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9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76)
“제아무리 일루리아라고 해도, 싸움이 끝난 직후, 지친 상태에서 이베리스가 쿠라토르를 사용하여 기습을 가한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런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가 일루리아를 도와준다면,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인 만큼 반드시 뭔가 보답을 하려고 하겠지.
어쩌면 이베리스가 그 이상한 기계를 사용한 덕분에, 우리가 일루리아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오히려 더 쉬워질 가능성도 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이베리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게 만들 수 있겠군요.”
이덴바르가 납득하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때 이스카엘은 퍼뜩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방금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스카엘이 살짝 흥분된 말투로 말하자, 이덴바르도 덩달아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당초 계획을 수정해서 이렇게 하도록 하자. 우선 이니에스에게 일루리아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는 거다.”
이덴바르는 흠칫 놀랐다.
“그건 당초 계획을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니에스도 당연히 일루리아의 명성과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 겁니다.
그러니 일루리아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네 첩보요원을 함부로 강하시키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요.
귀중한 블랙 코어의 소유자를 자칫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아예 처음부터 내 쪽에서 일루리아가 풀려났으니 첩보요원의 강하를 보류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이니에스에게 권할 셈이다.
그러면 자비의 대륙은 더 안전해지고, 이니에스는 나를 더 믿게 되지 않겠나?”
“그 대신 블랙 코어 소유자를 손에 넣겠다는 목표는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데요?
자비의 대륙이 안전해지고 이니에스가 이스카엘님을 믿게 되더라도, 그런 중요한 목표를 포기한다면, 애초부터 우리가 이런 큰 일을 벌인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아까 다소 안일했다고 자책하시더니, 설마 마음이 약해져서 당초 정한 목표를 포기하실 생각인 것입니까?”
이덴바르가 놀란 나머지 마치 다그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다소 안일했던 건 안일했던 거고, 한번 세운 계획을 이제 와서 바꾸는 건 안 될 말이지.
이니에스의 신병을 손에 넣을 것. 내가 급진파를 완전히 장악할 것. 블랙 코어의 소유자를 확보할 것. 거기다 가능하면 일루리아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것.
이상의 목표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텍스툼의 첩보요원이 이 대륙으로 강하하지 않으면 블랙 코어의 소유자를 어디서 확보한단 말씀입니까? 혹시······”
“말하는 걸 보니 자네도 짐작한 모양인데, 텍스툼의 첩보요원이 아니라 이사엘라를 대신 사로잡으면 해결된다.”
이스카엘은 비교적 자신 있게 말했지만, 이덴바르는 한층 더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텍스툼의 첩보요원 대신 이사엘라를 사로잡는다. 말이야 쉽지,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이사엘라는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자기 손으로 이 대륙을 멸망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곧 클라데스가 될 상황이 아니던가요?”
“걱정 마라. 완전히 클라데스가 되기 전에 일루리아가 막아줄 거야.”
“제가 왜 일루리아의 실력이 훌륭하다는 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사엘라도 완전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방해 받지 않고 격변 현상을 일으켜 클라데스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무슨 대비책을 준비해 놓았을 겁니다.
어쩌면 아예 함정을 파 놓았을지도 모르고요. 과연 괜찮을까요?”
이덴바르가 이렇게 걱정하는 말을 듣고도, 이스카엘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상관 없어. 이사엘라 같은 애송이가 함정을 파 놓아봤자, 결단코 일루리아의 상대는 못 될 테니까.”
“그럼, 반대로 일루리아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이사엘라가 육체의 재활용 조차 불가능 수준까지 완전히 망가지면 어쩝니까?
일루리아가 이사엘라를 저지하는데 실패해도 문제입니다만, 거꾸로 너무 철저하게 박살내도 블랙 코어를 손에 넣는다는 우리 목표는 역시 달성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걱정할 것 없어. 자네도 알다시피 일루리아는 강하지만 성격이 모질지 못해.
예전에 자신의 신세를 망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급진파의 잔당을 풀어주었고, 그 다음에는 또 순순히 붙잡혀 오늘까지 얌전히 연금되어 있지 않았나?”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일루리아라면 이사엘라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서, 아예 육체의 재활용 조차 불가능한 수준까지 심하게 박살내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가령, 팔다리가 다 잘려 나간다고 해도, 머릿속의 블랙 코어만 남는다면 우리한테는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더 안전한 연구용 소재가 되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신 말씀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막연한 추측이 아닙니까? 그런 막연한 추측을 바탕으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도박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지 않을까요?”
이덴바르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이스카엘은 이미 마음을 확실하게 정한 것 같았다.
“현 상황에서 도박이 아닌 선택지가 과연 있긴 하겠나? 괜찮다. 날 믿어라.”
“저야 예나 지금이나 이스카엘님의 판단력을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너무 걱정스러워서 자꾸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운 좋게 이사엘라가 완전히 클라데스가 되기 전에, 일루리아가 딱 적당한 정도까지만 박살 내고 어찌어찌 사건을 수습했다고 합시다.
이스카엘님께서 기대하는 최상의 결과가 나왔다고 가정하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제 10요새 주변 현장은 완전히 혼돈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네, 겨우 제압 당한 이사엘라, 한바탕 싸우느라 지친 일루리아, 거기다 일루리아를 처리하기 위해 나타난 이베리스, 그 외에도 이베리스가 얼마나 많은 부하 요원들을 데리고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과연 이베리스와 관리국 요원들을 따돌리고, 이사엘라의 육신을 연구용으로 확보한 다음, 일루리아까지 구해내서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그 여러 가지 목표를 과연 다 이룰 수 있겠습니까?”
“자네 말처럼 그렇게 혼돈 그 자체인 상황이니까, 오히려 나한테 승산이 있어. 혼란을 틈타 이사엘라와 일루리아를 데리고 도망치면 된다는 말이야.
거기다 블랙 코어를 지닌 텍스툼의 첩보요원을 제압해서 감금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대기시켜 둔 우리 쪽 요원과 장비도 활용할 수 있을 테고.”
아무래도 이스카엘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이덴바르는 다소 불안함이 남은 상태에서 여느 때처럼 복종의 뜻을 밝히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로 강한 확신이 있으시다면 언제나처럼 결정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상관에게 꼼꼼하게 조언하는 것이 도리라면, 확실하게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는 비록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따르는 것이 도리일 터.
이덴바르는 일단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부터는 계획이 성공하도록 전력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이덴바르의 그런 속마음을 잘 아는 이스카엘은,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니에스한테 연락하는 일은 내가 맡겠다. 자네는 두 가지 일을 해주면 좋겠다.”
“그 두 가지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첫째, 현재 혼란에 빠진 급진파에게 일루리아가 풀려났으니 안심하라는 소식을 전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 일루리아가 사건을 해결하고 나면 이베리스에게 도로 붙잡혀갈 것이 너무나 뻔하니, 우리가 일루리아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라.
그러면 급진파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차마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안 그러냐?”
“네,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까지처럼 간보기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 이번에는 급진파도 틀림 없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네한테 정보를 줬다는 그 기술요원 말인데, 믿을 만한 사람인가?”
이덴바르는 진지하게 듣다가 의외의 질문을 받자 약간 어리둥절해 하면서 대꾸했다.
“네, 제법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낸 믿을 만한 친구입니다.”
“그 친구의 성격은 어떤가?”
“성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말을 잘못했군. 우리가 텍스툼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도와줄 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물은 거야."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텍스툼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알면 크게 분노해서 저와 인연을 끊고도 남을 만한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듣자 이스카엘은 오히려 은근히 기뻐했다.
“그거 정말 잘 됐군. 이렇게 잘 되었을 수가 있나. 그럼, 자네가 다시 연락해서, 그 사람이 보안부를 찾아가서 자수하도록 만들게.”
이덴바르는 깜짝 놀랐다.
“네? 자수하도록 만들라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방법을 일러주지.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해서, 우리가 텍스툼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다소 과장해서 알리도록 해.
물론 우리는 다른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 텍스툼과 내통하는 척한 것일 뿐, 진심으로 내통한 건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그 친구한테는 자네와 내가 다른 꿍꿍이 없이 진심으로 텍스툼에 동조한 듯한 뉘앙스로 말해야 돼.”
이쯤 되자 이덴바르도 이스카엘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그런 다음, 곧 자비의 대륙이 텍스툼의 음모에 의해 멸망할 것이며, 우리는 텍스툼이 미리 대기시켜 놓은 첩보선을 타고 이 행성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계획이라는 사실도 알려주게.
이어서 우리와 손잡고 함께 텍스툼 편으로 귀순하면, 멸망하기 직전에 이 행성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제안을 한다면, 과연 그 친구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그 친구는 당연히 펄쩍 뛰면서 딱 잘라 거절하고 통신을 끊겠지요.
그리고 그대로 보안부에 달려가서 자기가 들은 얘기를 다 털어 놓을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스카엘과 이덴바르가 억울하게 쫓겨난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텍스툼과 내통하여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려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까지 불쌍한 나머지 몇몇 정보를 알려준 일이 뼈저리게 후회된다면서 말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야. 그렇게 하도록 해.”
이덴바르는 이스카엘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했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여기 은거해 있다는 사실은 부왕궁과 관리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당장 날 잡기 위해 여기로 많은 요원들이 몰려올 거다.
그렇게 되면 이베리스가 제 10요새에 데려갈 요원들이 아무래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나?
결과적으로 일루리아를 구하고 이사엘라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앞으로 부왕궁에서 이스카엘님에 대한 동정 여론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부왕 전하까지도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몰라요.
비록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면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자비의 대륙에 대한 애정만큼은, 이스카엘님이나 이베리스 못지 않게 큰 분이 바로 부왕 전하가 아닙니까?
어쩌면 이스카엘님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을 넘어,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왕 전하에게는 솔직히 좀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동정 여론 따위가 뭐 아깝다고 그러나?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이중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었을 거야.
부왕궁이나 관리국이 아니라, 우리만의 방식으로 자비의 대륙을 완전히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상, 어차피 언젠가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 아닌가?
그러니 동정 여론 같은 덧없는 걸 아까워하지는 말자고.”
언젠가 한번은 넘어야 할 산. 이덴바르도 그 말에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니에스가 나한테 잡혀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베리스가 나중에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다 보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내가 그 동안 얌전히 은거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는지 조만간 전부 다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가능성이 높아.
이니에스가 텍스툼의 첩자란 사실은 어쩌면 이미 관리국 보안부가 밝혀냈을지도 모르고, 거기서 좀더 조사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와의 연결 고리가 다 드러나겠지.
나중에 어차피 드러나게 될 일들을 미리 활용해서, 현재 진행 중인 사태의 추이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가 있다면, 그건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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