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70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56)

이레니아가 아무리 울상을 지어가면서 억울함을 호소해도, 이아테스 또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말투만 놓고 보면 이미 상대방이 가짜라고 거의 확신하고 몰아붙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럼, 여기로 내려오기 전에, 저 위에서는 관리국과 추가로 통신 시도를 해 봤나?”

“아까 말했잖아요! 관리국에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고요!”

“그게 전부란 말인가? 그건 실제로 통신을 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말이잖아?

거기다 가령 진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재차 통신을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네가 진짜라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맙소사! 우리가 서로 얼마나 잘 아는 사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거죠?

이클리프를 피해서 숨어 다니면서 통신상으로 여러분한테 길을 안내하는 것도 저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또 관리국 본부하고 재차 통신을 시도할 겨를이 있었겠어요?

저는 심지어 여러분처럼 전투 훈련을 심도 있게 받은 사람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심도 깊은 전투 훈련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구속용 초커를 풀었으며, 또 어떻게 이클리프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단 말이냐?

이클리프가 비록 반역을 하긴 했으나, 절대로 일 처리를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내가 잘 안다.”

“제 클리엔스인 세피노가 도와줘서 운 좋게 도망칠 수 있었던 거라고 아까 다 말씀 드렸잖아요?

아니, 그럼, 제가 이클리프하고 내통이라도 했단 말인가요? 기적적으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예요?

무사히 돌아왔다고 기뻐하긴커녕,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마치 죄인 심문하듯이 따지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위험에 빠졌다가 간신히 벗어난 다른 팀원들한테도 평소 그런 말을 하곤 하나요?”

이레니아는 이런 식으로 아무리 다그쳐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끝까지 버텼다.

마침내 이아테스도 더 할말이 없어졌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보니 팀장님도 역시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군요. 제가 집행부 사람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세요.

괜히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모욕하지 마시고요.

곧 자비의 대륙이 다 멸망하게 생겼는데, 땅속 깊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한가롭게 집행부 사람 괴롭히는 게 경비부 사람의 습관인가요?”

이아테스가 입을 다문 것을 보고, 이레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층 언성을 높여가면서 역으로 상대방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제발 이것 좀 놓고 차근차근 얘기하자고요. 네?

저는 간발의 차이로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죄밖에 없어요. 정말 억울한 사람 한 명 죽여야 속이 시원해지겠어요?”

이레니아가 거듭 강하게 항의하자, 이아테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뜻밖에도 순순히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사람 하나 잡을 듯한 기세로 목을 붙잡고 몰아세우던 모습을 생각하면, 의외로 좀 쉽게 물러났다는 인상이 없지 않았다.

“알았다. 저 위로 올라가서 네가 관리국 본부와 통신을 연결한다면, 나도 더 이상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팀장으로 신중을 기하려고 이러는 것이니, 날 너무 원망하지 말아라.”

이아테스가 이렇게 말하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자, 이레니아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렇게라도 말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저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팀장님이 시키지 않아도 당연히 관리국 본부와 통신을 연결해서 상황을 파악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함부로 저를 의심하지······”

이레니아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의 정면에서 난데없이 붉게 달아오른 주먹이 날아 들어왔다.

이아테스가 손을 놓고 뒤로 슬쩍 물러서면서 빈 공간이 생기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그시아가 달려들어 건틀릿을 으스러져라 꽉 쥐고 강한 일격을 날렸던 것이다.

불 속성의 레드 아르케의 힘이 한껏 집중된 덕분에, 그 건틀릿은 완전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레니아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등뒤로 감추고 있던 오른손을 내밀어 그 주먹을 막았다.

그런데 그 오른손이 아주 이상했다. 절대로 평범한 소녀의 손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이른바 솥뚜껑 같은 손이었다.

마치 기골이 장대한 거구의 몸에서 손목만 뚝 잘라서 가녀린 소녀의 몸에 대충 이식해 놓은 것 같아서 실로 기괴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뿔싸!”

자신을 노리고 날아온 주먹을 반사적으로 막고 난 이레니아는 크게 당황했다.

신체를 변형 시키는 능력은, 이른바 ‘생기’ 속성의 그린 아르케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진짜 이레니아는 골드 코어만 2개 가지고 있을 뿐 그린 코어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구속용 초커가 채워진 채 잡혀간 사람이 갑자기 그린 코어를 각성했거나, 여기 있는 이레니아가 가짜라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능성은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으로 컸다.

거기다 만에 하나, 갑자기 그린 코어를 각성했다고 쳐도, 그걸 능숙하게 사용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린 코어로 신체를 적절하게 변형시키고 그걸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날린 주먹을 막는다는 것은, 평소 상당한 전투 훈련을 받은 요원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방어 동작이었다.

종합하면, 이건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다.

“이 가짜! 감히 누굴 속이려고 수작을 부려? 우리 팀장이 바보인 줄 알아?”

이그시아가 주먹에 이어 인정사정 없이 발차기를 날리면서 소리쳤다.

“너, 여차하면 팀장을 그 손으로 후려갈기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

내가 옆에서 다 봤어! 네가 손을 등뒤로 숨기고 은근슬쩍 변형시키는 걸 말이야.”

가짜 이레니아는 금속제 부츠를 이용한 발차기 역시 막아낸 다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악착 같이 항변했다.

“제 말 좀 들어 봐요! 이건 다 오해라고요!

제 클리엔스인 세피노가 그린 코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는 다만 그 힘을 빌려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그 변명이 무색하게도, 다음 순간, 옆쪽 바닥에 얌전히 앉아 있던 초록색 고양이 세피노가 느닷없이 으르렁거리면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고양이는 무서운 기세로 가짜 이레니아에게 달려들어 사납게 얼굴을 할퀴어 버렸다.

그로 인해 뺨에 제법 깊은 생채기가 생겼고, 당장 상처가 시커멓게 변색되면서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 부패는 혈관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어 순식간에 얼굴의 절반이 검은 선으로 뒤덮였다.

전에 숲 속에서 불한당들을 혼내주던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다만, 당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불한당들과는 달리, 가짜 이레니아는 고양이와 동일하게 그린 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짜는 자신의 온몸을 순환하는 그린 아르케를 즉시 얼굴에 집중시켜 빠르게 확산되던 부패를 손쉽게 중단시켰다.

당장 검은 선이 사라지면서 얼굴의 상처도 깨끗이 치료되었다.

“이 미친 고양이가!”

상처를 치료하자마자 가짜 이레니아는 마치 본색을 드러내듯 화를 벌컥 내면서, 솥뚜껑 같은 손을 휘둘러 세피노를 후려쳐 버렸다.

불쌍한 고양이는 맥없이 날려가서 수직 통로의 반대쪽 벽에 처 박혀 기절하고 말았다.

자기 클리엔스를 그렇게 험악하게 다루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이제 가짜에게는 변명할 말이 전혀 없어진 셈이었다.

“젠장, 고양이의 코어를 세뇌했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나더러 이 이상 뭘 어쩌라고?”

가짜 이레니아는 더 이상 정체를 감출 생각이 없어진 듯 험악한 표정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원래는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공격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이 바보 같은 놈들아! 그냥 나한테 순순히 속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젠 고통 받을 각오를 해라!”

가짜 이레니아가 무서운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치는 순간, 위쪽에서 어디서 많이 본 시커먼 물체가 뚝 떨어졌다.

이그시아와 이르피오가 놀라서 쳐다보니, 역시나 이제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구역질이 나는 이형성체였다.

당연히 하나만 떨어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곧이어 둘, 셋, 넷, 연달아 이형성체가 계속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이제 그만 좀 해라!”

뒤쪽에 서 있던 이르피오가 한탄과 짜증을 섞어서 소리쳤다.

그는 자기 수중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무기인 피스톨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또 다른 이형성체가 떨어지자 완전히 절망적인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위력이 떨어지는 호신용 피스톨 정도로는 저놈들을 막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명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아테스는 변함 없이 냉정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왼손의 방패에 자신의 브라운 아르케를 집중시킨 다음, 그 방패를 앞세우고 막 떨어져 내린 이형성체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던 것이다.

한창 기세 좋게 으르렁거리던 그 이형성체는 방패와 수직 통로의 벽 사이에 끼어서 완전히 짜부라졌다.

놈은 곧이어 끔찍한 분쇄음과 함께 뼈와 살이 모조리 으스러지면서 삽시간에 소멸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그시아도 정신을 가다듬고, 건틀릿 주먹으로 가까운 곳에 떨어진 이형성체 하나를 인정사정 없이 후려 갈겼다.

주먹을 연달아 세 차례 얻어 맞고 놈이 바닥에 나가 떨어지자, 다시 쉴새 없이 금속제 부츠로 걷어차고 짓밟아서 끝내 완전히 소멸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근접 전투 능력을 갖춘 두 사람은 이형성체와 맞서서 어느 정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피스톨 하나만 든 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이르피오가 큰 문제였다.

그도 역시 가까운 곳에 떨어진 이형성체를 향해 피스톨을 여러 발 쏴서 일단 놈의 움직임을 저지하긴 했다.

다만, 피스톨의 위력이 약한 탓에 금방 소멸시키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가짜 이레니아가 냉큼 달려와서 그를 붙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저리 가, 이 가짜야!”

이르피오가 다급하게 피스톨을 두 발 쏘았지만, 가짜 이레니아는 마찬가지로 크고 두껍게 변형시킨 왼손을 활짝 펼쳐서 마치 방패처럼 탄환을 막아 버렸다.

물론 마치 가시에 찔린 것처럼, 탄환을 막은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긴 했으나, 그런 정도의 상처 따위는 치유력이 강한 그린 코어의 소유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대방의 손바닥에서는 상처가 금방 아물어 버렸는데, 피스톨에서는 그만 총알이 바닥나 버렸다.

크게 당황한 이르피오는, 미처 피스톨을 재장전할 겨를도 없이, 개머리판을 둔기처럼 사용해서 가짜 이레니아를 정신 없이 내리쳤다.

하지만 가짜는 우악스러운 오른손으로 그 피스톨을 간단히 빼앗은 다음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앞쪽에서 마치 포옹하듯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안녕? 우리 같이 데이트 좀 할까?”

가짜 이레니아가 자신을 끌어안고 히죽 웃는 모습을 보자, 이르피오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일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게 아예 생판 모르는 얼굴이었다면 이 정도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잠시나마 같이 싸운 사람과 거의 비슷한 얼굴을 한 가짜가, 진짜라면 절대로 짓지 않을 섬뜩한 표정을 하고 코 앞에서 웃는 꼴을 보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으악! 싫어! 저리 가!”

원래 이르피오는 가짜 이레니아 보다 좀 더 키가 컸다.

거기다 근접전 전문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전투 훈련을 받은 요원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발버둥친다면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가짜 이레니아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상대방의 몸을 꽉 끌어안은 다음, 양팔의 길이를 조금 늘려 그의 등 뒤에서 양손을 단단히 깍지 끼었던 것이다.

이어서 다시 다리의 길이까지 잡아 늘리자, 순식간에 두 사람의 키가 역전되었다.

이제 붙잡힌 이르피오는 발이 허공에 뜬 상태에서 버둥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잘 있어라, 이 바보들아!”

가짜 이레니아는 그대로 문 밖으로 달려 나간 다음, 동굴 안 깊숙한 곳으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등 뒤에서 깍지를 낀 양손이 한차례 더 변형되어, 마치 용접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살과 뼈가 단단히 맞붙어 버렸기 때문에, 이르피오로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야, 이 가짜야! 이르피오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이르피오가 가짜 이레니아에게 속수무책으로 납치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그시아는 거의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위에서 계속 떨어지면서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이형성체 때문 도무지 빨리 뒤쫓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