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24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10)
현재 일루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5개의 코어는, 이크루아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세심하게 교정을 해준 덕분에 깔끔하고 아름다운 피라미드 형태로 잘 배열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 배열의 맨 위쪽 정점에는, 아주 오래 전, 아직 구인류가 지배하던 제 1지구에서 일루리아가 난생 처음으로 각성한 레드 코어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코어는 나머지 4개의 코어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전체적인 힘을 제어하는 리더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은하계의 학자들은 이런 코어를 흔히 ‘프라임 코어’라고 불렀다.
또한 그 프라임 코어의 아래쪽에는 2개의 화이트 코어와 2개의 레드 코어가 피라미드 밑바닥의 정사각형을 이루면서 배열되어 있었다.
일루리아가 머리에 쓴 보관과 손목의 팔찌, 발목의 발찌는, 이와 같은 입체적인 코어 배열에 대응하여 동조화되었다.
다시 말해, 머리에 쓴 보관에 박힌 결정체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프라임 코어와 동조되어 강렬한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왼쪽 손목에 찬 팔찌와 왼쪽 발목에 찬 발찌의 결정체는 각각 화이트 코어와 동조되어 마치 내부에 구름이나 안개가 낀 것처럼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또한 오른쪽 손목에 찬 팔찌와 오른쪽 발목에 찬 발찌의 결정체는 각각 레드 코어와 동조되어 뜨거운 붉은빛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동조화 작업까지 전부 마무리되자, 일단 갑옷 착용과 방어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 상태에서 일루리아가 아까 바이크 동체에 부착된 칼집에 꽂아두었던 대검을 쑥 뽑아내자, 기본적인 전투 준비는 사실상 모두 완료되었다.
이크루아가 사전에 꼼꼼하게 업그레이드하고 정비해둔 덕분에, 장비의 상태나 동조화 등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만, 아직도 일루리아의 부상이 완전히 나은 게 아니라는 점은 큰 문제였다.
물론 자가 치유 속도 자체는 아까에 비해 월등히 빨라진 상태이긴 했다.
코어의 배열이 교정되고, 방어구와 동조화가 완료되었으며, 거기다 클리엔스 둘의 보조까지 받고 있었기 때문에, 5개의 코어가 가장 이상적인 환경에서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에 상당히 근접한 수준까지 출력이 상승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관통상이 완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때 정면에서 이사엘라가 무슨 꿍꿍이인지 또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 팔을 휘두르는 것 같은 평범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그 대신 거대한 머리 부분에서, 마치 토사물처럼 보이는 시커멓고 질척질척한 덩어리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아무래도 이형성체 몇과 실체화된 타베스가 뒤섞여서 만들어진 혼합물인 듯했다.
바이크가 알아서 그것을 살짝 피하는 동안, 일루리아는 상대방의 의도가 얼른 짐작되지 않아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얘가 왜 갑자기 구토 공격을?”
물론 방금 그건 절대로 그냥 평범한 구토 공격이 아니었다.
문제의 검은 혼합물은 밀도가 높은 타베스의 덩어리였기 때문에, 이사엘라의 입에서 일루리아의 바이크가 있는 지점까지 날아오는 동안 허공을 지나면서 뚜렷한 타베스의 궤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궤적을 일종의 도파관으로 삼아서, 곧이어 허공 중에 약한 타베스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이게 뜻하는 바는 설마?
“너 지금 타베스로 빔을 만들어서 쏘려는 거로구나.”
일루리아는 그제서야 이사엘라의 의도를 짐작하고 얼른 도파관 밖으로 피하려고 했다.
오래 전, 제 1지구의 대기권 내에서 공기의 방해로 인해 구식 빔 무기가 제대로 사용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한 원리로, 타베스를 한쪽 방향으로 집중해서 방출하는 방식의 빔 무기 또한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사용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기권 내 평범한 공기야 당연히 아무런 방해 요소가 되지 못하겠지만, 그 대신 은하계 공간이라면 어디에나 퍼져 있는 아르케의 방해를 받아서 구식 빔 무기처럼 위력이 크게 감소하는 건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 이런 식으로 표적까지 일종의 도파관을 형성한 다음, 그 도파관을 따라서 약한 타베스의 흐름을 먼저 만들어 놓고, 다시 그 흐름을 유도 신호 삼아서 빔을 발사한다면, 일시적으로나마 아르케의 방해 없이 최대한의 효율로 표적을 타격할 수 있을 터였다.
굳이 말하자면, 도파관은 험준한 산에 뚫린 터널, 타베스의 흐름은 레일, 그리고 타베스 빔은 그 레일 위를 달려 터널 속을 통과하는 기차에 비유할 수 있었다.
이사엘라도 어쨌든 관리국 요원이었으니 기본적인 전투 훈련은 받았겠지만,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타베스를 이용한 빔 무기를 설계하고 사용하는 교육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 타베스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이론만 가지고, 자신의 거대화된 육체를 적절히 개조하여 타베스 빔을 만들어내는 요령을 순식간에 터득했다는 것은 정말 비범한 응용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일루리아는 다급한 와중에서도 새삼 아까운 인재라면서 혀를 찼다.
동시에 이사엘라가 만약 과거에 제대로 된 전술 훈련을 받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자칫 자신도 막을 재간이 없어서 오늘 자비의 대륙이 진짜로 멸망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허공 중의 아르케를 밀어내어 도파관을 만든 다음, 그 도파관을 따라서 빔을 발사하는 식의 단계적인 공격 방법은, 지나치게 느리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예 꼼짝 못하게 묶여 있지 않은 다음에야, 자신에게 빔 공격을 가하기 위해 허공 중에 도파관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뻔히 보면서 손 놓고 구경만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원래대로라면 이건 기병을 투석기로 공격한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일루리아도 당연히 잽싸게 자신을 노리고 형성된 도파관 밖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사엘라처럼 똑똑한 아이가 그냥 피해버리면 그걸로 끝인 공격을 시도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퍼뜩 짚이는 것이 있어서 힐끔 등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3개의 배리어 제너레이터 가운데 하나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일루리아가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빔을 그냥 피했다가는, 틀림없이 저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그녀 대신 빔에 맞아서 박살이 나고 말 터였다.
“아하, 역시 저 애가 머리를 쓴 거로구나. 내가 아니라 저걸 노리는 거였네.”
일루리아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솔직히 말해, 지금 저 배리어 제너레이터는 아주 얄미운 존재였다.
타베스를 멀찌감치 밀어낸다는 원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으로 이용당해서 외부에서 유입된 타베스를 바위산 정상으로 집중시켜주는 중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이사엘라가 막대한 양의 타베스를 공급 받을 수 있었으니 당연히 무척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저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아무 대책 없이 덜컥 파괴해 버리는 건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사엘라가 이 암초에서 자유롭게 빠져나갈 수 있게 될 터이며, 그녀는 곧장 자비의 대륙 본토로 향할 것이 뻔했다.
따라서 무슨 다른 대안을 찾을 때까지는 일단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야만 했다.
“오래간만에 우리 같이 힘 좀 써볼까, 준비 됐냐?”
일루리아는 양손으로 대검을 단단히 움켜쥔 채 바이크를 밟고 우뚝 서면서, 입으로는 그 대검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대검은 레드 코어를 1개 지닌 부엉이 클리엔스를 기계화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피어싱 아울.
어둠을 가르고 날아다니면서 밤 하늘을 지배하는 부엉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붙여진, 그 클리엔스의 별명이었다.
가장 최근에 길들여진 클리엔스였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아까 이아테스에게 밀려준 플래티너스 아퀼라가 누나이고, 피어싱 아울은 이 가족의 막내 동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뭐가 불만인데?”
일루리아는 전투 태세를 취하다 말고, 이 말썽 많은 막내가 어쩐지 심기가 편치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멈칫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미리미리 이런 문제를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나중에 진짜 결정적인 순간에 큰 실수가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일루리아는 막내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오래잖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클리엔스가 말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클리엔스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아르케의 흐름을 잘 읽어보면 그 감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법.
그건 이 부엉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루리아가 아르케의 흐름을 읽어본 결과, 아무래도 이 막내는, 자신이 아니라 독수리 클리엔스 장검, 즉, 플래티너스 아퀼라를 이아테스에게 통 크게 빌려준 것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했다.
자신을 미덥지 못하게 여겨서 빌려주지 않은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면서, 아까 이아테스 앞에서 일루리아가 잠깐 자신을 뽑아서 보여줬을 때부터 몹시 섭섭한 마음을 품어 왔던 것 같았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냐?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이클리프란 자의 허를 찌르기 위한 작전이라니까.
거기다 넌 그렇게 나랑 같이 있기가 싫은 거냐?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면, 잔말 말고 싸울 준비나 해라. 만약 내가 너를 못 믿었으면 저렇게 위험한 적을 상대하는데 굳이 너를 남게 했겠냐?”
다행히도 차분하게 타이르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부엉이 클리엔스 대검은 오래잖아 불편한 심기를 진정시켰다.
그러자 아르케의 흐름 또한 크게 안정되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얘를 이아테스한테 안 보낸 거지.
누나 쪽은 성격이 까다롭긴 해도 말귀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데, 동생 쪽은 아직 훈육이 덜 되어서 그런지 툭하면 토라질 뿐만 아니라, 한번 토라졌다간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달랠 수가 없다니까.’
일루리아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전투 태세를 갖추자, 곧 이사엘라의 커다란 머리 부분의 한가운데쯤이 둥글게 열리면서, 그 안에서 잔뜩 충전되어 있던 타베스의 빔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어느새 이사엘라가 자신의 거대한 육신 내부를 일종의 빔 발생 장치로 개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바위산 정상에 집중된 막대한 양의 타베스를 흡수한 다음, 그것을 거대한 육신 내부에서 ‘가열’하여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였다.
그런 식으로 이사엘라의 내부에 잔뜩 충전되어 있던 타베스, 그것도 크게 활성화된 대량의 고에너지 고밀도의 타베스가, 사전에 만들어진 도파관을 따라서 무서운 기세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 방향으로 집중해서 몰려오는 검은 기운. 이게 바로 소위 말하는 타베스 빔이었다.
그 시커먼 빔을 정면에서 마주보는 건 제아무리 일루리아라고 해도 긴장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응용력을 발휘한 건 대단하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어. 집속력이 너무 약해.”
일루리아는 스스로의 긴장을 떨쳐버리기 위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피어싱 아울 대검을 붙잡고 팔을 쭉 뻗어 앞으로 내민 다음, 거기에 막대한 양의 레드 아르케를 집중시켰다.
그것은 자신은 물론 현재 발을 딛고 서 있는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의 코어까지 총동원하여 만들어낸 레드 아르케였다.
그런 다음 오른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던 대검의 손잡이를 느슨하게 고쳐 쥔 다음, 다시 왼손을 이용하여 화이트 아르케를 집중시킴으로써 대검을 빙글빙글 고속으로 회전하게 만들었다.
대검은 이제 레드 아르케에 의해 뜨겁게 가열된 상태에서, 화이트 아르케에 의해 빠르게 회전하는 일종의 드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레드 아르케가 집중된 일루리아의 오른손 안에 느슨하게 쥐어진 대검의 손잡이와 대검의 끝부분을 잇는 선이 회전축이었다.
그리고 그 회전 대검의 끝부분은 곧이어 무서운 기세로 밀려온 고밀도 고에너지 타베스의 흐름, 다시 말해, 타베스 빔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순간 붉은 기운, 하얀 기운, 그리고 검은 기운이, 일루리아가 서 있는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의 바로 앞쪽의 하늘 높은 곳에서 서로 거칠게 뒤엉키면서 한바탕 눈부신 장관을 연출했다.
타베스 빔의 기세는 실로 막강했지만,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 빔을 정면에서 전부 소멸시켜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집속력을 흐트러뜨리고 위력을 줄인 다음 사방으로 넓게 확산시킴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뒤쪽에 위치한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일루리아가 기대한 바와 같이, 드릴처럼 회전하는 대검은 무서운 기세로 밀려온 타베스 빔의 집속력을 어렵지 않게 약화시켰다.
일단 빔의 집속력이 약화되자, 무서운 기세로 밀려온 대량의 타베스는 더 이상 한 방향으로 안정적으로 집중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타베스는 회전하는 대검 주변에서 뜨겁게 소용돌이 치는 아르케의 거센 흐름에 휘말려 들었다.
최종적으로 일부 타베스는 레드 아르케의 힘에 의해 소멸되었으며, 나머지는 화이트 아르케의 힘에 의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