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29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15)

“어리석은 것! 전설의 영웅 좋아하네! 너도 결국 이 나약한 소녀와 다를 바 없이 정말 어리석구나!”

일루리아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순간, 그토록 생생하게 보였던 성녀 에클레시아의 환각은 마치 거짓말처럼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여전히 일루리아의 품 안에 안긴 채 목을 움켜쥐고 있는 이사엘라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보다 훨씬 분노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더 이상 은총도 기회도 없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들은 우주의 근본 원리를 깨우칠 자격이 없단 말이다.

그러니 무지와 무식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 채, 이 작고 하찮은 은하계 안에 있는 더 작고 하찮은 땅에서 조용히 잠들도록 해라. 다른 수많은 어리석은 존재들과 함께.”

그냥 해보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었다. 곧이어 일루리아와 이사엘라의 주변에서 검은색으로 물든 뜨거운 바람이 강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암초 주변에 배치된 3개의 배리어 제너레이터 덕분에 여전히 그들이 있는 일대에는 타베스가 충분히 공급되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일루리아가 가진 코어 5개 가운데 4개가 이사엘라의 통제를 받고 있기까지 한 상태였다. 따라서 단순 계산으로 이사엘라는 불완전하게나마 코어 8개를 사용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 코어 가운데 블랙 코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타베스와 소통할 수 있으며, 아르케와 타베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블랙 코어를 매개체로 하여, 도합 8개의 코어가 지닌 아르케의 힘이 타베스의 힘과 어떤 식으로든 결합하게 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대륙이나 행성 규모의 클라데스가 완성되는 걸까? 아니면 클라데스가 아닌 또 다른 미지의 대재앙이 일어나게 될까? 일루리아로서는 몹시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절대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코어 4개의 제어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런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빨리 이놈의 정신 공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벗어난다지? 일루리아는 그저 답답하고 또 답답할 뿐이었다.

지금은 벗어나기는커녕 계속되는 정신 공격으로부터 프라임 코어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사엘라가 집요하게 가해오던 정신 공격의 강도가 뚜렷하게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문자 그대로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일루리아가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이사엘라쪽은 정반대로 지극히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재배열되고 있구나······”

이사엘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일루리아는 문득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곧이어 그녀도 피부의 감각으로 어렴풋이 암초 주변의 에너지 장벽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대략 산들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정도의 감각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레니아를 구하러 간 일레시아가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재배열하는 작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작업이 잘 된다면, 배리어 제너레이터는 더 이상 외부에서 유입되는 타베스를 암초 정상 부근에 집중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타베스를 외부로 밀어내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겠지.

현재 암초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3개의 배리어 제너레이터는, 원래 에너지 장벽을 생성하여 이 행성의 나머지 지역을 거의 다 뒤덮고 있는 타베스가 자비의 대륙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먼 바다에서 차단하는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타베스를 외부로 밀어내는 용도로 쓰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일시적으로나마 이사엘라에게 이용 당하여 거꾸로 포집기처럼 타베스를 모아 들여 암초 중앙부의 바위산 정상에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덕분에 외부에서 유입된 타베스가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암초 주변에만 밀집해 있었던 것은 의외로 나쁘지 않은 현상이었다.

만약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포집기 역할을 하지 않고, 단순히 에너지 장벽만 내려간 상태였다면, 타베스는 침몰한 유조선에서 새어나간 기름이 퍼지듯이 지금쯤 바다를 건너 자비의 대륙 가까이까지 확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확산 정도가 심하다면, 설령 나중에 에너지 장벽이 복구된다고 해도, 그때까지 내부로 유입되고 확산된 타베스만으로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이사엘라가 스스로 클라데스가 되기 위해 타베스를 암초에 잘 모아둔 덕분에 멀리까지 확산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거기다 포집기 역할을 하는 에너지 장벽은 이사엘라가 대륙 본토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의외의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해도, 계속 이런 식으로 타베스가 이사엘라에게 무한정 공급되는 건 당연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타베스의 공급이 끝나게 된 셈이었다.

배리어 제너레이터는 느릿느릿 원래 있었던 곳으로 이동하면서, 아주 섬세하게 암초 주변에 밀집된 타베스를 최대한 끌어 모아서 밖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타베스를 밀어내면서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 잘 된 일이었다. 하지만 일레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게 썩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저렇게 고도의 섬세함과 꼼꼼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능 좋은 제어 모듈이 필요하니, 틀림없이 이레니아 대신 일레시아가 요새 메인 시스템 제어 모듈이 되어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중노동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일레시아······”

일루리아는 지금 이 순간 캡슐 안에 갇혀서 생체 모듈 노릇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한 일레시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 불쌍한 것 같으니!

골드 코어를 지닌 사람들이 가장 비천하게 여기는 일이 바로 캡슐 속에 갇혀서 시스템을 제어하는 생체 모듈 노릇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직업이나 업무라기 보다,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노역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곤 할 정도다.

그런데 그 착하고 재능 넘치는 아이가 그런 비천한 일을 기꺼이 하고 있단 말인가?

일루리아의 생각으로는, 만약 오직 이레니아를 구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일레시아가 굳이 제어 모듈 역할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아마도 지금 상황에서는 배리어 제너레이터를 재배열하여 타베스의 공급을 끊지 않으면 이사엘라를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일루리아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굳이 생체 모듈이 되기로 한 것이 틀림없었다.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 아이가 저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명색이 전설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내가 여기서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지.’

일루리아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하여 손을 움직여 여전히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이사엘라를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지금처럼 여전히 정신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으며, 나름대로 정신적 사투가 필요한 일이었다.

“배리어 제너레이터가 재배열된다고 해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어림 없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사엘라 또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이제 타베스의 공급이 끊어지게 된 상황에서, 그녀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루리아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뭘 할 수 있는지는 나중 문제이고, 기껏 정신 공격을 통해 손에 넣은 도합 8개의 코어 통제권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이번에는 하늘 높은 곳에서 어떤 새하얀 물체 하나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체는 암초 중앙의 바위산 정상부가 붕괴하면서 생긴 이곳 함몰 지형 상공까지 날아오더니, 거기서 거의 직각에 가깝게 뚝 떨어지면서 급강하를 시작했다.

“돌아왔구나!”

일루리아는 힐끔 위쪽을 바라보자마자 대번에 그 물체의 정체를 알아보고 크게 반가워했다.

곧이어 문제의 비행 물체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계속 정신 공격을 하고 있던 이사엘라의 몸통을 마치 화살처럼 정확히 관통했다.

그건 바로 아까 이아테스에게 빌려주었던 일루리아의 장검, 즉, 플래티너스 아퀼라였다.

손잡이에 장착되어 있는 독수리 클리엔스의 화이트 코어 덕분에, 이 장검은 공중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어느 정도 방향을 바꿀 수가 있었다.

거기다 일루리아를 따라서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무기였기 때문에 판단력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자기 주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이사엘라를 노리고 급강하하여 정확히 관통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다만, 그게 정말 섬뜩할 정도로 아슬아슬해서, 일루리아는 하마터면 코를 잘릴 뻔했을 정도였다.

이사엘라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상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장검에 명치 부근을 관통 당한 탓에, 내내 악착 같이 버티고 있던 일루리아의 품에서 결국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일루리아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음은 물론, 머리를 어지럽게 휘감았던 검은색의 섬유 다발 또한 그 와중에 모조리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편,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 일레시아가 들어간 요새 내부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이그시아와 이르피오가 매정하게 도움을 거절하는 바람에 잔뜩 속상해서 비밀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달려온 일레시아는, 그래도 혹시나 그들이 자신을 도우러 올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미련 때문에 중간중간에 이정표가 될 만한 돌탑을 급하게 몇 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일레시아는 비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구식 태블릿으로 인식 장치를 해킹하여, 거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그 태블릿을 밖으로 던져 놓았다.

해킹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방금 전에 도망친 이클리프가 그 인식 장치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인증하고 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했을 테니까.

따라서 일레시아는 그저 인식 장치를 속여서 직전에 이루어진 인증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동일하게 반복된 것처럼 믿게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엘리베이터는 요새 시설 내부에서 이클리프가 직전에 내렸던 장소와 동일한 곳에 멈춰서 그녀를 내려줄 터였다.

만약 이그시아와 이르피오가 뒤늦게 마음을 고쳐 먹고 자신을 쫓아온다면 반드시 엘리베이터 문 밖에 떨어져 있는 저 구식 태블릿을 발견하게 될 터.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그것을 인식 장치에 연결하기만 하면, 해킹 프로그램이 한번 더 작동하여, 마찬가지로 이클리프의 인증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클리프와 일레시아 자신이 내린 곳까지 내려올 수가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일레시아의 가장 심각한 걱정거리는 바로 이클리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속으로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직전에 입력된 이클리프의 인증과 행선지를 반복 입력하여 인식 장치를 속이는 해킹 프로그램의 원리상, 이제부터 도착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가 있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 미친 사람과 마주친다면, 전투요원이 아니라서 정신 공격 이외에는 아무런 싸울 수단이 없는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그를 상대하면 좋단 말인가?

일레시아로서는 이클리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문자 그대로 전무했다.

아까는 기습적으로 정신 공격을 가해서 운 좋게 쫓아버릴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설마 같은 수법에 두 번씩이나 당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아까 일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화가 잔뜩 나 있을 것이며, 마주치면 절대로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자칫 이레니아를 구하기도 전에 이클리프에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몹시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겁을 집어 먹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문이 열렸기 때문에,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용감하게 문밖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그곳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어둠 컴컴한 복도였다. 동력이 거의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복도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맨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무척 오싹한 기분이었다.

저기 뭔가 있다!

일레시아는 몇 걸음 복도를 걷다 말고 퍼뜩 섬뜩한 느낌이 들어서 멈춰 섰다. 앞쪽 복도에서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굉장히 작아서 이클리프는 물론이고 아예 사람 같지도 않은 물체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움직이는 뭔가와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뭔가의 정체를 알아보는 순간, 긴장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대신 놀라움과 반가움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