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22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08)

코어의 배열이란 것은, 물론 코어가 1개 혹은 2개일 때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다.

하지만 코어가 3개 이상으로 늘어나면, 그때부터 조금이라도 더 높은 출력을 끌어내기 위한 ‘배열’이 본격적으로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이 머릿속에 지닌 코어들은 각각의 속성과 무관하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너지 효과로 인한 출력 상승의 정도는 코어들 사이의 연결수에 비례한다고 알려져 있다.

최대한 많은 코어가 서로 방해를 받지 않고 연결되었을 때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를 들어, 3개의 코어가 완전히 일직선으로 배열되었을 경우, 한가운데에 있는 코어는 양쪽의 코어와 원활하게 상호작용을 하여 최대한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반면에 양쪽 끝에 있는 코어들끼리는 중간에 있는 코어의 간섭과 방해로 인해 서로 원활하게 상호작용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연결수는 2로 계산된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코어의 배열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코어 3개를 각각의 꼭지점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만들 경우, 전체적인 연결수는 최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3으로 늘어난다.

즉, 일직선 배열의 코어 3개와 정삼각형 배열의 코어 3개는, 비록 코어 숫자 자체는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연결수에 비례한 시너지 효과로 인해서 제법 두드러진 출력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사실은 이미 엄밀한 실험을 통해 확실하게 증명되어 있었다.

코어가 4개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면 배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물론 4개의 코어를 단순히 정사각형으로 배열한다고 해서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서로 대각선상에 위치한 코어들 사이에서도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사각형 배열도 최대 연결수 6을 만들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사각형 배열에서 생각의 폭을 조금 더 넓힌 학자들은, 4개부터는 코어를 입체로 배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추가적인 연구에 의해, 연결수가 동일하다고 해도 평면적인 배열 보다는 입체적인 배열 쪽이 좀더 시너지 효과가 높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나 아르케의 힘으로 신체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코어를 입체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현재 제국 학계의 정설이었다.

가령, 코어를 4개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정사면체로 배열하는 사전 작업이 신체를 재구성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물론 코어 소유자 스스로도 부단히 훈련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코어의 배열을 조정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입체적이고 균형 잡힌 최적의 코어 배열은 소유자 자신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인위적인 교정 작업 없이 가만 내버려두었다가는, 코어의 입체적인 배열상태는 자꾸만 평면적인 상태로 돌아가려 하며, 평면적인 배열 상태는 가지런한 도형에서 벗어나 자꾸만 비뚤어지려 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소한 골드 코어를 3개 이상 지니고 있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정기적으로 교정 작업을 해줘야 한다.

이크루아는 지금 바로 그 코어 배열 교정 작업을 마지막으로 서비스해주려고 하는 중인 것이다.

“제가 방금 전에 확인해 보니, 현재 주군의 코어 배열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에요.

연금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제가 최선을 다해서 아주 보기 좋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코어를 배열해 드린 것 기억하시죠?

연금되어 있는 동안 구속구로 주군의 힘을 봉인해둔 탓도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배열 상태가 완전히 망가져서, 아주 지저분하게 비뚤어진 오각형 비슷한 배열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배열된 코어를 가지고 주군이 이 정도까지 날뛴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라니까요.

그런데 저더러 그 지저분한 꼴을 보고도 그냥 훌쩍 떠나 버리라고요? 그건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해요. 잔말 말고 가만 계세요.”

이크루아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써 자신만의 접속 코드를 이용하여 일루리아의 머릿속 코어에 멋대로 연결한 다음, 코어 5개의 배열 상태를 한창 열심히 손보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일루리아는 문자 그대로 머릿속에서 작은 벌레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들어서 자꾸만 몸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두뇌 자체는 두개골을 열고 칼로 콱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 이상한 감각만큼은 흡사 두뇌 전체가 예민한 피부로 뒤덮인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물론 이건 매번 코어 배열을 교정할 때마다 겪는 일이었고,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긴 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머릿속 코어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조작의 의해 움직이는 바람에 느껴지는 괴상야릇한 감각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이렇듯 작업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 자체는 별로 기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루리아는 잠시 후면 영원히 떠나 보내게 될 심복 부하와의 소중한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코어 배열 교정이 끝나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점점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가만, 예전에 교정 작업을 할 때에도 이랬던가?

‘나의 소중한 루······이아······ 이제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구나. 적어도 너만은 나의 이 결정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일순 일루리아는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성녀의 그리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그게 진짜 성녀가 다시 살아나서 낸 목소리는 아니라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르케와 코어 덕분에 현생 인류의 힘이 구인류 보다 크게 강해졌다고 해도, 한번 죽은 사람이 두 번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다면 설마 이 와중에 몇 초쯤 깜빡 잠이 들어서 꿈이라도 꾸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저 환청을 들었을 뿐인 걸까?

어쨌든 방금 그 목소리는 성녀가 이 대륙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건넨 말이 분명했다.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말이 약 200년만에 되살아난 것이다.

그것도 띄엄띄엄 이긴 했지만, 이미 봉인되었을 자신의 원래 이름까지 포함한 내용으로 말이다.

그때 이크루아가 교정 작업이 끝났음을 알리면서 불쑥 말을 걸었다.

“교정 작업 다 끝났습니다. 역시 모름지기 코어의 배열이란 이렇게 깔끔해야 마땅하지요.”

이크루아가 태연히 말했지만, 일루리아는 방금 전에 들은 목소리 때문에 다소 놀란 상태였다.

“너, 지금 내 머릿속에 무슨 짓을 했냐?”

일루리아가 미심쩍은 듯한 말투로 물었지만, 이크루아는 지극히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하긴요. 코어의 배열을 교정했다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전에 죽은 성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띄엄띄엄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는데, 거기에 내 원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다.

정상적이라면 과거 회상에서도 이름처럼 기억이 특히 엄중하게 봉인된 부분은 절대로 생각나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

그 부분만 기억이 뿌옇게 희미하다고 느껴지든지, 일루리아라는 이름으로 생각나든지 해야 정상이잖아? 솔직히 말해봐라, 너 설마······”

그러자 이크루아는 일루리아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정상적이라니, 도대체 어느 쪽이 정상인가요? 과거의 기억이 봉인된 게 정상이라는 말씀인가요?”

이 말을 듣고, 일루리아는 이크루아가 아무래도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막 더 캐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앞쪽 바위산에서 무시무시한 검은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강하게 치솟는 것이 보였다.

마치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면서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킨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와의 공중전에서 허를 찔려 일시적으로 나가 떨어졌던 이사엘라가 정신을 차리고 분노에 치를 떠는 상황인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한가하게 이크루아를 붙잡고 미심쩍은 것을 따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 여자애가 정신을 차린 것 같군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저는 이만 작별하고 떠나겠습니다.

아, 주군의 갑옷은 최대한 업그레이드를 하여 이미 바이크 안에 준비해 두었으니 알아서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원자재 부족으로 인해 바이크에 실탄을 보충해둘 방법이 없었으니, 실탄 잔량에는 부디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이크루아가 마지막 당부 삼아 이렇게 말했다.

일루리아는 도대체 방금 전에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는 추궁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결국 도로 삼켜버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문제를 가지고 따질 때가 아니다. 거기다 이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그건 전부 나를 위해서 행한 일이었을 터.

이제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 마당에, 굳이 따져 봐야 아무 소용 없는 문제를 추궁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한 일루리아는 결국 더 따지지 않고 차분하게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부디 멀리 떠나서 잘 살아라.”

“주군의 무운을 빕니다. 언젠가 이 넓은 은하계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겠습니다.”

이크루아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저 해보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다음 의외로 미련 없이 통신을 뚝 끊었다.

애당초 자신이 떠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통신이 끊기고 나자 일루리아는 무척 아쉽고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 위에 있는 높은 하늘 쪽을 올려다 보았다.

당연히 그곳에는 시커먼 먹구름만 가득 차 있을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크루아가 탄 우주선은 지금부터 이 행성에서 점점 멀어져 가기 시작할 터.

제국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그 우주선의 환상적인 자태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왕 작별할 거라면 마지막으로 이크루아의 얼굴을 직접 한번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구나.’

일루리아는 잠시 이크루아와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과거 성녀와 영원히 작별했을 당시에 못지 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건만, 그래도 가까운 사람과의 작별은 역시나 정말 괴로운 법이었다.

동시에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려고 안달이 나 있는 이사엘라에 대해서도 문득 깊은 동정심이 느껴졌다.

이크루아를 떠나 보낸 직후라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저 아이가 과연 그 동안 혼자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저 아이는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아마도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일루리아는 새삼 측은한 눈으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바위산 정상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역시 무력하구나.]

한편, 이사엘라는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불완전하게나마 클라데스화가 진행된 직후, 금방이라도 자비의 대륙은 물론이고, 행성 카리타스까지 몽땅 집어삼켜서 멸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충만했었다.

하지만 기세 등등하게 지하 열수층으로 들어갔다가 일루리아와 이아테스에 의해 도로 쫓겨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대기권 밖에서 강하한 중기갑 바이크에게 호되게 당하고 나가 떨어지기까지 하자, 지금은 그저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사실 문제의 바이크에게 당한 타격 자체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거기다 여전히 배리어 제너레이터에 의해 막대한 양의 타베스가 현재 이사엘라가 있는 바위산 정상 부근에 집중된 채 갇혀 있었다.

물론 더 이상 요새 메인 시스템 제어 모듈인 이레니아를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재배열할 방법은 없었고, 그 바람에 암초 밖으로 나가서 대륙 본토로 쳐들어갈 만한 방법이 당장 마땅치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바위산 정상 부근에 밀집되어 있는 막대한 양의 타베스로 인해 이사엘라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서 힘이 더 강해지고 클라데스화가 완성된다면, 반드시 대륙 본토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딱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건만, 이사엘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너무나 커서 한참 동안 좌절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본체가 그런 상태이다 보니, 수많은 흑색 섬유로 연결되어 사실상 한 몸이 된 이형성체의 무리도 마찬가지로 전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저 본체가 어떤 결단을 내려주기만을 얌전히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역시 아무런 꿈도 이룰 수 없을 만큼 무력하고 나약하며 못난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비록 아직은 불완전한 클라데스화라고 해도, 원하던 대로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원흉 가운데 한 사람인 일루리아에게 막혀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다니!

이 얼마나 무력하고 한심한 꼴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