님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에는 이미 마음을 굳히신 게 분명해.
하필 마음을 굳히신 직후에 누가 와서 마음을 바꾸라고 건의하면 그렇게 쉽게 귀담아 들으실 리가 있겠나?
자네가 아니라 누가 설득하러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칼마르는 프리트만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을 계속했다.
“왕자님 말씀처럼 자네는 아버님께서 성채로 후송되어 오시면 보살펴드릴 준비나 잘 하도록 하게.”
프리트만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칼마르 또한 그 못지 않게 답답하고 우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플로젠 보병대가 기적적으로 멍청하게 아군의 유인책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요행을 바라는 걸 좋아하지 않는 칼마르였지만, 지금은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만약 카를로만 왕자님이 오늘 총지휘를 맡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 작전 중지에 동의했을 텐데······’
심지어 칼마르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부질 없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물론 카를로만은 채찍질을 당하고 하룻밤 동안 형틀에 그대로 묶여 있다가, 아까 아침 일찍 지하 감옥으로 옮겨진 뒤였다.
지금은 더럽고 축축한 감옥 안에서 끔찍한 고통을 참으면서 신음하고 있을 뿐 도저히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다 카르스덴이 요즘 들어 워낙 노골적으로 동생을 경계하고 있는 만큼, 칼마르로서는 카를로만과 관련해서 그런 부질 없는 생각을 해보았다는 자체만으로도 마치 반역을 도모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는 오늘 전투의 승패를 떠나서 어쩌다 두 형제와 자신의 입장이 이렇게 곤란하게 꼬였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침내 플로젠 보병대의 선두 부분이 성벽 위에 배치된 케르비오 궁수들의 사정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칼마르는 아직까지는 사격 명령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더 많은 적 보병들이 사정 거리 안으로 확실하게 들어오지 않으면 사격을 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지금 잘못 사격했다가는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띄우고 도망치고 있는 케르비오 보병대의 끄트머리도 덩달아 화살비를 뒤집어 쓰게 될 게 뻔했다.
성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카르스덴은, 플로젠 보병대의 선두가 궁수들의 사정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도끼를 쥐고 말 위에 뛰어올라 돌격할 준비를 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의 부하 기병대 또한 재빨리 말에 올라타고 언제든 그를 따라 돌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오늘 싸움에서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는 카르스덴은, 플로젠 보병대가 파로크 성채로 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 6천명의 케르비오 보병대를 지휘하는 크로키는, 파로크 성채 근처에서 후퇴하던 병력을 반전시키면서 대오를 좌우로 넓게 벌리는 작업을 열심히 진행 중이었다.
당초 작전 계획대로, 6천명을 3천명씩 좌우로 나누어 넓게 포진하고, 선발대가 도망쳐 오면 중앙에 포진하게 함으로써, 유인책에 걸려든 플로젠 보병대를 마치 포근하게 감싸 안는 것처럼 포위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케르비오 족 보병대는 새벽에 들판에 처음 포진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크로키의 직접 통제가 아니라, 각 부족별로 부족 대표들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중이었는데, 다들 크로키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아서 명령이 전달되고 실행되는 속도가 크게 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족 대표들과 병사들 중에는, 평소부터 크로키의 오만방자한 성격이 싫었던 사람, 카르스덴이 갑자기 크로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긴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 아까 크로키가 아군 선발대를 냉혹하게 대하는 꼴을 보고 불만을 품은 사람 등 그의 지휘를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거기다 새벽에 들판에 진을 칠 때만 해도 아직 적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상태라서 포진하는 동안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 보병대가 착착 다가오고 있는 상황인지라 다들 마음이 초조했고, 그 바람에 오히려 움직임이 굼떠졌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대로 가다간 플로젠 보병대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그들을 넓게 감싸서 포위할 준비가 끝날지 어떨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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