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69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55)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내 동상의······ 그 목이 잘린 사건은 지금 가장 시급한 사안이 아니니, 일단은 내버려두도록 하자.”
마침내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이베리스가 입을 열어서 지시를 내렸다.
“우선 일루리아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부상 당한 요원들을 의무부로 신속하게 후송할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망가진 엘리베이터와 벽을 응급 수리하라고 명령을 전하게. 알겠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장의 지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대목은 이제부터였다.
“본부 타워를 빠져나간 방법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 고집불통 일루리아가 동쪽 바다로 가긴 했으니, 이번 사건이 무사히 수습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자비의 대륙이 멸망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사건이 잘 해결된 다음, 저 막돼먹은 일루리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더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내 말 뜻 이해하겠지?”
“물론입니다. 사건이 해결된 다음, 국장님께서 직접 나서실 수 있도록 제가 알아서 다 준비하겠습니다.”
이스크마 비서관이 정중히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이베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개인실 창문 밖 동쪽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각, 일루리아는 한창 황야를 가로질러 그쪽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터였다.
“일루리아 같은 위험한 자를 풀어주지 않고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이런 사건이 벌어지다니, 앞으로는 이 대륙에서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창 밖을 바라보던 이베리스 국장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목소리가 컸지만, 딱히 누가 들으라고 하는 말도 아닌 것 같아서 애매했다.
막 개인실 밖으로 나가려던 이스크마 비서관은 뭐라고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 오늘부터라도 당장 대대적인 재발 방지 대책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책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일루리아라는 위험 요소를 확실히 없애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에는 추방 당한 상태에서 계속 관리국에 맞서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이스카엘과 일루리아가 살려 보낸 급진파의 잔당 같은 놈들도 전부 제거할 것이다.
그렇게 모든 화근이 전부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지상 거주민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테니까.”
국장의 결의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서, 평소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던 이스크마도 일순 일루리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고생 해가면서 자비의 대륙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는 순간, 그때부터 본인이 가장 위험한 화근의 싹으로 간주되어 제거될 운명이라니, 실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스크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을 털 끝만큼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그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얼른 조심스럽게 국장 개인실을 빠져 나왔다.
자비의 대륙 동쪽 바다. 제 10요새가 자리잡은 암초의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동굴.
과거에 용암이 들어찼다가 빠진 흔적이라는 그 어둠 컴컴한 동굴 안에서는, 이아테스, 이르피오, 이그시아 등 3명이 조심스럽게 안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거대한 지하 공동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추락할 때 함께 떨어졌고,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위아래로 까마득히 뻗은 암벽 중간에서 꼼짝 못하는 처지가 되는 바람에 한때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이클리프에게 잡혀간 줄로만 알았던 이레니아가 연락을 해 온 덕분에, 다리가 걸려 있던 곳에서 조금 아래쪽에 이런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시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었다.
이후 조심스럽게 암벽을 타고 내려온 일행은, 다행히 생각 보다 어렵지 않게 문제의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부터는 한참 동안 어두운 동굴 안을 천천히 걷고 있는 중이었다.
길이 다소 경사가 져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고도가 높아졌지만, 그렇게 힘들거나 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까마득한 지하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 좋기까지 한 구조였다.
다만, 세 사람은 현재 거의 모든 무기를 잃어버렸으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허공에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를 면하고, 이렇게 동굴 안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암울한 와중에서 이아테스는 자신들에게 연락해 온 이레니아가 가짜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진짜든 가짜든, 암벽 중간에서 속수무책으로 허송세월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함정에 빠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시키는 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또 온다! 또 와! 다들 조심해.”
이르피오가 문득 앞쪽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지금 일행이 걷고 있는 동굴 내부에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 인공 수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수로를 통해서 아까부터 가끔씩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와 초록색 액체가 흘러오곤 했다.
이번에도 또 다시 정체불명의 덩어리와 액체가 수로를 따라 기세 좋게 흘러왔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레니아가 통신상에서 이 동굴이 폐기물 배출 장소로 쓰였다는 말을 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게 바로 그 폐기물이 배출되는 모습인 듯했다.
이번에 흘러온 폐기물도 역시 중력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졌고, 최종적으로는 동굴 밖으로 흘러나가 까마득한 아래쪽을 향해 떨어져 버렸다.
“여기는 그냥 동쪽 바다의 에너지 장벽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거점 요새잖아? 그런데 이 요새에서 무슨 폐기물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
거기다 저 폐기물의 정체가 뭔지도 궁금해 죽겠어. 하필 왜 저렇게 징그럽게 생긴 거지? 자꾸만 아까 그 이형성체들이 생각나잖아.”
이르피오가 구역질 난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물었다.
“우리가 알게 뭐야? 제발 부탁이니까 그딴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좀 마.”
이그시아가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암벽 중간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던 신세를 면했기 때문에 다소 들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런 사소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느라 겨우 좋아진 기분을 다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일단 이 수로를 따라서 계속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레니아, 아니, 스스로 이레니아라고 주장하는 누군가를 만나보면 모든 것이 좀더 분명해질 테니까.
지금은 다들 길을 잃어버리거나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또한 발이 미끄러져서 저 수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만에 하나, 폐기물에 휩쓸려 같이 동굴 밖으로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아테스는 신중한 표정으로 다른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준 다음, 다시 앞장 서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그 수로에 묻어 있는 초록색 액체에서 희미한 광채가 발산되었기 때문에, 어둡고 깊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다든지 일행이 서로 헤어진다든지, 실수로 수로 안으로 발이 빠진다든지 할 위험성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 동굴 안은 사실상 거의 외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보니, 어느 순간부터 천장에 희미하나마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험성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그 대신 슬슬 다른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긴 도대체 무슨 시설일까? 정말 폐기물 처리 장소가 맞는 것일까?”
이르피오가 영 찝찝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쩐지 자연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점점 인공적인 지하 시설이라는 인상이 강해졌다.
폐기물 배출용 수로와 천장의 조명뿐만 아니라, 벽과 바닥에서도 어쩐지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엿보여서, 직감적으로 자꾸만 불길한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요새 지하에 도대체 왜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이르피오 뿐만 아니라, 이그시아까지 어느새 들뜬 기색이 사라지고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말은 안 해도 이아테스 팀장 역시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을 터였다.
“잠깐.”
그때 가장 앞서 가던 이아테스 팀장이 손을 들어 다른 두 명을 멈춰 서게 했다.
“왜 그래?”
다른 두 사람은 무슨 일인가 싶어 흠칫하면서 이아테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앞쪽 동굴 벽에 비상구처럼 보이는 금속제 문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그 문을 열어 놓고, 이레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깨 위에는 초록색 고양이 세피노도 얌전히 올라 앉아 있었다. 언뜻 봐서는 납치 당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난, 아무리 봐도 의심스러운 구석을 못 찾겠는데? 역시 팀장이 괜한 의심을 한 거 아닐까?”
이르피오가 잠깐 이레니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그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겠어.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저 헛똑똑이의 모습을 진작 좀더 자세히 봐 둘 걸.
꼴도 보기 싫어서 외면하곤 했는데, 저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는 상황이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두 사람은 난처한 표정으로 어쩌면 좋겠냐는 듯 이아테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둘 다 침착하게 날 따라와라. 다만, 이따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이아테스는 두 사람을 데리고 여느 때처럼 침착한 태도로 이레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상대방은 굉장히 반가워가면서 일행을 맞이했다.
“다들 반가워요.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 모든 게 다 기적이에요.”
이레니아는 무척 들뜬 표정으로 기뻐하는 반면, 이아테스 일행은 아무래도 마음 속으로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떨떠름하고 어색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요? 절 다시 만난 게 반갑지 않은 건가요?”
아무리 기뻐해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이레니아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일행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표정에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아테스는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느긋하게 서로 무사한 걸 반가워할 때가 아니라서 그런다. 우린 아직 할 일이 많고,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 않느냐?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할 지부터 말해봐라.”
이 말을 듣자 이레니아는 얼른 문 안쪽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에는 위쪽으로 높이 뻗은 수직 통로와 긴 사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텅 빈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추락한 것부터 시작해서, 까마득한 수직 동굴 안을 떨어져 내리다가 겨우 살아난 경험까지 있었으니, 세 사람은 높은 수직 통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여기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제 10요새 내부 시설의 하층부로 들어갈 수 있어요.
거기서부터는 신중하게 이클리프와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우리의 임무인 요새 메인 시스템을 복구하러 가면 돼요.
제가 안전한 경로를 이미 확인해 두었으니 저만 따라오세요.”
이레니아는 자신 있게 말하면서 당장 앞장 서서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이아테스가 그녀의 목을 꽉 움켜쥐더니, 수직 통로의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고, 진실을 말해주실까? 넌 대체 누구냐? 우리를 무슨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지?”
이아테스의 표정과 말투는 보기 드물게 과격하고 무서워 보였다.
“왜, 왜 이러세요? 저, 이레니아라고요.”
이레니아가 당장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고통과 공포로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대체 팀장이 뭘 어떻게 하려나 싶어서 지켜보던 이르피오와 이그시아도 깜짝 놀랐다.
이아테스와 같은 팀이 된 이후, 그가 저항하지 않고 적인지 여부도 불분명한 상대에 대해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팀장, 저기, 이건 아무리 그래도······”
이르피오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팀장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그시아는 얼른 그를 붙잡고 가만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아테스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만약 진짜 이레니아라면, 어디 한번 관리국 본부와 통신을 연결해 봐라.
우리가 너를 중계자로 삼아 관리국 본부와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 믿어주겠다.”
이아테스가 위협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동시에 목을 움켜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그는 중력 속성의 브라운 코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저항하지 않는 상대방의 목뼈 정도는 충분히 박살낼 수도 있었다.
“그게 무슨 생트집이에요? 여기는 너무 깊은 지하라서 통신 연결이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러세요?
저 위로 올라가면 무슨 수를 써서 통신을 연결할 테니까, 일단은 좀 놓아 주세요. 이 판국에 애꿎은 사람을 목 졸라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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