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09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95)
“나도 한때는 성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고, 이베리스나 이스카엘 같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도 잘 알다시피 성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옛 동지들은 모두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리지 않았느냐?
그런 가슴 아픈 변화를 겪었는가 하면, 오늘은 또 너 같은 뛰어난 인재를 만나서 오래간만에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라는 게 반드시 나쁜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도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알겠지?”
일루리아는 어른스럽게 이런 말을 마치고 떠나려다가, 문득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그시아와 이르피오에게 시선이 미쳤다. 조만간 상실자가 될 아이들이었다.
기본 성품이 착한 그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측은한 표정으로 짧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불쌍한 것들. 지금 너희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로서는 아예 상상조차 못하겠다.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상실자가 되어본 적은 없으니 함부로 너희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하는 척조차 할 수가 없구나.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내거라. 우리에게 코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코어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게 곧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 '전설의 영웅'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격려해 주었다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무척 들뜨고 기뻐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어도 전혀 기쁠 리가 없었다. 둘 다 그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일루리아는 거기다 대고 짧은 작별 인사와 당부를 더 건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너희들하고 길게 얘기하면서 위로해줄 시간이 없다. 다만, 가능하다면 너희가 이 착한 아이를 좀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일루리아는 이런 인사를 남긴 다음,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공양용 바이크가 여전히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이그시아가 타고 있던 물건이었다.
지금처럼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는 무식하게 발로 뛰어가는 것보다, 아무래도 뭔가 타고 가는 편이 더 나을 터. 그녀는 재빨리 그 바이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분이 바로 일루리아님인가요?”
일레시아가 쓸쓸한 표정으로 달려가는 일루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르피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요. 열풍의 성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린 바로 그 전설의 영웅이에요.”
일레시아가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언제까지나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저 분, 무슨 큰 죄를 짓고 관리국 본부 타워 지하에 연금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여전히 와이어에 묶인 상태에서 이그시아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약해진 듯, 두 사람 모두 아까와는 달리 일레시아에게 비교적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요. 그보다 지금은 여러분한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겠죠?”
일레시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들 두 사람 앞에서 민감한 화제를 대놓고 꺼냈다. 말투만 들어보면 완전히 관리국 집행부 관리요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정말 상실자가 되는 건가요?”
이르피오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의 몸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
극심한 두통과 비정상적인 코어 출력, 온몸에 이상할 정도로 많이 흘러 넘치는 아르케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증상들로 미루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여러분의 코어가 지금 같은 과부하 상태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머릿속에 삽입된 타베스 칩을 제거할 방법이 전혀 없는 이상, 상실자가 되는 운명은 피할 수가 없어요. 정말 유감이에요.”
“이런 젠장!”
‘상실자가 되는 운명은 피할 수 없다’는 일레시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그시아는 화를 벌컥 내다가 다시 왈칵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르피오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다. 둘 다 표정에 온통 절망만이 가득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머지 않아 코어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다는 선언을 들은 것은, 그야말로 시한부 생명이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잠시 후면 평생 은근히 무시하고 낮춰 보며 살았던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과 별 차이가 없는 신세가 된다니! 이 무슨 끔찍한 운명이란 말인가?
“괴롭겠지만, 진정하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일레시아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와이어에 묶인 채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이그시아를 보자, 우선 묶인 것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물론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손으로는 묶인 것을 풀어주면서 입으로는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리더라도, 여러분이 상실자가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운명에 대해서는 저나 여러분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주저 앉아서 울다가 상실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남은 시간 동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에요.”
“우리가 지금 뭘 할 수 있죠? 가만 있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거기다 곧 상실자가 될 텐데요?”
이르피오가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일레시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차례차례 바라보면서 힘주어 말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남은 시간 동안 저를 좀 도와주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이르피오는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잠시 후면 상실자가 될 우리가,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냐고요?"
“저랑 같이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강제로 메인 시스템의 제어 모듈이 되어 있는 이레니아를 구해내는 일이에요.
도망친 이클리프가 아직 요새 안에 있고, 그 외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전투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혼자서 이레니아를 구하러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일레시아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마침 이그시아는 와이어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였다.
“뭐, 같이 이레니아를 구해내자고? 아, 알았다! 이제 보니,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편리하게 부려 먹으려는 거지? 그렇지?”
이레니아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듣는 순간, 이그시아한테서는 방금 전까지의 다소 정중했던 태도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그녀는 화를 벌컥 내면서, 건틀릿 장갑을 낀 오른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얼굴을 후려쳐 버릴 듯한 기세로 주먹을 무섭게 치켜들었다.
“대답해 봐! 조만간 상실자가 될 우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악착 같이 이용해 먹으려는 거 아냐?
이 와중에도 같은 집행부 사람만 우선적으로 챙기겠다 이거지?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하지만 웃기지 마! 우리가 그렇게 우습고 만만해 보여?”
현재 타베스 칩의 증폭 효과로 인해 이그시아가 지닌 코어의 출력은 크게 증가해 있었다.
따라서 지켜 든 건틀릿 주먹에 잘못 얻어맞았다간 일레시아의 얼굴 뼈가 완전히 박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르피오도 대놓고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표정에 불쾌하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두 사람으로서는, 가뜩이나 ‘시한부 선고’를 받아서 고통스러운 판국에, 일레시아가 자신들을 이용하여 같은 집행부 소속 동료를 챙기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원망을 촉매로 삼아, 가슴 속에 가득 응어리진 슬프고 괴로운 마음이 일시에 분노로 바뀌어 위협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입 닥치고, 헛소리 집어 치워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도 이그시아가 얼굴을 후려갈기기 전에, 일레시아가 먼저 상대방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야단을 쳤다.
물론 그래 봤자 아르케가 실리지 않은 평범한 타격(?)이었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화들짝 놀라긴 했어도 무슨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얻어 맞은 이그시아는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이르피오의 놀라움은 실로 컸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전부 이 대륙이 멸망하느냐 마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순간들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거예요?
저기 저 일루리아님을 좀 봐요.
여러분도 방금 전에 똑똑히 봤겠지만, 가슴 한복판이 뻥 뚫리는 중상을 입고도, 그걸 대충 치료한 다음,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위험한 곳으로 돌진해 가고 있잖아요?
저걸 보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겠어요?”
일레시아는, 바이크를 타고 암초 중앙부의 바위산 정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일루리아를 가리키면서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낮게 떠서 날아가는 그 바이크는 비행 상태가 아주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주변 일대의 타베스 밀도가 워낙 높을 뿐만 아니라 흐름도 거칠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루리아는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저 분은 우리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 행성과 대륙은 물론, 은하계 전체를 위해 수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오랜 세월 지하에 외롭게 연금되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부왕궁의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갇혀 있는 장소를 탈출하여, 지금 부상을 무릅쓴 채 싸우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 대륙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요.
심지어 그렇게 고생해서 이 대륙을 구해 봤자,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건 가중 처벌을 당하는 운명뿐이란 걸 잘 알면서 말이에요.
저 분의 저런 절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정말 사태의 심각성을 못 느끼겠어요? 아무 느낌도 안 들어서 그렇게 어린애처럼 구는 건가요?”
일레시아의 꾸짖음을 듣고, 이그시아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 마주 소리쳤다.
“대체 우리더러 뭘 느끼란 말이야? 우리하고 일루리아님은 완전히 사정이 달라!
저 분은 어쨌거나 한때 은하계 전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엄청난 명성과 명예를 손에 넣었던 분이잖아?
반면에 우리는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하고 하찮은 존재라고! 그런데 저 전설의 영웅을 보면서 도대체 뭘 느끼란 말이야?”
뒤이어 이르피오도 억울한 듯한 말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우리는 이 행성에 있는 배양 캡슐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단 요원으로 고생만 하다가, 세상에 이름을 남길 만한 대단한 일 같은 건 아무 것도 못해보고 오늘 갑자기 상실자가 되게 생겼어.
그런 우리더러 일루리아님을 보고 무슨 깨달음을 얻으란 건데? 우리 같은 하찮은 인생이 저렇게 눈부신 인생을 보면 더 비참해질 뿐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
이그시아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비참한 인생인데, 이제는 코어가 완전히 망가지는 순간까지 너하고 이레니아를 위해서 고생만 하다가 상실자가 되라고?
우리가 왜 마지막 순간까지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우릴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풀린단 말이야? 응?”
두 사람이 토해내는 울분과 한탄을 듣고, 일레시아는 정말 딱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것 보세요. 저나 이레니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란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배양 캡슐에서 태어나서 오늘까지 대단한 일 같은 건 아무 것도 못해 봤다고요? 저 분도 태어나면서부터 덜컥 전설의 영웅 소리를 들은 줄 아세요?
말단 요원으로 고생만하다가 상실자가 되는 게 억울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악착 같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볼 생각을 해야죠!
지금이 바로 그런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모르겠어요?””
일레시아는 터질 듯한 답답함을 억누르면서 최선을 다해 차분함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제어 모듈이 된 이레니아를 구해낸다는 것은 곧 요새 메인 시스템의 통제권을 되찾는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되면 현재 타베스를 끌어들여 바위산 정상에 집중시키는데 쓰이고 있는 배리어 제너레이터의 배열을 다시 조정해서, 원래대로 타베스를 밖으로 밀어내는 에너지 장벽을 생성하는데 쓸 수가 있다고요.
그게 지금 상황에서 자비의 대륙을 구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일레시아가 아무리 차분하게 설명해도, 이그시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흥, 말은 그럴싸하게 하네! 하지만 더는 그런 말에는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런 식으로 우리를 속여서 네가 원하는 대로 이레니아를 구하게 만들려는 거지? 지금까지 집행부가 우리를 부려 먹을 때 쓰던 방식 그대로 말이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고 해도, 나한테도 오기와 자존심이란 게 있다고! 우리를 이런 곳으로 보내서 상실자가 되게 만든 집행부 사람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겠어!
이게 바로 상실자가 되기 전에 그나마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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