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5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51)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정적인 이스카엘과 일루리아를 확실하게 제거할 목적으로, 그들이 텍스툼 일당과 내통했다고 모함을 했다니?
아니, 내가 무슨 없는 사실을 지어내기라도 했단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세 번째 혐의만큼은 이베리스도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스카엘과 일루리아가 텍스툼과 내통한 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증인과 물증이 다 확보되었으니, 너도 언제든지 확인해 볼 수 있어.
거기다 부왕궁도 대기권 밖에서 숨어 있던 텍스툼의 첩보선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았나?
그 첩보선은 이스카엘과 일루리아를 텍스툼 일당의 본거지인 솔룸 행성으로 데려가려고 대기 중이었단 말이야.
그걸 정말 모르겠어? 부왕궁 정보부는 다 바보들뿐인가?”
“당연히 부왕궁 근위대 우주군이 텍스툼의 첩보선이 숨어 있는 걸 발견하긴 했지. 하지만 금방 눈치채고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나포하지는 못했다.
거기다 부왕궁 정보부의 말에 따르면, 텍스툼의 첩보선이 행성 카리타스 인근에 출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더군.
그러니 첩보선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만 가지고는 아무런 증거 능력도 없는 셈이지.
그 밖의 증인과 물증 또한 나중에 재판에서 네가 조작한 게 아닌지 엄격하게 따져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재판관도 아닌 나한테 변명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중에 부왕궁에서 재판이 열리면 스스로를 잘 변호해 보도록.”
“이센티스, 너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반역자 이스카엘은 눈 앞에서 도망치게 그냥 내버려두고, 또다른 반역자 일루리아는 정성껏 응급 치료를 해서 후송하면서, 나는 이렇게 죄인 취급하고 있잖아?
나는 부왕 전하와 황제 폐하를 위해 이 땅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고 노력한 잘못 밖에 없는데 말이야. 이러고도 네가 날 배신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
이베리스가 참다 못해 체통이고 뭐고 다 버리고 친구에게 하소연하듯 불만을 터뜨렸지만, 이센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나는 널 배신한 게 아니라, 부왕궁 근위대 소속으로서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스카엘도 당연히 여러 가지 무거운 혐의를 받고 있으니, 나중에 부왕궁에서 부왕 전하와 재상 각하께서 의논하여 그에 합당한 처분을 내릴 터.
그때 내가 그 합당한 처분의 집행을 맡게 된다면, 나는 이스카엘이 옛 동료라고 해서 절대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일루리아가 합당한 처분을 받게 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이센티스와 이베리스가 이렇게 대화하는 사이, 이센티스를 따라온 근위대 기갑군 소속 병사들은 명령 받은 대로 만신창이가 된 일루리아를 응급 치료하여, 생명 속성의 그린 아르케가 충전된 의료 캡슐 안에 집어 넣었다.
그 안에 있으면 그린 아르케의 집중적인 치유 작용으로 인해 일루리아의 신체 회복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부하들은 일루리아가 들어 있는 의료 캡슐 및 일루리아의 무기인 장검과 대검을 이센티스의 마제스틱 오르카 바이크에 실었다.
이센티스는 그걸 눈으로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이베리스에게 다시 말했다.
“내 용무는 이제 다 끝났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 제 10요새 일대의 관할권을 관리국에 다시 돌려주겠다.
저기 쓰러져 있는 급진파 잔당들을 데려가서 잘 심문해 봐. 너한테 최소한의 방어권은 보장해 주겠다는 뜻이야.
재판 때까지 너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준비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이센티스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몸을 돌려 자신의 마제스틱 오르카 바이크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이크에 실린 의료 캡슐을 바라보면서 잠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바이크에 올라 조종간을 잡고 이륙하여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마제스틱 오르카 바이크는 상공에 있는 전용기와 도킹했다.
바이크와 도킹하는 순간, 핵심 유닛과 다시 하나가 된 전용기는 즉시 모든 기능을 회복했고, 잠시 후, 아까와는 반대로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다만, 아무리 마제스틱 오르카라고 해도 단숨에 대기권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일단 성층권까지 상승하여 에너지 장벽을 담장 뛰어넘듯이 넘어 간 다음, 지상에서 대기권 밖으로 이어진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센티스의 마제스틱 오르카와 부왕궁 근위대의 중기갑 바이크들이 줄줄이 성층권으로 상승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베리스는 실로 모든 것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일루리아를 만신창이로 만든 거대한 인간형 기계인 쿠라토르는 여전히 그녀 옆에 엎드린 자세로 착륙해 있었는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만든 그 기계가 갑자기 아무 쓸모도 없는 쇳덩어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베리스가 짜증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니, 함몰 지형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바이크들이 너저분하게 추락해 있었으며, 수십 명의 급진파 잔당들, 그리고 십 여명의 관리국 요원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일부는 부상이 심해서 이미 죽었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뭘 하느냐? 너희들도 어서 내려와서 지상을 정리해라!”
극도의 허무함과 짜증에 사로잡힌 이베리스는, 여전히 상공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관리국 전투요원들에게 통신기를 이용해서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우리 쪽 전사자와 부상자는 수습하고, 급진파 잔당 가운데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모조리 체포해라.
그리고 일부는 나와 함께 제 10요새 중심부에 있는 메인 데이터 센터로 간다. 어서 서둘러라! 빨리 움직이란 말이다!”
지시를 받은 전투요원들은 심기가 불편한 국장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겁을 내면서 즉시 하강하기 시작했다.
“부왕궁 재상 그로스테페 각하, 어디 한번 끝까지 해봅시다.”
이베리스는 분노에 치를 떨면서 대기권 밖의 부왕궁에 있는 재상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린 다음, 애써 기운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스카엘은 환각술을 이용해서 교묘히 위장한 채, 치열한 전투에서 용케 살아남은 급진파 잔당 4명과 이아테스, 그리고 이아테스를 태운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를 견인해서 끌고 자신의 새로운 아지트로 향했다.
이스카엘과 급진파가 공들여 준비한 새로운 아지트는 바로 이번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정신 공격 펄스가 맨 처음 방출된 파미아 화산.
좀더 정확히 말하면, 파미아 화산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잡은 오래된 연구소였다.
파미아 화산은, 자비의 대륙 지상 거주민들에게는 200년 전 암흑시대에 멸망한 고대 퀴르트 왕국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로 유명했으며, 곳곳에 성채 등 유적지도 많았다.
그 퀴르트 왕국은 파미아 화산에서 해안까지 이어진 광대한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자비의 대륙 동부와 중부의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물론 그건 관리국이 편의상 지상 거주민들 사이에 퍼뜨린 거짓 역사일 뿐이었다.
오래 전, 지금과 같은 안정적인 관리국 운영 체제가 정립되기 이전, 자비의 대륙이 자리잡은 행성 카리타스는 보호자가 선천적으로 코어가 없는 상실자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는 불법 유기 장소 비슷한 곳으로 인식되어 큰 혼란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에 아직 살아 있던 성녀 에클레시아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은하계의 강대국이자 에클레시아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이 카리타스에 총독을 파견하면서 겨우 최소한의 틀이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 총독을 파견한 것일 뿐, 카리타스의 상실자 보호 시설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한 자금은 거의 지원해주지 않았다.
은하계 전역으로부터 선천적 상실자들을 행성 카리타스에 모아서 보호하려면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 법.
그래서 당시 장사 수완이 좋았던 카리타스의 총독이 찾아낸 자금 조달 방법은 바로 기부금 제도였다.
구인류가 멸망한 이후, 은하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머릿속에 1개 이상의 코어를 지니고 있었다.
대뇌 누스 영역의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코어는, 보유자가 은하계 전역에 충만한 원초 아르케를 실체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실체화된 아르케가 사람들의 체내를 끊임 없이 순환하면서 보호해준 덕분에, 사람들은 구인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신체적 능력과 긴 수명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대신 구인류와 같은 방법으로는 후손을 남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신체의 면역력과 복원력이 너무나 강해져서, 이질적인 존재인 타인의 생식 세포와 배아가 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된 탓이었다.
따라서 제국 황실에서 일반 백성까지, 코어를 지닌 은하계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몸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배우자의 유전자와 적절히 조합하여 배양 캡슐을 이용해 후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내고 고급 유전자 기술을 지닌 대형 배양 회사를 이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공짜나 다름 없는 대신 기술 수준이 낮은 공공 배양소를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대형 배양 회사든, 공공 배양소든, 배양된 아이 가운데 낮은 확률로 꾸준히 선천적 상실자가 나온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아이가 선천적 상실자로 배양되었을 경우, 코어를 지닌 정상인 부모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계약 위반을 핑계로 상실자 아이를 배양 회사에서 인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든지, 일단 데려가서 어딘가에 몰래 내다 버리든지, 아니면 온전한 사람 대접을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키우려고 애써보든지.
어느 것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행성 카리타스에 제국 황실이 공인하여 총독을 파견한 대형 보호 시설이 생기자, 상실자 아이의 부모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주어졌다.
바로 카리타스 총독부에 부모가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상실자로 태어난 자신들의 아이를 맡긴다는 선택지였다.
아이를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배양 회사에 잔금을 치르고 데려온 부모로서는, 아이가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일반 사회에서 살게 하느니, 차라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카리타스에서 살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하계 전역에서 한 둘이 아니었다. 때문에 카리타스 총독부에는 당장 거액의 기부금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대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카리타스 총독부는 당장 거대한 사업체로 탈바꿈하여 여러 가지 사업 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했다.
그 결과, 구인류의 역사를 참고하여, 행성 카리타스에 존재하는 5개의 대륙에 독자적인 컨셉에 따라 5개의 서로 다른 사회가 만들어졌다.
은하계 전역에서 온 상실자 아이들이 다양하면서도 자유로운 인생을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자비의 대륙이라고 불리는 제 1대륙에는 구인류 시절 서양 중세 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퀴르트 왕국 등 여러 개의 봉건제 왕국 하에서, 사제, 기사, 농민들이 각자 자신의 계급에 충실한 삶을 당연시 여기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제 2대륙에는 구인류 시절 동양 중세 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만들어져서, 하늘의 뜻을 받든다고 주장하는 황제가 여러 제후왕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외에도 제 3대륙에는 서양 초기 산업 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가, 제 4대륙에는 문자와 학문이 본격적으로 처음 발달한 고대 문명 사회, 제 5대륙에는 석기 시대 원시 사회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행성 카리타스의 5대륙 5문명 체계가 정비된 다음,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 전역에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카리타스 총독부의 출장소가 만들어졌다.
그 출장소에서는 우연찮게 태어난 상실자 아이를 잔인하게 버리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며, 황실이 공인한 총독부에 기부금을 내고 아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 내용의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홍보를 보고, 상실자 아이를 맡기기를 원해서 출장소를 찾아온 부모들은, 친절한 상담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신의 아이가 어떤 대륙에서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지 결정한 다음 견적서를 뽑았으며, 그 견적서에 따라 합당한 기부금을 자발적으로 지불한 다음 아이를 맡겼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카리타스 총독부는 더 많은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부모가 낸 기부금의 액수가 곧 행성 카리타스에서 그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거액의 기부금을 낸 부모의 아이는 어느 대륙의 어느 사회에서든 높은 신분을 부여 받을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말해, 예를 들어, 아이를 제 2대륙에 맡기고 싶어하는 부모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낼 경우, 제 2대륙에 있는 황제와 황후는 어느 날 자신들에게 새로운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터였다.
만약 한 등급 낮은 기부금을 내면, 아이는 황후가 아니라 후궁의 소생이 될 수도 있었다.
거기서 또 기부금을 조금 덜 내면 아이는 황실이 아니라 제후왕의 집안에 태어나게 되며, 최소한의 기부금만 낼 경우 아이는 극도로 가난한 백성의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하면서 살게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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