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31화: 아들들의 전쟁 (62)

카를로만의 말은 여느 때처럼 거침이 없었다.

이런 솔직한 말을 듣는 카르스덴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옆에 있던 카란드라는 내심 무척 걱정스러웠다.

아니나다를까, 막내 동생이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말을 듣는 동안, 카르스덴의 인상이 점점 굳어지고 심각해지는 게 그녀의 눈에도 뻔히 보였다.

마침내 카를로만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 다 끝나자, 카르스덴이 지극히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를로만, 넌 언제나 정말 솔직하구나, 솔직해! 그럼, 이 형도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너한테 숨김없이 말해주겠다. 잘 듣도록 해라.

우리 모두 잘 아는 것처럼, 페레이즈는 잔학 무도한 놈이지만 동시에 아주 교활하고 만만치 않은 적수이기도 하다. 반면에 너는 아직 젊고 경험이 많이 부족하지.

그런 네가 페레이즈를 속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적진으로 갔다가, 거꾸로 놈의 말재간에 넘어가서, 플로젠의 꼭두각시로 케르비오 왕국의 새로운 국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과연 있을까?

다시 말해, 네가 날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질문에도 어디 한번 솔직하게 대답해 보거라.”

카를로만은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자기 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이 아우는 죽었다 깨나도 절대로 페레이즈와 손잡고 형님을 배신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저 또한 형님이나 누님처럼 아버지의 친아들이니까요.

우리 남매의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페레이즈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자와 손을 잡고 감히 형님의 뒤통수를 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이 아우의 진심을 믿어주십시오.”

카를로만은 이 자리에 있는 세 남매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상기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카르스덴은 그런 노력이 무색할 만큼 차갑게 대꾸했다.

“뭐? 부디 너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그런 하나마나 한 소리야 이 세상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다.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건,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나중에 페레이즈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과연 있느냐는 말이다.

괜히 엉뚱한 쪽으로 말을 돌리면서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납득이 가는 변명을 좀 해봐라.”

카르스덴의 말투는 듣기 민망할 정도로 싸늘한 것이었다. 그래도 카를로만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간절하게 형을 설득했다.

“형님께서 납득하실 수 있도록 우리 함께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예를 들어, 제가 정말 몹쓸 놈이라 페레이즈의 설득에 넘어가서 형님 대신 케르비오 왕국의 국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고 가정해 보죠.

그래 봤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손을 잡고 친형님을 배신한 패륜아한테 부족장들이 과연 충성을 하겠습니까?

극히 일부 어리석은 부족장 한둘쯤은 충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저한테 등을 돌리고 심지어 저를 죽이려 들 게 뻔합니다.

제가 아무리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런 이치까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그건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카를로만은 최선을 다해 간곡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자신이 배신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카르스덴은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이것저것 신중하게 고려해서 현명하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흔히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전부 현명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면 전쟁도 싸움도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한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부터가 최근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으니, 너도 충분히 오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나 너는 나한테 채찍형을 당했고, 아직도 몸에 그 상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채찍형은 나 또한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지. 누님 말씀 덕분에 이제 그건 깨달았어.

하지만 그게 누구의 책임이든, 결과적으로 네 마음 속에 나에 대한 불만이 전혀 안 생겼다고 할 수 있을까?

채찍의 상처가 욱신욱신 쑤시는 순간 네 마음 속에 나에 대한 원망이 샘솟지 않을까? 난 이런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 없단 말이다.”

기껏 형이 원하는 합리적인 변명을 하려고 노력했던 카를로만은, 여기까지 듣고 속으로 정말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르스덴은 자신이 동생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던 일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형벌을 받은 동생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었을 게 분명하다면서 오히려 한층 더 의심하는 근거로 삼고 있지 않은가?

물론 카를로만으로서는 그런 억울함을 전혀 입밖에 낼 수도, 내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카르스덴은 카를로만의 표정과 반응을 날카롭게 살펴가면서 말을 계속했다.

“페레이즈도 아마 아군 포로를 통해 네가 채찍형을 당했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만약 그 교활한 놈이 너를 후하게 대접하면서,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형한테 모욕을 당하면서 살 것인가, 차라리 자기와 손잡고 케르비오의 국왕이 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다정하게 묻는다고 가정하자.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아마 그 놈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나올 테니까 말이다. 그 놈이 그렇게 교묘하게 설득할 때, 너는 끝끝내 거부할 자신이 있느냐?

널 극진히 대접하는 페레이즈의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친동생한테 채찍질을 한 이 못된 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면서 단호하게 소리칠 자신이 있느냐는 말이다.

네 가슴에 손을 대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대답해 봐라.”

형이 양심을 거론하면서 계속 압박을 가하자, 그걸 듣는 카를로만의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자기 가슴에 손을 대는 게 아니라, 아예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치면서 안타깝게 호소했다.

“형님, 제 모든 것을 걸고 약속 드리겠습니다. 저는 거짓 특사로 가서 페레이즈가 회유를 하든 고문을 하든 절대로 놈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형님 말씀처럼, 페레이즈는 당연히 제가 채찍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을 이용해서 저를 회유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점을 거꾸로 이용해서 교활한 페레이즈 놈이 저를 믿도록 설득하겠습니다.

그 놈은 이 아우가 형님한테 채찍형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제가 형님을 미워할 거라고 멋대로 넘겨 짚을 게 분명하며, 그 때문에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나중에 우리 형제의 뿌리 깊은 우애 앞에서 보기 좋게 허를 찔리게 될 겁니다.

제가 속이고 뒤통수를 치려는 사람은 형님이 아니라 페레이즈이니까요. 제발 믿어주십시오.”

카를로만이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했지만, 카르스덴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차가운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형님, 형님과 저는 같은 부모한테서 태어난 친형제입니다.

제가 마음 속에 그 어떤 억울함이 있든지, 설마 친형님을 배신하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손을 잡을 리가 있겠습니까?

형님은 제가 잘못을 저질러 훈육 차원에서 저를 채찍으로 몇 대 치셨을 뿐입니다만, 페레이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잔학 무도한 자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아버지의 원수인 페레이즈와 손을 잡고 친형님을 배신할 거라는 의심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듣기가 너무 민망하고 괴롭습니다.”

카를로만이 두 번 세 번 감정과 논리를 총동원해 가면서 간곡하게 설득하자, 카르스덴도 마침내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자 카란드라가 옆에서 민망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카르스덴, 나도 우리 막내 동생 카를로만이 아직 철이 없고 건방져서 종종 불신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이번만큼은 막내가 하는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카를로만이 아버지의 원수인 페레이즈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을 거라고 의심하면서 몰아붙이는 건, 내가 봐도 선을 한참 넘은 것 같아.

그러니 그 말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카르스덴은 누나의 말을 듣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카를로만, 누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방금 전에 한 말은 취소하겠다. 네가 페레이즈와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치리라는 의심은 거두겠다는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널 페레이즈에게 거짓 특사 자격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지원 병력이 도착하려면 하루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 내가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다.”

카를로만은 그나마 형이 의심을 거둔 게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짓 특사 문제든 무엇이든, 저는 무조건 형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카를로만은 무릎을 꿇은 채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마치 다시 죄인이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어둡고 우울한 표정은 당연히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카르스덴 또한 여전히 표정이 아주 딱딱하고 불만스러워 보였다.

두 형제의 표정을 번갈아 살펴본 카란드라가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거짓 특사 문제는 하루 이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 대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지 있다. 카르스덴, 이 일만큼은 내 말을 꼭 들어줬으면 한다.”

“그게 뭡니까, 누님?”

카르스덴이 딱딱한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면서 궁금한 듯 물었다. 카란드라가 제법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네 옆에서 천박한 이간질을 일삼아 온 크로키라는 놈을 당장 이 성채에서 쫓아내 버려라.”

카를로만은 누나의 말을 듣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표정이 확 밝아졌다.

지금까지 크로키가 충직한 사람들을 모함하고 괴롭힌 것을 생각하면, 그 놈이 성채에서 쫓겨난다는 건 문자 그대로 앓던 이가 빠지는 셈이 될 터였다.

기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카르스덴은 카란드라의 단호한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누, 누님,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그 자는 지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용력이 비범하고 말도 아주 잘 타는데요?

비록 생김새가 험상궂고 천박해 보이긴 하지만, 문무를 겸비했고 확실히 재능이 있는 자란 말입니다. 그냥 쫓아내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라고요.”

카르스덴이 망설이자 카란드라가 다시 한번 엄하게 재촉했다.

“아직도 그 자에게 미련이 남았단 말이냐? 그 자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아.

그 자가 감언이설로 네 현명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고, 너와 카를로만, 또 너와 칼마르의 사이를 집요하게 이간질해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게 중요하지.

크로키는 자신이 지닌 능력을 이용해서,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누군가를 이간질하고 모함함으로써 자기 입지를 든든하게 하려 한 천박하고 지저분한 놈이야.

심지어 그 놈의 사악한 의도는 내가 자리를 비운 단 며칠 동안에 하마터면 거의 성공할 뻔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위험하고 악랄한 인간을 곁에 두면 절대로 안 된다. 당장 쫓아버려라.”

카란드라가 거듭해서 크로키를 쫓아버려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설명했지만, 카르스덴은 도무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그는 카란드라의 꾸짖음과 설득 덕분에 흐려졌던 판단력이 다소 회복되었고, 크로키에 대한 맹목적인 신임도 이미 어느 정도 거둔 상태였다.

그래도 크로키를 다짜고짜 성채에서 쫓아내어 두 번 다시 안 본다는 건 어쩐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크로키가 천박한 인격을 지닌 위험한 놈이라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직속 부하들 중에는 그 놈 보다 더 위험하고 천박한 싸움꾼들도 많이 있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그리고 누님께서도 종종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저한테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악독한 도적놈이라고 해도, 그 악당에게 같은 도적놈을 때려잡는 일을 맡긴다면 누구 보다 뛰어난 인재가 될 수도 있다고요.

그런 이치를 크로키한테도 적용하면 안 되는 겁니까?”

카르스덴은 어떻게든 카란드라의 입에서 ‘그럼, 그냥 크로키를 성채에 남겨두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해 항변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마치 애주가가 술을 완전히 끊으라는 말을 듣고 하루에 딱 한잔만 마시면 안 되겠느냐면서 애원하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누님, 지금 우리는 페레이즈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중이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인재도 아쉬운 상황입니다.

비록 방향성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저에 대한 크로키의 충성심만큼은 틀림없는 진짜이고, 그 자의 용맹과 지략 역시 이대로 함부로 내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러니 크로키를 성채에 남겨 두되, 더 이상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고 오로지 싸움터에만 내보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전 맹세코 두 번 다시 그 자의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카르스덴이 간곡하게 애원조로 말했지만, 카란드라의 반응은 지극히 싸늘했다.

그녀의 표정은 방금 전에 카를로만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하던 카르스덴의 얼굴 이상으로 차가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