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94화: 아들들의 전쟁 (25)

작전이 성공하면 카를로만이 모든 공적을 차지하고, 작전이 실패하면 카르스덴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카를로만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

카를로만은 그와 같은 크로키의 모함을 도저히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입 닥쳐라! 손해 볼 일이 없다니? 내가 방금 작전이 실패했는데도 뻔뻔스럽게 살아 돌아온다면 모든 부족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날 처형해 달라고 형님께 분명히 말씀 드리지 않았느냐?”

카를로만이 전에 없이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로키는 실실 쪼개면서 빈정거릴 뿐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말씀만 그렇게 하신 거지요. 실제로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친동생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실 수 있기나 하겠습니까?

부족 대표들로부터 동생을 죽인 잔인한 형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저 형식적인 처벌만 받고 끝날 게 뻔하지요.

영리하신 카를로만 왕자님께서는 순간적으로 거기까지 다 계산하고 이해득실을 전부 따진 다음에 3천 병력을 달라는 말씀을 꺼내신 게 아닙니까?”

크로키가 계속해서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다 못한 칼마르가 나서서 꾸짖었다.

“이 독사 같은 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네 놈이 감히 두 분 형제를 이간질하려는 거냐?”

엊그제까지만 해도 칼마르에게 다소 양보하는 태도를 취했던 크로키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배짱이 생겼는지 싸늘하게 웃으면서 역시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의심을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그게 단순히 두 분 형제를 이간질하는 소리로만 들리셨다면, 그건 칼마르님의 마음이 이미 어느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쯤 되자 당연히 칼마르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 지는 바람에, 적 기병대의 출현을 보고하러 왔던 프리트만은 그저 영문을 몰라서 당황해 할 뿐이었다.

“모두 진정해라.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작전을 논의하는 중이니, 일일이 말 한마디마다 트집을 잡으면서 서로 감정적으로 말다툼을 벌일 필요는 없다.”

지금껏 말싸움을 지켜보기만 하던 카르스덴이 마침내 입을 열어서 말했다.

그 바람에 카를로만과 칼마르 모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크로키는 씩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자신이 아무리 카를로만과 칼마르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여도 카르스덴이 적당히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생긴 모양이었다.

카르스덴이 말을 계속했다.

“먼저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나는 내 동생이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 3천 병력을 달라고 제안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난 동생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니 더 이상 엉뚱한 소리는 하지 마라. 알겠느냐?”

카르스덴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물론 경험 많은 칼마르는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형님.”

카를로만도 어렴풋이 불길한 낌새를 느끼기는 했지만, 일단 논란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형에게 순순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스덴이 이어서 말했다.

“카를로만, 너는 내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이다.

아직 페레이즈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너한테 정예병 3천 명을 주어 북동쪽 언덕으로 파견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도박이라고 본다.

그런 위험한 도박에서 승리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도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 너는 좀 기다리도록 해라.

나중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공을 세우고 왕국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알겠습니다.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카를로만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형에게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나타냈다. 카르스덴이 계속해서 말했다.

“다만, 그렇다고 페레이즈가 파견한 선발대가 북동쪽 언덕에서 편하게 진영을 건설하도록 그냥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프리트만을 파견해서 진영 건설을 방해하고 싶다.”

급한 보고를 하러 왔다가 갑작스럽게 공격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프리트만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 또한 충성스러운 케르비오 족의 전사였기 때문에 즉시 자세를 바로 하면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왕자님, 좀더 구체적인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제가 그 명령을 충실하게 받들어 북동쪽 언덕을 공격하겠습니다.”

카르스덴도 한층 더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

“프리트만, 아버님께 말씀 드려서 자네 부족에서 정예병 500명을 선발해라.

그리고 자네가 직접 그 500명을 지휘하여 북서쪽에 나타난 적 기병대의 시선을 피해 성채 동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다음 곧장 북동쪽 언덕으로 가라.

그곳에서는 페레이즈가 파견한 선발대 100명이 진영 건설 공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기본적인 방어 시설의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하니 너무 무리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다.

신중하게 적의 상황을 살피고, 다른 놈들과 따로 떨어져서 나무를 벤다거나 함정을 파는 등의 작업을 하는 적병을 골라서 노려라.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쌓아 놓은 곳에 불을 질러도 좋을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적당히 공사를 방해한 다음에는 무리하지 말고 철수해라. 알겠느냐?”

프리트만은 머리를 깊이 숙여서 명령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적을 괴롭혀서 작지만 확실한 전과를 올리라는 말씀이로군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카르스덴은 프리트만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음을 알고 무척 흐뭇해 했다.

프리트만이 당장 출진 준비를 하기 위해 집무실을 떠나자, 카르스덴은 다시 칼마르를 돌아보면서 다른 명령을 내렸다.

“칼마르, 만약을 대비하여 성 안에 있는 각 부족 대표들에게 경계 태세를 갖추라고 전하시오.

나는 북동쪽 언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좀더 지켜본 다음, 오늘 오후쯤에 작전 회의를 열 계획이오. 그 회의에 다들 빠짐 없이 참석하라는 말도 전하시오.

그 작전 회의에서 페레이즈와 정면 대결을 벌일 구체적인 작전을 논의할 것이오.”

칼마르도 군말 없이 명령을 받았다. 카르스덴은 마지막으로 카를로만에게 말했다.

“너 또한 네 숙소에서 직속 부하들과 함께 경계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다가, 별 일이 없으면 오후에 열리는 작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라.

혹시 네가 나서야 할 일이 생긴다면 내가 전령을 보내서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 말을 듣고 카를로만이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는 성채 북쪽 성벽 위에서 켄다 부족과 함께 대기하고 싶습니다.

북서쪽에 나타난 적 기병대의 움직임과 북동쪽 언덕에서 벌어지게 될 싸움을 지켜보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카를로만은 혹시나 형이 이 부탁마저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카르스덴은 굳이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정히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다만, 성채 북쪽의 책임자는 켄다 부족의 프라티온 부족장이다.

북쪽 성벽 위에서 대기하려면 그 분의 지시를 잘 따르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입니다. 프라티온 부족장님은 평소부터 존경해 온 분이니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를로만은 다시 한번 형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칼마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서 몇 걸음 걷자마자 카를로만이 한숨을 쉬면서 칼마르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형님이 겨우 500명을 북동쪽 언덕으로 파견한 건 별로 좋은 판단 같지가 않습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안될 게 뻔해요.

적을 빠른 시간 내에 박살내서 언덕을 장악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고, 만일의 사태가 생겼을 때 신속하게 철수하기에는 좀 많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마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카를로만에게 손을 내저었다.

“카를로만 왕자님, 그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입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옳다는 확신이 있어도 형님의 뜻을 거스르는 의견을 함부로 입밖에 내시면 안됩니다.

오후에 열리는 작전 회의에서는 방금 그 말씀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아예 입도 벙긋하지 마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전 어디까지나 형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드리고자 솔직한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카를로만이 어리둥절해 하면서 말했다. 칼마르는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방금 전에 형님의 말투에서 이상한 느낌을 못 받으셨습니까? 왕자님께서는 아직 젊으셔서 그런 부분에서는 좀 둔하시군요.

대놓고 말씀 드리자면, 형님께서 왕자님을 의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카를로만은 깜짝 놀라서 칼마르를 붙잡고 따지듯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형님이 저를 의심한다니······

제가 가끔 형님과 다른 의견을 내놓고 토론을 벌이긴 했지만, 그건 전부 형님을 위한 충성심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님과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다투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화해한 적도 많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크게 의심 받을 짓을 했다는 겁니까?”

“저야 왕자님의 충성심을 잘 압니다만, 세상 일은 그렇게 만만하고 쉽게 돌아가질 않는 법니다.

크로키, 그 독사 같은 놈이 이미 형님의 마음 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어 놓은 듯합니다.

저도 정말 멍청했지요. 오늘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크로키를 카르스덴 왕자님 곁에서 떼어 놓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까 보니 때가 늦은 것 같더군요. 크로키는 이미 형님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은 게 분명합니다.”

칼마르의 말을 듣자 카를로만은 퍼뜩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새삼 이를 갈면서 크로키를 욕했다.

“크로키, 이 나쁜 놈! 어쩐지 그 놈이 자꾸만 나한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데 형님이 가만 구경만 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형님이 그저 한 집단의 지도자로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토론에서 공정하게 중립을 지키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놈의 독사 같은 혀에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던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나마 아직은 크로키가 심어 놓은 의심의 씨앗이 살짝 싹을 틔우려고만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를로만 왕자님께서 앞으로 언행을 조심하지 않으시면 그 싹이 완전히 자라서 거대한 불신의 나무가 되고 말 겁니다.

그러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니 억울하시더라도 당분간 자중하십시오.”

카를로만은 칼마르의 설명을 듣고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역사책에서나 보던, 형에게 의심 받는 유능한 동생의 사례가 자신에게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억울할 따름이었다.

“알겠습니다. 자중하고 있다 보면 언젠가 형님의 의심도 사라지겠지요.”

“현명하십니다. 앞으로는 크로키 놈이 시비를 걸더라도 최대한 무시하십시오. 이미 형님께서는 그 자를 크게 신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독사 같은 놈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 갈수록 점점 더 무례하게 굴겠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독사 같은 놈과 입씨름을 해 봐야 괜히 형님께 의심 받을 빌미만 더 제공할 뿐입니다. 그냥 무시하시는 게 상책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카를로만은 길게 탄식을 하면서 거기서 일단 칼마르와 헤어져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그는 숙소에서 자신의 무기와 갑옷을 챙긴 다음, 숙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파로크 성채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 높은 성벽 위에서 프라티온 부족장과 함께 사태의 추이를 관망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한편, 파로크 성채의 북동쪽 언덕에서 100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진영 건설 공사를 하던 카시우트는,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이를 갈면서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여러 조로 나누어 나무 베기, 자재 운반, 함정 파기, 진영 건설 등 여러 가지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조별로 돌아가면서 작업과 휴식을 반복하도록 조치했다.

물론 병사들은 휴식하는 동안 가만 앉아서 노는 것이 아니라, 어둠 컴컴한 밤중에 사방팔방을 경계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만 했다.

거기에 더해서, 카시우트는 힘센 병사 10명을 뽑아 만약 적이 나타나면 신속하게 달려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이렇게 카시우트가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을 때, 야음을 틈타 케르비오 족의 정찰병이 언덕을 염탐하러 왔다.

그는 적의 다짜고짜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더라도 북동쪽 언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찰병 몇 명쯤은 반드시 보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눈에 불을 켜고 어둠 속에서 감각을 총동원하여 서쪽에 있는 파로크 성채 방면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으려니까, 칼마르가 2명씩 짝지어 보낸 정찰병 가운데 1명이 실수로 작은 소리를 내는 바람에 그의 꼼꼼한 감시에 걸려들고 말았다.

카시우트는 수상한 소리를 듣자마자 당장 미리 대기 시켜 놓은 병사들을 파견했고, 그 정찰병은 물론 함께 있던 그의 동료까지 순식간에 발견되어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