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12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98)
‘아무리 힘들어도 이건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내가 실패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아, 이런 긴장감을 느껴보는 것도 오래간만이로구나.’
타베스 구름 속을 위태롭게 날아가면서, 일루리아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쩐지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처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종종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꼭 해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쉬웠다.
그런 책임감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따라서 싫든 좋든 막중한 부담을 짊어지고 사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과거 그녀의 깨달음이었다.
오래 전에 깨달았음에도 최근 잠시나마 잊어버렸던 그 이치가, 이번에 모처럼 마음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다.
타베스 구름 내부에서 아르케가 약간 남아 있는 곳만 골라 이리저리 헤집어가면서 비행하다 보니, 이사엘라가 있는 곳까지 짧은 거리를 날아가는 데에도 구불구불 한참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르케가 남아 있는 부분은 점점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좀 전까지는 아르케가 남아 있는 부분이 끊어질락말락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선마저 뚝뚝 끊어져서 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는 그 작은 점들마저 완전히 사라진, 아르케라고는 정말 단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진공 구역’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진공 구역은 마치 이사엘라의 주변을 마지막으로 든든하게 보호하고 있는 일종의 장막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위태로운 비행조차 불가능한 타베스의 장막에 가로 막혔다면 언뜻 생각하기에 절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일루리아는 오히려 반가운 기분부터 들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이건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 아닌가? 지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장막을 넘어가면 바로 그곳에 목표인 이사엘라가 있을 것이다.
눈 앞의 장막에는 ‘디딤돌’로 삼을 만한 아르케의 점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고 확신한 일루리아는, 새삼 마음을 다잡으면서 우선 그 장막 앞 마지막 ‘디딤돌’에 있는 한 방울의 아르케까지 모조리 흡수했다.
곧이어 그걸 최대한 이용하여 눈앞에 펼쳐진 타베스의 장막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돌진했다.
장막 안으로 돌입하는 순간 완전한 암흑과 침묵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뒤덮어 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암흑과 침묵을 돌파하는데 걸린 시간은 실상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르케의 관점에서 보면 그곳은 실질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진공인 영역.
짧은 구간을 지나는 짧은 시간 동안, 문자 그대로 숨이 턱 막히고 모든 감각이 마비되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확 밀려왔다.
아무 대비도 없이 구인류가 맨몸으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다면, 아마도 이런 무서운 기분을 느끼다가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너무나 길게 느껴진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갑자기 일루리아의 눈앞에 한 소녀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마침내 타베스의 장막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소녀는 사방팔방으로 가느다란 흑색 섬유를 뻗어내고 있어, 마치 복잡한 신경망의 중추부처럼 보였다.
저게 바로 이사엘라라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충 살펴 보니, 이미 격변 현상이 시작되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클라데스화를 한층 더 가속시키기 위함인지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이, 거기 너 잠깐 기다려!”
다급해진 일루리아는 혹시 이미 늦은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속에서 용감하게 바이크를 타고 이사엘라를 향해 돌진해 갔다.
물론 바이크의 동력계는 완전히 마비된 상태였고, 그저 미약하게 남은 관성을 이용하여 허우적허우적 다가가는 정도였다.
그렇게 다가가 봤자, 가까이 갈수록 숨이 막히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오히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목표가 확실하게 눈 앞에 보이고 있다는 점이 그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과 목표가 명확히 보이는 상황의 차이는 은근히 큰 것이었다.
“감히 누가 누구한테 명령하는 거야?”
이미 클라데스화가 많이 진행되어 스스로의 거대함과 강력함에 도취되어 있는 이사엘라는, 변변한 무기도 없이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바이크 한 대에 올라타고 다가오는 일루리아의 모습을 보자 실로 어이가 없었다.
이토록 위대한 자신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해 오는 그 모습이, 거인에게 덤벼드는 작은 날벌레처럼 하찮게 여겨질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가만 내버려두어도 어차피 동력계가 마비된 그 바이크는 곧 추락해버릴 게 뻔했다.
하지만 이사엘라는 그 건방진 일루리아를 그냥 곱게 추락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뜻에 따라, 곧 흑색 섬유로 연결된 이형성체들이 하찮은 날벌레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덤벼들었다.
무더기로 덤벼든 이형성체들이 순식간에 바이크를 몇 겹으로 둘러싸자,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손아귀에 붙잡혀 사정 없이 쥐어 짜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고통이 극심했는지, 문득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기까지 했다.
스스로의 힘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상처 입고 땅에 떨어진 아기 새를 구해준답시고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가 그만 숨통을 짓눌러 죽여버린 적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업보를 돌려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우와, 이거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데?’
일루리아는 그야말로 와인 압착기에서 쥐어 짜이는 포도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심지어 와인 압착기의 포도만도 못한 신세였다. 그냥 물리력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몸은 아르케의 힘에 의해 세포 하나하나까지 완전히 재구성된 상태라, 체내에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아르케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르케가 강력한 타베스의 압력에 의해 몸 밖으로 자꾸만 밀려나려 하는 상황이었다.
아르케에 의해 재구성된 세포가 바로 그 아르케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아르케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물리력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원래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자 이하 단위로 분해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아무리 코어가 다섯 개나 되는 일루리아라고 해도 오래잖아 몸이 분해되고 말 터였다.
거기다 지금은 가슴을 창에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신체의 강인함이 평소 보다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급하게 대충 치료한 그 상처는 제법 심각한 약점으로 작용하는 중이었다.
그곳을 통해 대량으로 침투한 타베스가 세포를 급속히 녹이면서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세포가 분해되는 속도와 자가 치유하는 속도가 엇비슷했지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하고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때 갑자기 와인 압착기에 들어간 포도 같은 기분이 약간 완화되었다.
이사엘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소 힘을 빼고 숨통을 틔워주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일루리아도 간신히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다만, 그 짧은 압박만으로도 이미 몸 안팎에서 세포의 손상이 상당히 심했다. 언뜻 봐도 겉으로 드러난 피부 곳곳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던 것이다.
마치 산성 용액 속에 던져 넣어서 한번 헹군 다음에 다시 끄집어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당신 일루리아 맞지?”
이사엘라는 만신창이가 된 일루리아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바이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이형성체의 무리, 이제는 이사엘라의 확장된 신체 일부가 되어버린 그 이형성체들을 매개체로 삼아서 이루어지는 대화인지라 일루리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낯선 대화 방식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비웃는 듯한 말투까지 생생하게 느껴지자, 일루리아도 얼른 최대한 정신을 바싹 차리면서 대꾸했다.
“그렇다. 그러는 너는 이사엘라가 맞지?”
“그래. 난 당신을 잘 알아. 당신은 오래 전 성녀를 도와 이 저주 받을 대륙에 보호 시설인지 뭔지를 건설했던 사람이지?
이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낸 원흉 가운데 한 사람. 전설의 영웅인지 뭔지는 몰라도, 오늘 절대로 나한테 용서 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이사엘라는 비웃음에 이어 경멸에 찬 말투로 호통을 쳤다.
그녀는 전설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일루리아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도취되어 기세가 등등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원흉에 대해 속으로만 분노할 뿐 실제로는 아무런 복수도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잠깐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전설의 영웅을 만신창이로 만들 만큼 강해지지 않았던가?
그녀의 자신감은 점점 더 고양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너에게 고통을 안겨준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륙을 멸망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
넌 지금 힘을 손에 넣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전형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어.”
일루리아가 고통 속에서도 차분하게 타이르자, 이사엘라는 오히려 더 분노했다.
“감히 누가 누구한테 훈계하는 거야? 가해자라니? 난 영원한 피해자이지 절대로 가해자가 될 수 없어!”
분노로 으르렁거리는 이사엘라의 심리가, 일루리아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다.
당장 와인 압착기의 포도 신세는 면했지만, 여전히 짙은 타베스 안에 갇혀 있었고, 아까보다는 낫지만 온몸의 세포가 분해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숨이 턱 막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전설의 영웅이라고 존경 받으며 살아온 당신이, 나 같은 카리타스 오리지널의 마음을 알아?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피해자가 될 운명이었어.
오로지 이 대륙을 위해 헌신하라는 사명, 결코 내가 원한 적이 없는 그 사명이 먼저 주어진 상태에서, 그 사명에 적합한 유전자 디자인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당신이 한번 말해 봐. 내가 지금까지 잘못한 게 도대체 뭔데? 응?”
“난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널 동정한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럼 잘못한 게 도대체 뭐냐?
정녕 이 불쌍한 사람들을 싹 쓸어버려야 네 속이 시원해진단 말이냐?”
“뭐? 불쌍한 사람들? 그럼, 나는 불쌍하지 않단 말이야?
한번 생각해 봐.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어떤 미친 놈이 날 납치해서 불쌍한 사람과 족쇄로 연결해 놓고 평생 그 사람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상황을 말이야.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한들, 나한테 희생을 강요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한테는 그 강요된 희생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어.
족쇄를 끊어 버리고, 그 자칭 불쌍한 사람을 내팽개쳐 버린 다음, 부당하게 고통을 안겨준 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딱하구나. 그게 바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길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그래, 네 말대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너에게 고통을 안겨준 원흉 가운데 한 명이 틀림 없다.
그러니 복수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나만 죽여라. 소립자 단위로 분해해 버리든 마음대로 하란 말이다.
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고 몇 번이라도 고통스럽게 죽겠다.”
“뭐? 기꺼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당신이 뭔데 감히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거야?
살인자의 손톱에 낀 때가 나서서 자신이 살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천만에!
나는 이제 손톱에 낀 때가 아니라 진짜 살인자한테 복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어! 당신 같은 하찮은 존재는 물론이고, 이베리스와 카리타스의 부왕, 그리고 이 은하계의 아르케 자체에 복수할 거란 말이야.”
이 호언장담을 듣고 일루리아는 괴로운 와중에서도 혀를 끌끌 차면서 대꾸했다.
“얘야, 내가 비록 카리타스 오리지널이 아니라서 네 심정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한때 스스로의 힘을 주체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
그런 식으로 오만하게 굴다가 망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 두 명 본 게 아니다. 제발 부탁인데, 이쯤에서 이런 짓을 그만 두는 게 어떠냐?
나는 클라데스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우리가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건,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여기서 그만 두고 더 큰 죄를 짓지 말아라. 제발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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