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20화: 아들들의 전쟁 (51)
크로키가 카를로만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자, 카르스덴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뭐라고? 나더러 친동생을 사형에 처하란 말이냐?”
아무리 카르스덴이 동생에게 극도로 화가 나 있고 크로키를 크게 신임한다 해도, 지금 이 조언만큼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법과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고 왕자님의 권위를 세우시려면 마땅히 친동생인 카를로만에게 사형을 선고하셔야 합니다.”
크로키가 다시 한번 힘주어 대답했다. 카르스덴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야. 지금 카를로만을 처형했다가는 상상도 못할 만큼 큰 혼란이 생길 거다.
부족 대표들의 반발도 상당히 심할 거고, 무엇보다 카란드라 누님이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게 뻔해.
물론 누님은 항상 내 편이었고, 동생이 함부로 나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동생을 처형하는 것까지 찬성할 리는 만무하다.
틀림없이 펄펄 뛰면서 화를 낼 거야. 나는 누님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카르스덴의 말에서는 은근히 카란드라를 두려워하는 기색까지 느껴졌다. 크로키는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방금 하신 말씀이 분명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만약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친동생을 처형하신다면 현실적으로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크로키가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자, 카르스덴이 얼굴 가득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따져 물었다.
“크로키, 설마 네 놈이 장난 삼아 내 속마음을 떠본 것이냐? 네가 감히 내 신임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크로키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원칙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좀더 생생하게 말씀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부족장도 부족장의 친인척도 아닌 저 같은 비천한 놈은, 왕자님의 신임과 지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한테는 오직 왕자님께 충성을 다하는 길밖에 없으니 그 점만큼은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카르스덴도 물론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가 크로키를 마음 놓고 신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크로키 본인의 능력도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나름대로의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부족 대표들과는 달리, 크로키는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에 카르스덴의 신임과 지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크로키한테서는 부족 대표들보다 좀더 확실한 충성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카르스덴은 그렇게 확신했다.
“난 네 충성심을 믿는다. 그러니 너도 두 번 다시 쓸데없이 말을 빙빙 돌릴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직설적으로 하란 말이다. 알겠느냐?”
카르스덴이 엄하게 말하자 크로키는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카르스덴의 얼굴에서 불쾌한 기색이 누그러지자 크로키가 말을 계속했다.
“어쨌든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일단 카를로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는 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왕자님의 위엄이 우뚝 서고 부족 대표들의 기강도 다져질 테니까요.
법과 원칙을 공정하게 집행한다는 강력한 명분을 내세운다면, 사형 선고 자체에는 아무도 감히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실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카를로만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왕자님께서 관대하게 은혜를 베풀어 사면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여기까지 듣고 카르스덴이 다소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말 뜻은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러면 지나치게 촌극 같아 보이지 않을까?”
“당연히 이건 뻔한 촌극이지요. 어차피 정치란 게 따지고 보면 한편의 규모가 큰 촌극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무슨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형식적으로 사직을 청하고 윗사람이 그것을 반려하는 촌극 같은 건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자주 벌어지곤 합니다.
멍청한 놈들은 그게 촌극이라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껌뻑 속아 넘어가고, 똑똑한 자들은 그게 촌극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장단을 맞춰주는 법이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왕자님께서 카를로만에게 형식적으로 사형을 선고하시고 집행 직전에 사면하시는 뻔한 촌극을 벌이시는 게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르스덴은 여느 때처럼 크로키의 물 흐르는 듯한 말솜씨에 점점 마음이 끌리는 중이었다.
크로키처럼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언변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지,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저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는 심지어 크로키 덕분에 사람을 겉모습만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새삼 실감했을 정도였다.
“좋아. 카를로만은 그렇다 치고, 공범인 칼마르와 프리트만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나?”
카르스덴이 묻자 크로키가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죄를 엄하게 물으셔야지요. 칼마르, 그 자는 왕자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파로크 성채의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수들을 잘못 지휘하여 좋은 때를 놓치고 적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전투에서 왕자님의 좋은 작전을 다 망쳐버린 주범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칼마르입니다.
거기다 나중에는 수비병들에게 성문을 열라고 명령하여 카를로만의 출진을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고요.
또한 카를로만과 함께 출진한 프리트만은 당연히 의심할 여지 없는 공범입니다. 둘 다 엄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카르스덴은 여기서 퍼뜩 크로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이번에도 죄를 엄하게 묻고 나중에 사면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라는 말인가?”
크로키가 머리를 숙이면서 칭송했다.
“물론입니다. 과연 현명하십니다.
카를로만, 칼마르, 프리트만, 그리고 카를로만의 직속 부하들, 거기다 카를로만을 따라서 함부로 출진한 기병 몇 명을 골라서 형식적으로 엄중한 처벌을 선고하신 다음, 나중에 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관대하게 용서해 주십시오.
처음부터 채찍질 50대를 선고하면 매정해 보이지만, 일단 채찍질 100대를 선고했다가 나중에 50대로 낮춰주면 결과적으로는 같은 처벌이라도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법과 원칙이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정치란 바로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르스덴은 그의 말에 완전히 공감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결정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크로키는 카르스덴의 결단에 짐짓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방금 결정하신 대로만 하신다면, 카르스덴 왕자님의 위엄과 권위는 오늘 전투의 결과와 무관하게 크게 치솟을 게 분명합니다.
특히나 카를로만과 칼마르는 두 번 다시 왕자님의 권위에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크로키의 입에 발린 찬사까지 듣고 나자 카르스덴의 결심은 완전히 확고부동해졌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전에 크로키와 둘이서 충분히 의논하여 자세한 방침을 세운 다음, 이어서 대연회장에서 개최된 부족 대표 회의에 참석했다.
오늘 벌어진 전투의 뒤처리를 하기 위한 회의였다. 전투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던 만큼 회의장에 모인 부족 대표들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카르스덴이 엄격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고, 파로크 성채에 있는 부족 대표들이 거의 다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전사한 탓에 장례 준비에 바쁜 프리트만까지 참석했을 정도로 중요한 회의였다.
다만, 그는 구석진 곳에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 딱히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카르스덴의 의자 옆에는 여느 때처럼 크로키가 서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우선 칼마르가 나서서 회의장 중앙에 자리잡고 많은 부족 대표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대략적인 사상자 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다들 오늘 전투의 결과가 아주 좋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구체적인 숫자로 듣는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칼마르는 침통한 표정으로, 24일 하루에만 대략 3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3일 전투까지 합치면 이틀 동안 총 4200명 정도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모두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 사상자 가운데 부상자는 대부분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4200명 거의 전부가 회복 불가능한 병력 손실이라는 사실 또한 숨김 없이 발표했다.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럼, 어제 오늘 전투에서 적병은 얼마나 죽은 거요? 아군이 적병 1천명은 죽였소?”
부족 대표 가운데 한 명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칼마르에게 물었다. 칼마르가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적병의 사상자 숫자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군에게 유리하게 계산한다고 해도 절대로 1천명은 안 될 겁니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듣고 있던 카르스덴은 내심 칼마르가 적군과 아군의 사상자 숫자를 지나치게 솔직하게 발표하는 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사실은 회의 시작 직전에 칼마르가 사상자 집계 자료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에도 적당히 숫자를 수정해서 발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싶었던 게 본심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지시를 내렸다가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칼마르가 고집스럽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 아주 뻔한 일이었다.
카르스덴의 머릿속에는 카를로만과 함께 칼마르 또한 엄하게 처벌한다는 방침이 이미 세워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어차피 벌을 받게 될 칼마르와 굳이 논쟁하지는 않았으며, 그가 솔직하게 전투 결과를 전하게끔 일단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전투에서 아군의 희생은 너무나도 컸소.
일반 병사들뿐만 아니라, 신분이 높은 기병들, 심지어 프라티온 부족장처럼 부족 대표들까지 다수 희생되었으니 말이오.
기병으로 참전했던 내 친척 젊은이들도 오늘 전투에서 2명이 죽고 1명만 한쪽 팔이 잘린 채 겨우 살아 돌아왔소.
그런데 적병을 1천명도 죽이지 못했다면 이건 그야말로 참담한 실패이고 비극이오.
아군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도대체 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따져서 반드시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오.”
부족 대표 가운데 한 명이 꾹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많은 부족 대표들이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자칫하면 그와 같은 울분이 카르스덴에 대한 원망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페레이즈가 이끄는 플로젠 군단병과 정면 대결을 벌여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을 뿐만 아니라, 핵심 작전 계획을 다 세우고 최종 결정까지 내린 사람이 바로 카르스덴이기 때문이었다.
부족 대표들 중에는 마땅히 카르스덴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내심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옳은 말이오. 나는 반드시 어제 오늘 전투에 대한 책임을 공정하게 따짐으로써 나라를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한 병사들의 죽음을 위로할 작정이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엄숙하게 선언하고 약속하건대, 만약 누군가 전투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사람이 누구라 해도 엄한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예외란 있을 수 없소.”
잠자코 있던 카르스덴이 재빨리 나서서 강한 어조로 말했다. 책임 논의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크로키가 사전에 해준 조언에 따라, 그는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묻는 입장에 있어야 하며, 절대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묻도록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책임 문제를 선제적으로 거론하고 나서서 논의의 주도권을 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카르스덴이 전투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면서 좌중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자, 부족 대표들은 그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고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 바람에 회의장 내부가 잠시 조용해지자, 크로키가 얼른 나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제 전투의 책임은 전적으로 카를로만에게 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하게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일은 굳이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 전투의 책임도 카르스덴 왕자님의 좋은 작전을 다 망쳐버린 두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분명합니다.
거짓으로 패배한 척 플로젠의 보병들을 파로크 성채 가까이로 유인하여 성벽 위에 배치된 정예 궁수들의 화살로 그들을 제압한 다음, 보병과 기병의 협공으로 포위하여 몰살시킨다는 작전.
저는 이렇게 훌륭한 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두 사람이 오늘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 병사들을 다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말을 듣고 칼마르는 덜컥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크로키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크로키, 네가 말하는 그 두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어서 말해봐라.”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