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39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25)

“아,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불쌍한 친구 같으니······”

이아테스는 피 웅덩이에 푹 엎어져 버린 이클리프의 시체를 보면서 깊이 탄식했다. 절반쯤 잘린 목에서는 쉴새 없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성검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플래티너스 아퀼라의 위력이라면 목을 완전히 잘라 버릴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어서 손에 약간 사정을 두었던 것이다.

물론 손에 약간 사정을 두었더라도, 한때 존경했던 상관이자 친형제나 다름 없는 친구를 자기 손으로 죽여 버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아테스의 손에서는 앞으로 오랫동안 이클리프의 피 비린내가 풍기게 될 터.

이제는 가령 역사 자료에서 절친한 친구나 형제를 손수 죽여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잔인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저는 물론이고, 어쩌면 일루리아님과 이 대륙까지 모두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요?”

이아테스가 참담한 표정으로 이클리프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을 때, 일레시아가 간신히 반쯤 몸을 일으키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마를 창대에 호되게 찍혀서 나가 떨어졌던 그녀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으며, 이마는 어느새 심하게 멍이 들었고 혹도 생겨나 있었다.

그 위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이아테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한가하게 죽은 적을 애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괜찮습니까? 일루리아님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왔습니다.”

이아테스는 얼른 일레시아의 옆으로 다가가서 장검을 바닥에 꽂아 둔 다음, 그녀를 부축해서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긴 해도 어찌어찌 견딜 만은 합니다.”

일레시아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킨 다음, 새삼 이아테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아테스 팀장이 맞죠?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요.

저 살인마가 아까 당신을 창으로 찔러서 죽였느니 어쨌느니 하고 떠들었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네요.”

“네, 일루리아님께서 절 구해주셨습니다. 거기다 크나큰 행운이 따라서 이렇게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일루리아님께서는 일레시아 요원, 당신을 잘 도와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이아테스가 하는 말을 듣고 일레시아는 기묘한 동질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두 사람은 이베리스 국장이나 관리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하는 일루리아라는 인물을 위해서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는 처지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는 한솥밥을 먹는 동료라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비록 상부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한 것이긴 하지만, 팀장과 부하들을 이런 일에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저예요. 정말 면목이 없군요. 미안합니다.”

기묘한 동료 의식을 느끼자 새삼 견딜 수 없이 죄책감이 든 일레시아는, 이아테스에게 우선 이렇게 사과부터 했다.

“당신은 그냥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거기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야죠.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아테스의 부드러운 말 덕분에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덜게 된 일레시아는, 곧 침착함을 되찾고 현 상황을 정리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본업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현재의 상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 10요새의 메인 시스템을 구성하는 생체 모듈들은, 이레니아를 제외하고 모두 이클리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상태입니다.”

일레시아가 이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핏물이 가득한 제어 캡슐을 가리키자, 이아테스도 그쪽을 힐끔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또한 이레니아는 아직까지 살아 있으며 상실자가 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만, 정신을 잃고 기절한 상태라서 구해내기가 아주 까다롭습니다.

시스템 운영 규칙상 누군가가 대신 제어 캡슐에 들어가서 생체 모듈 역할을 하지 않으면, 시스템을 셧다운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레니아를 구할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일레시아는 여기서 이번에는 메인 데이터 센터 가장 안쪽 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제어 캡슐을 가리켰다.

이레니아가 저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스템이 셧다운되면 배리어 제너레이터도 작동을 중지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이 작은 암초 안에 갇혀 있는 고에너지 고밀도의 타베스가 일시에 해방되어 멀리 퍼져나가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사엘라에게 자비의 대륙 본토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그러니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지요.”

여기까지 듣자 이아테스는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서 새삼 일레시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요새 안에서 생체 모듈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레시아밖에 없으니, 방금 그 말은 곧 그녀 자신이 제어 캡슐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당장 깨달았던 것이다.

거기다 생체 모듈 역할을 한다는 것이 골드 코어 소유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을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이아테스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대신 제어 캡슐 안으로 들어가서 생체 모듈이 될 생각입니까?”

이아테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일레시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습니까?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서 생체 모듈이 된다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아테스는 차마 그 무거운 표정에 대고 인격과 자존심 운운하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저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실질적인 문제만 거론할 따름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체 모듈이 되면 나중에 해방될 수 있을지 어떨지 지극히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제가 왜 모르겠어요?

거기다 팀장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 한 것 같습니다만, 솔직한 심정으로 저도 정말 저 안에 들어가기 싫어요.

아무리 초연하려고 해도 그게 저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을 크게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니까요.”

일레시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정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를 않는군요.

몇 번 고민하고 고민해도, 이레니아를 구하고 일루리아님을 도와드리기 위해서는 결국 이 방법뿐입니다.

제가 생체 모듈이 되어야 이레니아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함부로 꺼뜨리지 않고 세심하게 재배열하여 이사엘라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팀장이 절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일레시아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아테스는 더 이상 괜찮겠느냐고 캐묻는 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일뿐. 그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전 일레시아 요원, 당신을 도와드리려고 여기 온 것이니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아테스가 깊이 따져 묻지 않자, 일레시아는 실제로 은근히 고마움을 느꼈다.

이베리스 국장, 이스크마 비서관, 이클리프, 이그시아, 이르피오를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편안한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저는 저기 있는 제어 캡슐들 가운데 싸움에 휘말려 손상을 입지 않은 캡슐을 하나 골라서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메인 시스템에 연결하여 생체 모듈 권한을 인수한 다음, 이레니아를 해방시킬 거예요.

그 과정에서 구식 시스템을 조작해줄 사람이 있으면 훨씬 작업하기 편하니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거기서 일시적으로 시스템을 대기 상태로 만든 다음, 일단 한번 제어 캡슐 밖으로 나올 겁니다.

이레니아가 현재 들어가 있는 저 가장 커다란 캡슐에 들어가지 않으면, 처리 용량 문제로 인해 중요한 작업을 하기 어렵거든요.

예를 들어,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재배열해서 일루리아님을 도와드리는 것 같은 작업 말입니다.”

“그것도 잘 알겠습니다.”

일레시아는 이어서 한쪽 구석에 주저 앉아 있는 이그시아와 이르피오를 향해 눈짓을 하면서,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신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기 있는 팀장의 부하 두 사람도 보호가 필요합니다.

코어의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아르케의 가호가 없어져서 작은 물리적 충격에도 큰 부상을 입을 수 있거든요.

뿐만 아니라, 제 10요새 내부의 공기도 상실자를 위해 세심하게 조절되어 있지 않아요.

따라서 팀장의 부하 두 사람과 잠시 후 구출될 이레니아 등 세 사람 역시 제어 캡슐 안에 잠시 들어가 있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레시아는 여기까지 설명한 다음, 여전히 계속되는 두통과 현기증을 무릅쓰고 가장 상태가 멀쩡한 제어 캡슐을 고르기 위해서 휘청휘청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치열한 싸움의 와중에서도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나란히 놓여 있는 3개의 캡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녀는 굳이 너무 꼼꼼하게 고를 필요 없이, 그냥 그 캡슐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손상을 입지 않은 제어 캡슐이라고 해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에 들어 있는 시체들을 밖으로 빼내고 핏물을 정화시키는 사전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사전 작업은 일레시아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이아테스가 옆에서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이클리프에 의해 목숨을 잃은 생체 모듈 세 명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제어 캡슐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좀더 정중하게 예우를 갖춰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저 한쪽 구석에 나란히 눕혀 놓기로 했다.

세 명 모두 정확히 심장에 창으로 일격을 당한 채 죽어 있었으며,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피로 인해 제어 캡슐 안의 특수한 배양액은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였다.

“음,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데······”

일레시아는 특수 배양액을 어떻게 정화하면 좋을지 잠시 난처해 했다.

상실자가 된 이그시아와 이르피오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보호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들어갈 캡슐의 경우에는 굳이 핏물로 오염된 배양액을 정화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오염된 배양액을 모조리 빼낸 다음, 텅 빈 캡슐 안에 두 사람을 집어 넣고 뚜껑을 닫으면 끝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제어 캡슐 안에서 다소 역한 피비린내가 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요새 메인 시스템의 생체 모듈을 위해 준비된 제어 캡슐인지라, 기본적인 공기 정화 장치와 생명 유지 장치는 잘 갖춰져 있었다.

조금 지나면 자체 정화 장치에 의해 피비린내가 사라지고 견딜 만 하게 될 터.

상실자가 된 두 사람으로서는 무방비 상태로 메인 데이터 센터 한쪽에 마냥 주저 앉아 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쪽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일레시아가 일시적으로 들어가서 이레니아를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캡슐이었다.

제어 캡슐의 특수 배양액은 배양 캡슐이나 의료용 캡슐의 배양액과는 다소 성분이 달랐다.

배양액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신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건 기본적으로 동일했지만, 제어 캡슐용의 경우에는 골드 아르케의 전도성을 높이기 위한 전해액이 추가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특별한 전해액 덕분에 생체 모듈의 몸에 굳이 전극이나 전선 따위를 지저분하게 연결하지 않아도, 그저 배양액 안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 골드 아르케를 이용하여 정보 통신이 가능했다.

특별한 전해액이 포함된 특수 배양액은 아무래도 훨씬 비싸고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관리국 규정상 오염되더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캡슐 자체의 정화 장치를 이용해서 최대한 알뜰살뜰하게 재활용하도록 정해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이 제어 캡슐에도 특수 전해 배양액을 정화할 수 있는 장치가 당연히 장착되어 있었다.

문제는 핏물의 오염이 워낙 심해서 배양액이 완전히 정화될 때까지 최소한 1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지 몰라도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거기다 핏물 정화는 그저 기분이 찝찝하고 어쩌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골드 아르케의 원활한 전도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일레시아가 꾹 참고 그냥 핏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문제였다.

당연히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예 배양액을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요새에도 틀림없이 예비 배양액이 있을 텐데요?”

일레시아가 핏물로 오염된 배양액을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이아테스가 옆에서 이렇게 물었다.

작가의말

사전에 공지 드린 바와 같이, 2023년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휴재하면서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다음편은 5월 5일 오후 8시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