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337화: 아들들의 전쟁 (68)
카시우트가 단호하게 반대하는 소리를 듣고 프레데일이 대뜸 의문을 제기했다.
“네 말은 저 야만족 놈들이 문제의 연락관이 태자 전하께 불리한 명령을 가지고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에만 성립되는 거 아니냐?
나도 파드무스의 제안에 무조건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을 경우, 입을 다물고 교묘하게 질문을 회피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연락관이 야만족에게 죽든 말든 운명에 맡기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 또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한가지 방안이라고 본다.
그러니 신중하게 고려해볼 가치는 있을 거야.”
카시우트가 답답한 듯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레데일 경까지 그런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파리아스 각하께서 보내신 전령 2명 가운데 1명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 전령이 야만족에게 체포된다면, 설령 적에게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고 깨끗이 자결해 버리더라도, 그 전령의 존재만으로 저 야만족 놈들은 태자 전하께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파드무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어째서? 만약 전령이 체포되었다고 해도 그 전령은 전갈의 내용을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십중팔구 자결했을 테고, 그가 지닌 편지는 옷 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으며, 편지의 내용도 야만족이 절대로 해독할 수 없는 암호로 쓰여져 있는데?
그래도 야만족 놈들이 태자 전하께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금방 눈치챌 거란 말이냐?”
카시우트가 차분히 설명했다.
“파드무스 경, 냉정하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아군의 전령이 야만족의 영토를 가로질러 목숨을 걸고 태자 전하께 무슨 소식을 전하려 했으며, 체포되자마자 자결해서 어떻게든 비밀을 지키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전령이 가지고 있는 전갈이 듣기 좋은 소식일 턱이 없지 않습니까?
만약 좋은 소식이라면 구태여 이런 위험한 모험을 하지 않고 태자 전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다음에 느긋하게 전해도 될 테니까요.
투항한 야만족까지 이용해가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은밀하게 태자 전하께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면, 그게 아주 긴급하면서도 나쁜 소식이라는 사실쯤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파드무스도 그 설명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지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카시우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야만족 놈들이 본국에서 태자 전하께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챈 상황에서, 다시 연락관이 이끄는 기병대가 급하게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이 추가로 알려졌다고 칩시다.
야만족 가운데 조금이라도 머리가 좋은 자가 있다면, 당연히 기병대 100명은 모두 죽여서 자기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제물로 삼되, 연락관만은 살려 보내서 태자 전하를 곤란하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가만히 구경만 하면서 일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랬다간 명분과 실리를 다 잃을 테니까요.”
카시우트는 예전에 야만족의 함정에 빠져서 부하 1천명이 거의 전멸 당하는 치욕을 맛본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무고한 기병대 100명이 야만족의 기습을 받고 다 죽도록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파드무스는 카시우트의 그런 심리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굳이 그의 아픈 과거를 들먹이면서까지 강하게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페레이즈가 말했다.
“일단 또 한 명의 전령이 우리 진영에 무사히 도착할지 어떨지 잠시 지켜보도록 하자.
카르스덴이 연락관 일행을 기습한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파로크 성채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행동을 시작할 거다. 그러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다.
내일, 그러니까 27일 해가 저물 때까지 기다려 보자. 그 시점까지 문제의 전령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자가 야만족에게 체포되었다고 가정하고 계획을 다시 세워보는 거다.
나 역시 하루 정도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파드무스, 프레데일, 카시우트는 모두 페레이즈 태자의 말에 납득하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막사를 떠났다.
혼자 남은 태자는 책상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물론 페레이즈는 내심 연락관이 분명 야만족의 기습을 받게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철군 명령을 가지고 오는 그 연락관과 호위 기병대가 적의 기습을 받는 건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쪽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속수무책으로 전멸 당할 가능성이 높다.
야만족의 손에 의해 그 연락관의 목숨이 철군 명령과 함께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까?
아니면, 지원군을 보내서 도와줘야 할까? 이 문제는 결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페레이즈 태자는 26일 밤이 지나고 27일 아침이 될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파로크 성채에서도 케르비오 족의 수뇌부가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7일 아침, 파로크 성채에서는 카르스덴이 자신의 집무실로 카란드라, 카를로만, 페르구스를 불렀다.
페르구스는 전날 밤, 카르스덴이 직접 주최하는 연회에서 신분이 높은 부하들과 함께 좋은 고기와 술로 잘 대접 받았기 때문에 약간 취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대접을 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카르스덴이 자신을 존중하여 중요한 의논 자리에 불렀다고 생각하여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르스덴의 집무실에는 이제 신임을 어느 정도 회복한 칼마르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처형장에서 카를로만을 감싸다가 입은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몸이 불편했고, 하마터면 손목을 잘릴 뻔했던 정신적 충격에서도 깨끗이 회복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다만, 돌아가는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도저히 편하게 쉬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칼마르 아저씨, 그 피 묻은 옷은 뭡니까?”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카를로만이 가장 먼저 칼마르가 들고 있는 옷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칼마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건 지난밤에 자결한 적의 첩자가 입고 있던 옷입니다.”
“적의 첩자라고요?”
카를로만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카란드라와 페르구스도 흠칫 놀랐다
다만, 카르스덴은 아까 칼마르에게 간략하게 사정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첩자는 적에게 투항한 우리 케르비오 왕국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 자는 정체를 숨기고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페레이즈의 진영으로 달려가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걸 수상하게 여긴 충성스러운 마을 사람 몇 명이 첩자에게 덤벼들어 격투 끝에 간신히 제압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결국 그 배신자 놈을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놈은 완전히 제압 당하기 직전, 숨겨 놓았던 독약을 먹으려고 하다가 실패했지만, 악착 같이 자기 혀를 깨물어 자결해 버렸다고 하더군요.
이 옷에 묻은 피도 바로 그 자의 혀에서 쏟아진 겁니다.”
칼마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카르스덴이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도 칼마르와 둘이서 얘기를 했지만, 자랑스러운 케르비오 왕국 사람으로 태어나 플로젠 놈들에게 투항하여 더러운 첩자 노릇을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그런 배신자 놈은 산채로 불태워 죽여도 시원치 않소.”
칼마르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산채로 불태우지는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놈의 시체는 제가 이미 불태워 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까 이른 새벽에 성채로 그 첩자의 시체를 운반해 와서 공을 세웠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하기에, 제가 나중에 카르스덴 왕자님께서 후한 상을 내리실 거라고 임의로 약속을 해준 다음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첩자 놈의 시체를 자세히 살피고 옷과 소지품을 압수한 다음, 시체를 불태워버린 겁니다.
멋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한 점은 왕자님께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카르스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용서라니? 아주 잘했소.
그 배신자는 겉모습이 여느 케르비오 사람과 다를 바 없을 텐데, 놈의 거동이 어쩐지 수상하다는 사실을 용케 눈치채고 격투 끝에 붙잡은 것이니, 마을 사람들의 용기와 지혜가 정말 대단하오.
당연히 크게 상을 내려야 할 것이오. 나중에 재물이든 곡식이든 넉넉히 보내주도록 하시오.”
카를로만은 그러는 동안에도 칼마르가 가지고 있는 첩자의 옷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칼마르 아저씨, 그 첩자가 입고 있던 옷은 잘 살펴보셨습니까? 뭔가 눈에 띄는 게 있던가요?”
칼마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품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꼬깃꼬깃 접힌 편지 한 장을 꺼내서 펼쳐 보였다.
“제가 예전에 들은 바가 있어서 첩자 놈의 옷을 자세히 살펴보니, 옷을 조금 찢어서 이 편지를 집어 넣은 다음 천을 덧대고 다시 꿰매 놓은 부분이 있더군요.
안타깝게도 편지의 내용은 전부 암호로 쓰여 있어서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가 없었습니다.”
암호 편지라는 말을 듣고 카란드라가 막내 동생에게 물었다.
“카를로만, 넌 플로젠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적이 있었지? 혹시 저 편지의 암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없느냐?”
카란드라의 말을 듣자마자 칼마르는 얼른 그 암호 편지를 카를로만에게 건네주었다.
카를로만은 일단 문제의 편지를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보긴 했지만, 곧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게도 저 또한 전혀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고유한 암호 해독표가 있어야 해독할 수 있는 종류의 편지입니다.
그 첩자가 몰래 페레이즈의 진영으로 가려고 했다고 하니 페레이즈는 당연히 암호 해독표를 가지고 있겠지요.
그 자는 아주 똑똑한 자이니 어쩌면 그걸 통째로 외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란드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죽은 첩자는 사실 첩자라기 보다는 전령이라고 해야겠군.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이 암호 편지를 페레이즈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거였어.”
카를로만이 즉시 동의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누군가 우리 왕국에서 투항한 자를 이용하여 전쟁 중에 우리 영토를 가로질러 오직 페레이즈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다면, 그 누군가는 아마도 페레이즈와 매우 절친한 사이일 겁니다.”
카란드라가 다시 물었다.
“그 누군가는 과연 누굴까?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느냐?”
카를로만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페레이즈는 형님과 싸우기 위해 이곳으로 남하해 오면서, 자기 휘하 군단의 잔여 병력을 페살리스의 성주이자 상급 기사인 파리아스라는 자에게 맡겨 놓고 뒷일을 당부했다지 않습니까?
거기다 제가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들은 바에 따르면, 그 자와 그 자의 아들인 파드무스 모두 페레이즈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암호 편지를 보낸 사람은 파리아스가 분명합니다.”
칼마르가 말했다.
“파리아스가 전하려고 했던 소식이 무엇이든, 페레이즈는 이제 그걸 받아볼 수가 없게 되었군요.
우리가 파리아스가 보낸 전령을 중간에서 자결하게 만들고 이 암호 편지를 빼앗았으니까요.”
카를로만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알기로 플로젠에서는 중요한 전갈을 위험한 경로를 통해 전달해야만 할 때 동일한 편지를 지닌 전령을 2명 이상 파견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시 말해, 어쩌면 또 한 명의 전령이 이미 페레이즈의 진영에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듣고 카르스덴이 동생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파리아스는 도대체 무슨 소식을 이토록 열심히 페레이즈에게 전하고 싶었던 걸까? 넌 그것도 짐작할 수 있겠느냐?”
카를로만이 대답했다.
“정확한 내용이야 당연히 알 수 없습니다만, 추측하건대 아마도 좋은 내용은 아닐 겁니다.
좋은 소식이라면 굳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중에 다급하게 전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페레이즈 입장에서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말을 듣고 카란드라가 말했다.
“페레이즈 입장에서 아주 나쁜 소식이라면 둘 중 하나겠군.
페레이즈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필린이 대대적으로 국경을 침범했거나, 아니면, 페레이즈를 끔찍하게 미워하는 것으로 유명한 플로젠의 젊은 왕비가 무슨 일을 벌였거나.
과연 어느 쪽일까?”
그때 여전히 취기가 남아 있어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페르구스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적어도 네필린 놈들이 대대적으로 움직인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악랄한 공화국 놈들에 대한 일이라면 우리 서쪽 사람들이 가장 잘 알지요.
제가 우리 부족장님을 따라서 서부 초원지대를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네필린이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해서 플로젠을 공격할 거라는 소문 같은 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소규모 부대로 국경을 찔러보는 것 정도는 당연히 소문 내지 않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정도 작은 공격을 가지고 플로젠 놈들이 이렇게 배신자를 전령으로 삼아 암호 편지를 보내는 것 같은 큰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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