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85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71)
물론 텍스툼의 정책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다. 바로 엄격한 통제주의였다.
비록 개개인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해도, 텍스툼에서는 기본적으로 매우 강력한 프레임이 구성원들의 사고 방식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내부 분쟁 없이 텍스툼 전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모두 한마음으로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 엄격한 통제주의는 이스카엘로서는 평소의 지론과 일치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정책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스카엘은 어디까지나 보호가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는 게 안타까워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일 뿐이었다.
텍스툼처럼 코어가 없는 사람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정책과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이 뒤섞여 있는 집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텍스툼과 본격적으로 내통하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가 계속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계획이 한창 실행중인 현재, 이스카엘은 자신이 코어 본위 능력주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이니에스의 신임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괜히 텍스툼의 핵심 정책에 대한 불만을 입밖에 내어 분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 텍스툼의 코어 본위 능력주의에는 의외로 편리한 측면이 있기도 했다.
이스카엘이 현재 지닌 코어는 실버 코어 5개에 골드 코어 1개 등 총 6개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전 은하계를 통틀어 단연 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어떤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때 코어의 숫자를 중시하는 텍스툼을 상대로 교섭함에 있어서, 코어를 6개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무척 유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덕을 보는 측면도 있는 만큼, 지금은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참고 또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자신이 품은 불만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다가 이베리스에게 제대로 한방 먹기도 했었으니까 더더욱.
“그 동안 이스카엘님께서 급진파의 움직임에 대한 중요한 정보, 그리고 무엇보다 타베스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제공해 주신 것에 대해, 텍스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그때 갑자기 이니에스가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잠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이스카엘은 이 그 인사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사엘라가 했던 감사의 인사가 전혀 진심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감사의 인사 역시 당연히 진심이 아닐 것이다. 틀림 없이 속내를 떠보려는 의도이겠지.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텍스툼측이 관대하게도 저와 저를 따르는 동지들을 받아주기로 하셨으니, 당연히 그런 성의는 보여야지요.”
이스카엘은 내심 상대방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했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물론 이니에스도 결코 함부로 상대를 과소 평가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갑작스러운 감사의 인사가 곧 속내를 떠보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이쪽이 눈치채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의도를 짐작할 줄 뻔히 알면서 일부러 인사말을 던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경고가 아닐까?
상대방의 의도가 그렇다면, 여기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최선일 터.
이스카엘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층 더 몸을 낮추고 정중하게 대꾸했다.
“만약 이번에 텍스툼이 관대한 결단을 내려서 저희를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달리 갈 곳 없는 저희는 조만간 이베리스의 음모에 걸려들어 반역죄로 억울하게 처형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당연히 저희도 그 보답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자비의 대륙이 멸망하고 텍스툼 본성에 가게 되면, 텍스툼의 일원으로서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스카엘은 특히나 반역죄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최근에 이베리스가 반역죄로 자신을 고발할 준비를 한창 진행하고 있으며, 그 준비가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도 바로 이니에스였다.
그건 당연히 순수한 호의에서 알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한층 더 초조하게 만들어서 텍스툼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궁지에 몰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자신이 그런 계산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최대한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텍스툼은 언제나 능력 있고 헌신적인 인재를 환영합니다.
코어가 무려 6개나 있는 이스카엘님 같은 분께서 텍스툼이 추구하는 가치에 충성을 다 하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니에스도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대꾸했다.
이쪽에서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억울한 반역죄 때문에 텍스툼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말을 강조하자, 저쪽도 그걸 눈치채고 이쪽에서 듣고 싶어 하는 ‘당신은 코어를 6개나 가지고 있으니 환영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 같았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거 아무래도 자신의 저의가 뭔지 본격적으로 캐물을 듯한 분위기이다.
이스카엘은 새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불편하시다면 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니에스가 질문을 던지자, 이스카엘은 속으로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질문이신가요? 걱정하지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이스카엘님께서는 저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 아닙니까?
제 1지구에서 구인류가 멸망하기 이전에 태어나셨고, 제국의 건국에서부터 쇠퇴를 모두 지켜보셨지요?
그 오랜 세월을 거의 대부분 성녀님과 함께 하셨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생물학적인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고아로 태어났습니다.
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성녀가 누나이자, 어머니이자, 선생님 역할을 하면서 저를 보살펴 주고 있었지요.
성녀가 스스로 희생한 지도 어느덧 약 200년이 흘렀습니다만, 사실 그 정도 세월쯤은 성녀와 함께 해온 더 긴 시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성녀님께서 희생하신 덕분에 간신히 보존된 자비의 대륙. 그 대륙이 얼마 후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타베스에 의해 집어 삼켜져서 아주 비참하게 말입니다.
성녀님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시면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것과 바로 그 방식으로 멸망하게 되겠지요.
이스카엘님께서 저희에게 협조해주신 덕분에요.”
이니에스의 말투는 지극히 정중했지만, 그 말의 내용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가슴 속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것이었다.
성녀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겨우 지켜낸 대륙이 당신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아닌가?
물론 이스카엘은 꾹 참고 차분하게 듣기만 했다.
“이스카엘님께서 성녀님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보존된 대륙을 이제 와서 갑자기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텍스툼의 상층부에서는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고요.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지신 겁니까?
제가 이스카엘님에 비하면 살아온 나날이 짧기 때문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텍스툼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유능한 첩보요원이 이런 긴박한 와중에 한가하게 개인적인 궁금증이나 풀고 있을 리는 없다.
틀림 없이 텍스툼 상층부의 뜻에 따라, 일종의 마지막 심문 절차를 진행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스카엘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전부터 이니에스는 가끔씩 텍스툼 상층부가 이스카엘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해왔던 터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최종 면접 삼아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해명을 들으려는 것 같았다.
곧 자비의 대륙이 완전히 멸망하고, 이스카엘과 그를 따르는 일단의 전직 관리국 요원들이 사전 약속에 따라 텍스툼의 본성인 솔룸 행성으로 가게 될 상황.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진의를 확인하려는 건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만약 여기서 말을 잘못한다면 모든 협력 관계가 다 끝장 날 가능성도 있었다.
한때 동지였던 관리국 국장 이베리스가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으니, 이스카엘이 관리국에 학을 떼고 등을 돌리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변심이었다.
애초부터 그건 바로 텍스툼측이 기대한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해서 관리국에 등을 돌렸다고 해도,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해왔을 뿐만 아니라,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인 성녀가 희생하여 지켜낸 대륙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텍스툼의 입장에서는 그건 쉽게 믿지 못하겠다면서 의심하는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스카엘은 언젠가 이니에스가 이런 질문을 던지리라고 예상했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미리 생각해 둔 터였다.
애시당초 근본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킬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종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텍스툼측과 이니에스가 결정적으로 자신을 의심하여 관계를 끊지 않게만 하면 충분한 일이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우선 제가 한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이스카엘의 말을 듣고, 이니에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질문이신가요?”
“텍스툼은 성녀님의 희생에 대해서 어떻게 평하고 있습니까?”
이스카엘로서는 나름대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텍스툼의 코어 본위 능력주의에 따르면, 희생되기 직전에 코어를 무려 8개나 지니고 있었던 성녀는 응당 존경 받아 마땅한 최고의 인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은하계 최고의 인재가, 텍스툼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허무하게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건에 대해 텍스툼측은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평소부터 은근히 궁금했던 게 사실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척 고귀한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성녀님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고요.”
이니에스는 그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았다는 듯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서, 어리석은 군주에게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고 목숨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장군이 있다고 칩시다.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 하에서 교육 받고 자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장군의 충성심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희생 자체는 여전히 고귀하고 존경 받아 마땅하다고 느껴지지 않을까요?
그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대답이 되었나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리지요.
저는 성녀의 희생이 지닌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사색을 거듭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구인류 사회에서도 한 남자의 죽음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깊은 사색과 연구를 통해 대단히 영향력이 큰 종교가 탄생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성녀의 희생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최근 들어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는 것이 바로 성녀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때문에 텍스툼에 귀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듣자 이니에스는 약간 놀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좀 뜻밖이로군요. 자비의 대륙을 멸망시키는 것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자비의 대륙을 구한 성녀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약 200년 전, 행성 규모의 격변 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클라데스로 인해 이 행성 전체가 속절없이 타베스에 의해 삼켜지기 일보직전.
성녀는 다른 대륙을 과감히 포기하면서까지, 스스로를 희생하여 이 작은 대륙 하나만이라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녀의 무한한 희생 정신에만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오랜 세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오히려 더 중요한 교훈은 과감한 결단력이었습니다.
억지로 전체를 다 구하려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구할 수 있는 일부분만이라도 구하자는 결단력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이니에스가 선뜻 동의를 표했다.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스카엘은 어차피 자기도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닌 이상, 상대방이 진심으로 믿어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저쪽이 품고 있는 의심을 잠시 동안만 억눌러 놓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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