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02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88)
“대체 같은 수법을 몇 번 쓰는 거냐?”
단검이 일레시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일루리아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아니, 오히려 이걸 기다렸다는 듯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그시아가 자기 딴에는 쉽게 막기 어려울 거라면서 작정하고 던진 단검이었건만, 일루리아는 그게 건틀릿에서 벗어나 얼마 날아가기도 전에 냉큼 달려가서 낚아채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칼날이 아니라 손잡이를 정확히 붙잡을 여유까지 있었다.
일루리아가 움켜쥔 단검을 확 잡아채자 건틀릿에서 와이어가 길게 딸려 나왔다.
사실 그녀가 정말로 노린 것은 단검이라기 보다 와이어였다. 애초부터 이그시아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 제압할 작정이었으니까.
“와이어는 이렇게 써야지!”
다음 순간, 일루리아는 그 와이어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몸을 칭칭 휘감아 포박해 버렸다.
이그시아는 반항할 틈도 없이 자기 자신의 와이어에 삽시간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 와이어 또한 페룸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몸통에서 발목까지 한번 제대로 포박 당하자 도무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치긴 했지만, 그럴수록 와이어는 점점 더 아프게 파고 들 뿐 결코 느슨해지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하다는 죄로(?) 얼떨결에 거듭 목숨을 위협 받았던 일레시아는 겁이 난다기 보다는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일루리아가 중간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절묘하게 차단해 버린 다음, 단검을 날린 이그시아까지 손쉽게 제압해 버렸으니까.
“이 아이를 매개체로 삼아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레니아와 연결하면 어떻겠냐? 그러면 정신을 차리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레시아가 감탄하고 있을 때 일루리아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다만, 이레니아와 연결된 링크를 빨리 찾으려면 두 명 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일레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이그시아에게 다가섰다.
“잠깐! 이레니아가 이쪽을 포기하고 저쪽으로 옮겨간 것 같다.”
그때 일루리아가 일레시아를 제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상공에 떠 있던 이르피오가 얼른 저격소총을 재장전한 다음 이쪽을 겨냥하는 모습을 포착했던 것이다.
다만, 여전히 배후에서 이레니아가 일일이 정신에 개입하여 공격 명령을 내려야만 하기 때문인지, 이그시아가 붙잡힌 다음, 저격 소총을 재장전하기 시작할 때까지의 반응 속도가 꽤 느렸다.
그래도 일단 재장전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이르피오 본인의 실력과 경험이 반영되면서, 재장전에서 조준까지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르피오는 변함 없이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여, 순식간에 재장전을 마치고 잠깐 겨냥하자마자 대뜸 방아쇠를 담겼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탄환이 너무 정직하게 일루리아의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이그시아가 포박 당한 걸 보고 초조해진 탓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같은 수법을 계속 쓰면 안 된다니까!”
이미 한번 저격 소총 탄환의 궤적을 비틀어 버린 경험이 있는 일루리아였다.
이번에는 훨씬 더 능숙한 솜씨로 강한 화이트 아르케의 흐름을 만들어 날아오는 불덩이를 완전히 포획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다음, 양손 사이에 붙잡힌 그 불덩이에 자신의 레드 아르케를 더하여 한층 더 거대한 화염구로 성장시켰다.
일루리아는 이르피오가 상황을 파악하고 무슨 대처를 하기도 전에, 그 화염구를 바이크를 향해 되돌려 보냈다.
바이크는 위력이 몇 배나 강해져 날아온 불덩이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성능 좋은 물건이라서 아주 심하게 파괴되지는 않았다.
다만, 원래부터 불안정하게 비행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법 강한 충격을 받고 동력계가 피해를 입자, 결정적으로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이르피오는 저격 소총을 재빨리 등에 멘 다음, 빙글빙글 돌면서 추락하는 바이크의 조종간을 붙잡고 어떻게든 다시 양력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평소부터 사용하던 익숙한 물건이 아닌데다가, 주변에 밀집한 타베스로 인해 아르케의 흐름이 워낙 불안정하여, 끝내 한번 잃어버린 동체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추락한 바이크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해수면에 일차적으로 격돌했으며, 그대로 죽 미끄러져서 암초 가장자리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거기서 바위에 또 한번 심하게 격돌하면서 마침내 완전히 멈췄다.
“저 애가 있으면 좋다 이거지? 내가 금방 데려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봐라!”
이르피오는 충돌로 인해 크게 손상된 바이크에서 휘청휘청 내려와 발을 땅에 내디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일루리아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냉큼 그를 붙잡으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그시아를 구해야지······”
이르피오는 정신 조작을 당한 상태에서도, 와이어에 포박 당한 채 발버둥치고 있는 이그시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려고 했다.
추락하는 내내 악착 같이 갖고 있던 저격 소총을 재장전한 다음,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는 일루리아를 신속하게 겨냥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방금 공중에서 추락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재장전과 조준 솜씨가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만약 평범한 상대였다면 막 추락해서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방심했다가, 근거리에서 저격 소총의 탄환을 제대로 얻어맞고 온몸이 박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일루리아는 상대방의 실력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격 소총이 자신을 겨냥하리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저격 소총의 총구가 자신을 겨냥할 때까지 일단 내버려두었다가 기습적으로 방향을 틀어 이르피오의 몸 근처로 파고 들었다.
이르피오가 당황해서 상대방을 다시 조준하고 얼른 방아쇠를 당기려 했을 때에는, 이미 일루리아가 뜨거운 총열을 꽉 움켜쥔 채 하늘 높은 곳으로 총구의 방향을 바꿔버린 다음이었다.
총구의 방향이 막 바뀌는 순간 저격 소총은 기세 좋게 발사되었으며, 탄환은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총열이 꽉 붙잡힌 상태에서는 저격 소총을 재장전을 해도 의미가 없을 터였다.
이르피오는 아예 저격 소총을 놓아 버린 다음, 근접전 태세로 전환하여, 허벅지의 케이스에서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이쪽도 물론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보급형 장비가 아니라 훨씬 성능이 좋은 군용 장비였다.
이번에는 이레니아가 개입하여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자기 방어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응이 굉장히 빠르고 동작도 대단히 민첩했다.
저격 소총에서 발사된 불덩이가 막 하늘로 치솟은 직후, 이르피오는 눈깜짝할 사이에 피스톨을 뽑아서 일루리아의 무릎 쪽을 겨냥했으며, 그대로 페룸 합금탄을 연속으로 여러 발 발사했다.
하지만 여전히 판단력과 민첩성 등 모든 면에서 일루리아가 한 수 위였다. 그 피스톨은 아무 것도 없는 맨땅에 총알을 사정 없이 박아 넣었을 뿐이었다.
원래 겨냥했던 상대방의 다리는 어느새 총구 밖으로 벗어나, 이르피오의 다리를 걸어서 보기 좋게 넘어뜨리고 있는 참이었다.
균형을 잃고 뒤로 자빠지는 순간,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피스톨도 마치 미끄러운 물건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쑥 빠져나갔다.
“거기 얌전히 있어라, 꼬마야.”
이르피오가 퍼뜩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바닥에 보기 좋게 나자빠진 상태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피스톨까지 일루리아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간 뒤였다.
일루리아는 오른손으로는 아직도 뜨거운 저격 소총의 총열을 꽉 붙잡은 상태에서, 왼손으로는 빼앗은 피스톨로 이르피오의 머리를 겨냥했다.
이르피오는 여전히 뭔가 반항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자신의 머리를 겨눈 피스톨이 문제가 아니라, 일루리아가 무릎으로 몸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본인의 의사인지 배후에서 정신에 개입하고 있는 이레니아의 뜻인지는 몰라도, 이르피오는 오래잖아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해졌다.
“그래야지.”
일루리아는 양손에 쥐고 있던 저격 소총과 피스톨을 모두 멀리 던져버린 다음, 그 대신 이르피오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 마치 범인을 체포한 것처럼 단단히 구속한 상태에서 일레시아가 있는 곳에 데려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 다음은 너한테 달렸다.”
일루리아의 말에서 어쩐지 큰 신뢰가 느껴졌기 때문에, 일레시아는 고마우면서도 은근히 부담스러운 기분이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이레니아, 이그시아, 이르피오를 구하지 못한다면, 일루리아는 이 바쁜 와중에서 그야말로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한 셈이 될 터였다.
큰 부담을 느끼고 긴장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 이 애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쪽 행차도 빨리 막아야 하거든.”
일루리아가 붙잡아 온 이르피오를 바닥에 내려 놓으면서 재촉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틈만 나면 암초 중앙의 바위산 쪽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사엘라는 암초 가장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으며, 수많은 이형성체의 무리에 둘러싸여 바위산 정상에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다.
그 모습이 느릿느릿하면서도 묘하게 장엄하여, 마치 새로 즉위하는 여왕이 대관식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옥좌에 앉으려고 행차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엄살 부리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요. 최소한 우리가 있는 이 주변만이라도 타베스를 좀 밀어내 주실 수 없을까요? 자꾸만 속이 메스꺼워서 집중이 안 되네요.”
일레시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일루리아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케의 힘으로 신체를 재구성한 그녀도 밀집한 타베스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코어의 출력까지 저하되었을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야 오죽 괴롭겠는가?
어쩐 일인지 이그시아와 이르피오는 더 이상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마치 인생 다 포기한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 둘이 혹시나 기습적으로 무슨 반항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방심하는 게 바로 저쪽이 노리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한가하게 다 따질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동안 타베스를 밀어낼 수는 있겠지만, 이 암초 전역의 타베스 밀도가 너무 높아서 나로서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서둘러야 한다.”
일루리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좌우로 뻗고, 자신과 일레시아를 포함하여 주변을 감싸는 강력한 아르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3개의 레드 코어와 2개의 화이트 코어를 모두 최대한 활성화시켜서, 문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서 만들어낸 소용돌이였다.
레드 아르케와 화이트 아르케가 한데 뒤섞여 무섭게 소용돌이 치는 뜨거운 바람은, 일루리아와 일레시아 주변에 밀집해 있던 타베스를 일시적으로나마 멀리 밀어내고 안전한 피난처를 만들어 주었다.
에너지 장벽이 행성 카리타스 전역에 가득 찬 타베스를 밀어내고, 자비의 대륙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구도의 축소판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메스꺼운 느낌이 사라지고 조금 기분이 안정된 일레시아는, 당장 왼손을 이그시아의 이마에, 오른손을 이르피오의 이마에 얹었다.
곧이어 자신의 골드 코어를 최대 출력으로 활성화시켜서, 두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코어에 강제로 접속을 시도했다.
“만약 아직도 내게 매니저 권한이 남아 있다면······”
일레시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접속을 시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그시아와 이르피오의 코어에 여전히 자신이 매니저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진심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이노비아가 매니저 역할을 인수한 다음, 일레시아는 태스크 포스팀의 매니저 권한을 박탈 당했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코어 내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메인 프레임에서 그녀는 현재 여전히 매니저로서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단순히 다들 바빠서 정신줄을 놓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태스크 포스팀과 관리국 본부 사이의 연락이 너무 빨리 두절되어 버렸기 때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되면 귀중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가 있을 터였다.
심지어 코어 내 프레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정신 조작을 한 이사엘라조차 매니저 권한까지는 미처 건드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시간이 부족한 탓에 정신 조작을 꼼꼼하게 완료할 겨를이 없어서, 이레니아가 일일이 개입하여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 와중에 한가하게 매니저 권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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