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11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97)
이제 이사엘라의 신체와 그녀 주변에 밀집한 이형성체는 타베스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수백 가닥 이상의 흑색 섬유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섬유 가닥은 처음에는 잘 알아보기도 힘든 희미한 선에 불과했지만,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실체화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정보 교환도 급격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하여 더 구체적이고 더 분명한 의식 정보가 사방팔방의 이형성체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그녀도 그들의 생각을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너희들도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러운 거로구나 그렇지?]
이형성체 자체는 원래 아무런 의식의 지향성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고 가만 내버려두면 실질적으로 식물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타베스를 매개체로 그들과 연결된 이사엘라는, 마치 키우는 꽃의 기분을 이해하는 듯한 심정으로, 수많은 이형성체들의 잠재 의식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강렬한 분노와 원망을 똑똑하게 인지할 수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저들도 원래는 각자 다양한 꿈을 지니고 있었을 젊은 병사들이 아닌가?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권력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 나왔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적군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이라는 명예를 선사한 다음, 정작 자신들은 시체가 되어 깊은 바닷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당연히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을 리 만무했다.
이사엘라는 저들의 원망과 분노를 통해 이 대륙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자비의 대륙은 선천적으로 코어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주겠다는 취지로 운영되는 보호 시설.
그런 보호 시설이 오히려 이렇게 많은 원망과 분노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이 대륙에 거주하는 보호 당사자들이 원망과 분노에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이 더 많은 원망과 분노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수많은 요원들의 희생해야 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이런 짓을 도대체 왜 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왜 시작되어야만 했단 말인가?
[이와 같은 부조리가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시 이 우주에 아르케라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임이 분명해.
타베스만이 그 부조리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야.]
마음 속에서 한층 더 강한 확신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이사엘라는 사방팔방으로 뻗은 흑색 타베스 섬유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새로운 종류의 감각 신호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위화감이 무척 강했지만, 타베스에 대한 믿음과 의존 심리가 커짐에 따라, 그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자신의 일부였던 것처럼 점점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 생겼으며, 그게 기존의 감각 기관 이상으로 선명한 감각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저주스러운 아르케가 아니라, 믿음직한 타베스를 이용하여 세상을 감각하고 인지하는 방식에 익숙해지자, 똑같은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사엘라는 주변의 이형성체들이 문자 그대로 자신의 신체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형성체들로부터 들어오는 의식 정보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보니, 이제는 그녀의 정신과 신체가 그들 전부를 포함하도록 크게 확장된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형성체들이 그녀의 확장된 자아에 포함되었고, 다음에는 조금 더 멀리 있는 이형성체들이 흡수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바위산 정상에 밀집해 있던 거의 모든 이형성체들이 그녀와 한 몸이 되었다.
이형성체들은 이제 그녀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나 세 번째 팔, 등에 돋아난 날개 같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신과 신체가 모두 급속히 확장되면서, 이사엘라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엄청나게 강해지고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거대하게 여겨졌던 바위산, 암초, 대륙, 바다, 심지어 이 행성 조차 갑자기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경우,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그저 가볍게 짓밟기만 해도 금방 깨끗이 부숴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이게 바로 그거로구나!]
갑작스럽게 거대해진 자신의 존재감과 강력한 힘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모르던 이사엘라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바로 격변 현상이며, 자신이 클라데스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시에 어느새 찾아온 자아 확장의 한계가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주변에 밀집해 있던 그 많은 이형성체들은 진작에 전부 그녀의 일부가 된 상태. 여기서 한층 더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다. 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것.
지하 깊은 곳에는 이형성체 생산 플랜트가 있고, 그곳에는 아직 미완성된 이형성체들이 다수 남아 있을 터.
지금 같아서는 그런 미완성된 이형성체들도 손쉽게 자신의 일부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에 있는 열수층은 이미 타베스가 듬뿍 들어 있는 걸죽한 수프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된지 오래였다.
이형성체 생산 플랜트에서 나온, 타베스가 포함된 폐기물이 지속적으로 투하된 덕분이었다.
따라서 이사엘라가 그 열수층을 이용하여 깊은 곳에 있는 지하 수맥으로 진입한 다음, 해저 지각 아래를 지나 대륙 본토로 가면 거기에는 또 다른 먹잇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먹잇감마저 다 삼켜서 저주스러운 대륙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대기권 밖에서 오만하게 하계를 내려다 보고 있는 부왕궁을 삼켜버릴 차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부조리의 근원인 아르케를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나마 전부 없애 버리고 말 테다.
이사엘라는 이 은하계에서 자신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한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더 이상 부당한 현실 속에서 억지로 괴로움을 참고 살아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난생 처음, 최소 행성 단위에서 세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바위산에 오를 때 느꼈던 흥분과 기대감이 몇 백배나 더 크게 증폭되어 되살아난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잔뜩 들뜬 마음을 안고 막 지하로 내려가려 했다.
“어이, 거기 너 잠깐 기다려!”
이사엘라가 바위산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려 했을 때, 뜻밖에도 짙은 타베스의 구름을 돌파해서 작은 바이크 한대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지극히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가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초라해 보일 뿐인 바이크였다.
그저 귀찮은 날벌레 한마리가 앵앵거리면서 날아오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잠깐만 생각해보면, 그 귀찮은 날벌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밀도가 짙은 타베스 구름을 무사히 돌파하고 클라데스화가 진행된 이사엘라의 본체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는 자체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평범한 힘과 기량의 소유자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인 만큼, 문제의 바이크를 보자마자 이사엘라는 그 보잘것없는 ‘날벌레’의 정체가 일루리아라는 사실을 당장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히 일루리아도 쉽고 편하게 이곳까지 날아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코어를 다섯 개나 가지고 있어서 아르케의 출력이 대단히 강하긴 했지만, 그 출력이란 것도 결국 주변에 있는 아르케를 단위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실체화시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계량화한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주변에 아르케 자체가 거의 없을 경우에는 애초부터 출력을 따져 봤자 큰 의미가 없었다.
물이 다 말라버린 저수지에서 성능 좋은 펌프를 아무리 작동시켜 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제 10요새가 있는 암초 주변은, 현재 은하계에 존재하는 두 개의 대립되는 근본 원리이자, 물질이자, 힘인 아르케와 타베스가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최전선이 되어 있었다.
암초 위, 특히나 바위산 주변은 그 최전선에서도 타베스의 압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라, 아르케가 자연스럽게 멀찌감치 밀려나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일루리아가 스스로 희생하기 직전의 성녀처럼 코어를 8개나 지니고 있었다면, 멀리 밀려난 아르케를 능동적으로 끌어 들여 타베스를 도로 밀어낼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의 힘만으로는 이 정도로 압력과 밀도가 높은 타베스를 밀어낼 만큼 막대한 양의 아르케를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무식하게 정면 돌파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일루리아가 급하게 올라탄 수공양용 바이크는, 확실히 꽤 좋은 물건이긴 해도, 이렇게 짙게 깔린 타베스 구름을 정면 돌파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은 아니었다.
원래 그녀가 과거에 사용했던 바이크가 사실은 바로 그런 물건이었다. 때문에 만약 그게 여기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겠지만, 지금 당장은 수중에 있는 이 바이크로 어떻게든 해봐야 했다.
아르케를 이용하여 비행하는 수공양용 바이크를 타고, 타베스의 압력 때문에 아르케가 거의 대부분 밀려나 버린 공간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루리아는 우선 자신의 코어를 신속하게 바이크의 동력계와 동조시킨 다음, 주변에 남아 있는 아르케를 문자 그대로 밑바닥까지 긁어 모았다.
비록 멀리 있는 아르케를 끌어 들여 암초 주변의 아르케와 타베스 분포를 완전히 뒤집어 엎을 정도의 출력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다섯 개의 코어로 최대한 박박 긁어 모은 아르케의 양은 어찌어찌 비행을 할 정도는 되었다.
일루리아는 그렇게 모은 아르케로 위태롭게 비행하여 간신히 타베스 구름 안으로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바위산 정상을 뒤덮은 타베스 구름이 엄청나게 두꺼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사엘라의 본체까지 남은 거리는 실상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가 정말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목적지까지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해도, 그 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 같은 게 놓여 있다면, 단순히 거리가 짧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장애물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만, 이 타베스 구름이 전체적으로 밀도가 높은 타베스로 꽉 차 있다고는 하나, 그 구름 안에도 타베스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곳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상에 완벽하게 균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
그렇게 밀도가 좀 낮은 곳에는 아직 아르케가 약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루리아는 타베스의 구름 안에서 그런 곳을 일종의 디딤돌처럼 사용하는 지극히 위험한 방식으로 비행을 하기로 했다.
위태롭게 비행하면서 수공양용 바이크는 아르케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처럼 균형을 잃었다가, 아슬아슬하게 아르케가 약간 남아 있는 곳에 도착하면 간신히 양력을 조금 회복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아르케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실버 코어나 정보 분석을 통해 아르케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골드 코어가 있었다면 혹시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루리아는 그저 바이크로부터 전해져 오는 불안한 진동만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빨리빨리 판단해야만 했다.
아르케가 남아 있는 곳과 전혀 없는 곳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한 순간이라도 방향 전환이 늦거나 판단 실수를 했다가는, 그대로 바이크와 함께 타베스의 구름 속에 삼켜져 두 번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건 완전히 한밤중에 눈을 감고 늪지대를 달려가는 것 같은데?’
오랜 세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일루리아도 이쯤 되자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일단 빠졌다 하면 제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두 번 다시 탈출할 수 없는 위험한 늪지대 같은 장소.
그런 늪지대를 한밤중에 눈을 감은 채 걸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전혀 무섭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 늪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디딤돌은 아주 작은데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오로지 동물적인 감각에만 의지하여, 그 작은 디딤돌에서 디딤돌로 정확히 뛰어넘어가되, 최대한 빨리 반대편으로 건너 가지 않으면 이 대륙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상황.
조금 무서움을 느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긴장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나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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