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77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63)
‘이 영감님 정말 보면 볼수록 착하네.’
일레시아는 속으로 거듭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 노인은 젊었을 때 수많은 전쟁에 끌려 다녔으며, 가까운 사람을 많이 잃고 혼자 살아 남았다.
이후 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욕을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셋이 모두 전쟁터에 끌려가서 전사하는 등 크나큰 아픔을 겪은 사람이다.
살아온 인생만 놓고 보면 성격이 극도로 비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오늘 처음 만난 수상한 사람을 이토록 걱정해 주다니······
“괜찮아요. 이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간다고 해도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일루리아는 안심시키는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늙은 어부는 되레 흠칫 놀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일레시아가 보기에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까 불쌍한 표정을 지었을 때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갑자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으니, 상대방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먼 바다로 나가야겠소?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되오.
아무리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굳이 위험한 망망대해로 가야 할 이유도 딱히 없는 것 아니오?”
늙은 어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재차 물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살짝 추궁하는 듯한 투로 들렸다.
가야 하는 이유야 당연히 있지. 자비의 대륙을 구해야 하니까. 일레시아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얘기를 이 늙은 어부에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루리아는 일관성 있게 아까 꾸며냈던 자기 사연을 반복할 뿐이었다.
“저 먼 바다가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요. 그게 바로 이유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성 실레지아 신전에 100년이나 갇혀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고향도 기다리는 친척도 전혀 없어요.
거기다 대륙 전체에는 소디아인이 쫙 깔려 있는데, 저 먼 바다가 아니면 제가 달리 어디로 가겠어요?”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늙은 어부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기색이 한층 더 짙어졌다.
“저 먼 바다가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가씨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위험한 바다로 도망치는 사람 같지가 않소.
내가 이래 봬도 수많은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이라오.
다른 건 몰라도, 비겁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은 어느 정도 정확히 구분할 줄 알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가씨는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은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용감한 사람 같아 보인단 말이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 거요?”
그저 선량한 노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예리한 지적이었다.
일레시아는 일루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 같아서 일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러면 여태껏 시간 낭비를 해 가면서 쓸데 없는 촌극을 벌인 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정말 저 착한 노인을 때려눕히고 배를 빼앗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일까?
역시 아까 내 말대로 격납고에 가서 에어바이크를 훔쳤어야 했는데 말이야.
늙은 어부는 의심을 품고, 일레시아는 크게 당황하는 와중에서도, 정작 일루리아는 흔들림 없이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불쌍한 모습과 용기 있는 모습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냐고요? 글쎄요. 선장님께서 그렇게 보셨다면 둘 다 진짜 제 모습이 아닐까요?
불쌍한 사람이 용기를 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선장님만 해도 지극히 불쌍한 분인데 그래도 용기 있게 살아남으셨고요.”
일루리아는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대답해도 상대방이 틀림 없이 배를 내어주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늙은 어부는 더 이상 추궁하고 들지는 않았다. 그저 깊은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서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물을 뿐이었다.
“정말 저렇게 작은 돛단배로 저 거친 바다에 나가고 싶은 거요? 죽을 가능성이 높아도, 반드시 가야만 하겠소?”
“네, 꼭 가야겠어요.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죽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행여나 전혀 책임감 같은 건 느끼실 필요 없어요.”
일루리아가 다시 힘주어 말하자, 늙은 어부는 결국 좀 전에 받은 페룸 조각을 자기 품 안에 갈무리해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잘 알겠소.
아가씨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비싼 물건을 주고 이런 낡은 배를 사겠다고 하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거래는 성립되었소. 이 배는 이제 당신 거요. 마음대로 쓰시오.”
일레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배를 구한 건 둘째치고, 이렇게 착한 노인을 두들겨 패거나 협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뻤던 것이다.
“나는 잠시 후 아내가 잠에서 깨면, 낯선 사람한테 정확한 시세도 모르는 물건을 받고 배를 넘겨줬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하겠구려.
그런 다음 단골 상인을 찾아가서 이 페룸 조각의 가격을 물어봐야겠소."
늙은 어부가 농담조로 덧붙이는 말을 듣고, 일루리아도 덧붙여서 충고했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혹시나 그 단골 상인이 페룸 조각의 가격을 후려치려고 해도 절대로 응하지 말고 끝까지 배짱을 부리도록 하세요. 아셨죠?
그거 정말 비싼 거예요. 믿으시는 김에 한번 더 제 말을 믿어 보세요.”
“명심하고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돈을 받게 되면, 어디 큰 마을로 이사 가서 글 잘 쓰는 사람을 고용하여 전쟁터에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남기도록 하세요.
수많은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노병의 생생한 경험담이라면, 그 책 또한 아마 제법 큰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일루리아의 친절한 충고에 늙은 어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기억해 두겠소.”
이것으로 이야기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일루리아는 즉시 늙은 어부와 함께 돛단배를 바닷물에 띄우는 한편, 배에 실려 있던 불필요한 도구들을 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은 금방 끝났다.
그때 늙은 어부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듯 친절하게 물었다.
“먼 바다로 나갈 거라면 아무래도 물과 식량이 더 필요하지 않겠소?
이 배에 비상 식량이 약간 실려 있긴 하지만, 아가씨가 원한다면 우리 집으로 뛰어가서 조금 더 가져다 줄 수도 있소.”
만약 늙은 어부가 걱정하는 것처럼, 정말로 아무 대책 없이 이런 작은 배로 먼 바다에 나갈 작정이라면, 식량을 아무리 많이 싣는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굶어 죽기 전에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이 착한 노인은 그런 이치를 뻔히 알면서도, 그저 어떻게 해서든 뭐라도 더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일루리아와 일레시아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비의 대륙을 구하기 위해 제 10요새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추가 식량 같은 건 딱히 필요 없었다.
“괜찮아요. 배에 실려 있는 비상 식량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아요.”
일루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늙은 어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일레시아를 손짓해서 불렀다.
부름을 받은 일레시아는 자신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냉큼 그 작은 돛단배에 올라탔다.
“혼자서 괜찮겠소? 이런 돛단배를 모는 방법은 알고 있는 거요?”
이미 배가 바닷물에 떴음에도, 늙은 어부는 여전히 걱정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늙은 아내를 혼자 남겨둔 채, 아가씨와 함께 이 배를 타고 위험한 먼 바다까지 나갈 수는 없소. 정말 미안하오.
다만, 혹시 아가씨가 원한다면 내가 가까운 바다까지는 데려다 줄 수 있소. 거기서 나 혼자 헤엄쳐서 돌아오면 되니까 말이오.”
“괜찮아요. 어서 가서 부인께 야단 맞을 준비나 하세요.”
일루리아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한 다음, 마치 보란 듯이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젓고 작은 돛을 올려서 빠르게 해안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배를 다루는 그녀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늙은 어부는 비로소 좀 안심한 듯 손을 흔들면서 배웅했다.
100년 동안 신전에 갇혀 있었다는 사람이 이런 작은 돛단배를 모는 방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같은 건 묻지 않았다.
“아, 잊을 뻔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아가씨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겠소?”
배가 해안가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늙은 어부가 갑자기 크게 소리쳐서 물었다.
“만에 하나, 이 페룸 조각을 어디서 훔친 거 아니냐고 단골 상인이 따지고 들 경우, 나는 어쩔 수 없이 아가씨한테 받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소.
그래서 이름을 묻는 거요. 정히 대답하기 곤란하면, 내가 대충 아무 이름이나 둘러대겠지만, 워낙 사람 이름 짓는 게 서툴러서 말이오."
이 말을 듣고 일루리아가 아무렇지 않은 듯 역시 크게 소리쳐서 대답했다.
“하나도 곤란하지 않아요. 제 이름은 카스트레아에요. 잘 기억해 뒀다가, 혹시 그 단골 상인이 물어보거든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알려주세요.”
낯선 아가씨의 입에서 느닷없이 카스트레아 왕국의 창업 군주와 똑같은 이름이 튀어 나오자, 늙은 어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곧 재미있는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과거에 아가씨 부모님께서 전설의 영웅을 많이 존경하셨나 보군. 그 이름이라면 절대 잊어버릴 염려는 없을 것 같소.
이제 됐으니 부디 조심해서 가시오.”
이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해안가에 서서 손을 흔드는 친절한 늙은 어부의 모습은 어느새 작은 점만큼 작아졌다.
오래잖아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해안가가 완전히 멀어졌을 때, 마침 동쪽 수평선에서 7월 16일 아침 해가 아름답고 찬란하게 떠올랐다.
실로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일레시아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이고, 힘들어!”
일레시아가 그 눈부신 일출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일루리아가 갑자기 완전히 기진맥진한 듯 돛단배의 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 것이었다.
아까 대륙의 절반을 가로질러 달려왔을 때에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아, 힘들다, 정말 힘들어! 역시 적성에 맞지 않는 짓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제 와서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일루리아를 보자, 일레시아는 실로 어이가 없었다.
“힘들다고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적성에 잘 맞으시는 것 같던데요? 정말 놀라운 연기력이었다고요.”
일레시아가 놀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일루리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마구 내저었다.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적성에 잘 맞긴, 뭐가 잘 맞아? 난 그저 성녀가 예전에 잘 쓰던 수법을 어설프게 흉내 냈을 뿐이야.”
뭐? 성녀님이 예전에 잘 쓰던 수법이라고?
일레시아는 이 말을 듣자 호기심이 동하여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네? 그 고귀하신 성녀님이 저런 식으로 불쌍한 척 연기를 해서 사람들을 속인 적이 있단 말인가요?
“그냥 그런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주 그랬어.
대부분 사람들은 성녀라는 칭호에 속아서 전혀 상상을 못하겠지만,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낸 성녀는 완전히 여우 같았다니까.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그 사람이 성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착하고 자애로웠던 건 틀림 없는 사실이야.
다만, 종종 불쌍한 척 연기를 해서, 특히 나를 골탕 먹이곤 하는 게 문제였단 말이지.”
일레시아는 이런 바다 위에서 뜬금없이 성녀의 새로운 일면을 알게 된 것이 놀랍기 그지 없었다.
그녀가 은근히 감동하고 있을 때, 일루리아가 문득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저 영감님은 선량하면서도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있던데······
지상 거주민들 중에도 정말 좋은 사람이 많다니까. 역시 여기 또한 똑같이 사람 사는 세상인 거야.”
“그래요. 착한 사람이 항상 손해를 보기 마련이라는 이치도 똑같이 적용되는 세상이죠.”
일레시아가 한탄조로 말하자, 일루리아는 펄쩍 뛰다시피 반론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번에 내가 저 착한 영감님한테 무슨 큰 손해라도 끼친 줄 알겠다.
난 어디까지나 이 배를 정당한 대가를 주고 산 거야.
아까 그 페룸 조각을 제 값을 받고 팔기만 하면, 이런 작은 배를 몇 십 척은 사고도 남을 만한 돈을 손에 쥐게 될 테니까.
영감님이 상인한테 속지만 않는다면, 부인과 둘이서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을 거다.
다시 말해, 이건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본 사례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 복을 받은 사례라고 봐야 하지 않겠냐?”
“바로 일루리아님 같은 분을 만나서 복을 받은 거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일레시아가 가볍게 놀리는 투로 되물었다.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일루리아는 부인하지 않고 넉살 좋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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