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43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29)
“약속하지. 반드시 이 시스템이 셧다운 되기 전에 돌아와서 다시 생체 모듈 역할을 하겠어.”
일레시아가 힘주어 말하자, 이사엘라가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 프로그램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나도 그 말을 믿고 최선을 다해 협력할게.”
소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시스템이 안전 모드에서 대기 모드로 전환하려면 형식적으로나마 생체 모듈의 명령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이제 내 손을 붙잡고 모드 전환 명령을 내리도록 해. 그리고 명심해. 너한테 주어진 시간은 몇 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일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상하게도 아까와는 달리 손이 별로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들어가 있어서 굳게 손을 맞잡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10요새 메인 시스템 유휴 관리 프로그램 100% 가동. 시스템 안전 모드에서 대기 모드로 전환. 모든 생체 모듈 일시 접속 해제.]
일레시아가 내린 명령이 실행되자, 당장 눈 앞에 있던 유령 같은 소녀는 물론, 어둠 컴컴한 가상 공간 전체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제어 캡슐 안에서 눈을 번쩍 떴다. 마침 캡슐은 레일을 따라서 벽에서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감고 시스템에 접속해 있는 동안에는 전혀 몰랐는데, 이제 보니 배양액에 잠긴 채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좁은 캡슐 안에서 오랜 세월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짱한 정신으로는 실로 견디기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레시아 요원, 괜찮습니까?”
이아테스가 얼른 가까이 다가와서 바닥으로 내려온 제어 캡슐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새 이클리프가 쓰던 부러진 창을 완전히 수리한 다음, 일레시아가 들어간 제어 캡슐에서 무슨 변화가 생기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전 아무렇지 않아요. 그보다 이레니아는 어떻죠?”
일레시아는 얼굴에서 크리스탈룸 마스크가 벗겨지고 캡슐의 뚜껑이 열리자마자, 배양액 밖으로 냉큼 빠져 나왔다.
온몸에서 특수 배양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급하게 데이터 센터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메인 제어 캡슐 쪽으로 달려간 그녀는, 문제의 캡슐 역시 천장에서 레일을 타고 스르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크게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레니아!”
메인 제어 캡슐이 바닥으로 내려와서 멈추자마자, 일레시아는 얼른 뚜껑을 열고 그 안에서 죽은 듯이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는 이레니아를 밖으로 끄집어 냈다.
이레니아도 마찬가지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배양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기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어서 얼굴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익사한 시체 같다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는 숨이 잘 붙어 있었으며, 코어 기능도 완전히 상실되지 않은 상태라서 어지간히 마음이 놓였다.
“일단 이 구속구부터 떼어내야지.”
일레시아는 기쁘고 반가운 와중에서도, 여전히 이레니아의 목에 채워져 있는 구속용 초커가 무척 신경 쓰였다.
“어라? 구속구의 기능이 이미 상실된 상태네?”
일레시아가 크리스탈룸 결정체 3개로 암호화되어 잠긴 그 초커를 풀려고 얼른 손을 갖다 대 보았더니, 뜻밖에도 그 구속구는 이미 기능이 완전히 멈춰 있는 상태였다.
이레니아의 코어와 정신을 구속하기 위해 채워진 초커였는데, 구속 대상자인 이레니아가 완전히 기절했을 뿐만 아니라 코어도 제법 큰 손상을 입어 기능 상실 일보 직전까지 갔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기능이 멈춘 게 아닐까 싶었다.
밧줄로 꽁꽁 묶어 둔 사람이 영양 실조에 걸려서 뼈만 앙상하게 남는 바람에, 꽁꽁 묶어 두었던 밧줄이 헐거워져서 자기 혼자 풀려버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코어가 아니라, 구속구가 기능 상실이 되다니,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이유야 어쨌든,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바쁜 일레시아의 입장에서는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정말 미안해.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일레시아는 이레니아를 캡슐 밖으로 꺼내어 다정하게 품에 안고 기쁨 속에서 연신 사과와 위로의 말을 중얼거렸다.
상대방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뻔히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한가하게 언제까지나 회포를 풀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팀장이 이 아이를 제가 방금 전까지 들어 있었던 캡슐 안에 눕혀 주겠어요?”
최대한 빨리 마음을 가다듬은 일레시아가 이아테스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아테스도 상황이 급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이레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일레시아가 들어 있었던 보조 제어 캡슐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배양액 안에 눕혀 놓았다.
“세피노, 어디 있니? 네 주인한테 돌아가야지.”
곧이어 일레시아가 이렇게 소리치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초록색 고양이 세피노가 냉큼 달려와 이레니아가 누워 있는 제어 캡슐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그 제어 캡슐 안에서 강제로 바이오 필터 노릇을 해야 했던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해도, 이레니아의 클리엔스로서 자기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큰 모양이었다.
“그 상태에서 뚜껑을 닫고 생명 유지장치만 작동시키세요.
그러면 세피노가 지닌 그린 코어 덕분에 배양액 내에서 치유력이 크게 증폭되어, 이레니아의 손상된 코어가 한층 더 빨리 회복될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운명에 맡기도록 하죠.”
일레시아가 메인 제어 캡슐의 배양액 안으로 들어가 누우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아테스는 시키는 대로 제어 캡슐의 뚜껑을 닫은 다음 생명 유지장치만 가동시켰다.
그러자 캡슐 안의 배양액이 또다시 세피노의 그린 코어 덕분에 초록색으로 은은하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밖에 제가 더 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시킨 일을 모두 마친 이아테스가 재빨리 메인 제어 캡슐 곁으로 돌아왔다.
주어진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서도 다행히 모든 일이 아무런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일레시아는 속으로 크게 안도하면서 배양액에 누워서 얼굴만 밖으로 내민 상태로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몇 가지만 말씀 드릴게요.
첫째, 제 말이 다 끝나면 뚜껑을 닫은 다음, 아까처럼 생명 유지 장치를 가동시키고 제어 캡슐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도록 하세요.
그러면 저는 이번에야 말로 진짜 이 요새의 메인 시스템을 운영하는 유일한 생체 모듈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둘째, 골드 코어가 없는 이아테스 팀장은 여기 있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 차라리 요새의 격납고로 가서 그곳에 비치되어 있는 바이크를 타고 밖으로 나가도록 하세요.
아까 보니까 그새 이클리프가 쓰던 창을 수리한 것 같던데, 잘 하셨어요. 그 창으로 일루리아님을 도와주시는 게 지금 팀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
격납고의 위치는 제가 아까 떨어뜨려 놓았던 구식 태블릿 안에 저장된 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격납고의 출입문은 잠시 후에 제가 메인 시스템의 통제권을 장악하면 열어드리도록 하죠.”
이아테스는 이 말을 듣고 잠깐 부하들이 들어 있는 캡슐 쪽을 바라보았다.
캡슐 속에 들어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해도, 여전히 부하들이 걱정되는 마음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레시아의 말처럼 자신이 여기 있어 봐야 딱히 무슨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
시키는 대로 바이크를 타고 밖에 나가서 일루리아를 도와줄 방법을 찾는 편이 훨씬 더 좋을 듯했다.
“그것도 잘 알겠습니다.”
이아테스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시아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마치 유언을 남기듯이 또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이런 식으로 생체 모듈이 되면 어쩌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팀장 같은 훌륭한 요원과 함께 일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저 대신 일루리아님을 잘 도와주세요.”
그 유언 같은 말에, 이아테스는 새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캡슐 안에 누워 있는 일레시아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서 경의를 표했다.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목숨을 걸고 일루리아님을 도울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이아테스의 말을 듣고 일레시아가 덧붙여 말했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면, 팀장의 부하들이나 저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꿈도 꾸지 마세요.
이번 사건이 무사히 해결될 경우,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국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이 요새를 장악하고 이런저런 뒤처리를 하려고 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무모하게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간,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괜히 그 요원들과 충돌만 일어나게 될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돌아오지 마세요. 아셨죠?”
실제로 이아테스는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사건이 무사히 해결된 다음에 일루리아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와서 부하들의 안전을 확인하는 한편, 일레시아를 제어 캡슐에서 꺼낼 방법을 찾아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골드 코어가 없는 이아테스와 일루리아는 나중에 이곳으로 돌아와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오히려 사건이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뒤처리를 하려고 우르르 몰려올 게 뻔한 관리국 요원들과 싸움이나 벌어지기 쉽겠지.
그는 그만한 이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부하들과 일레시아 요원, 이레니아의 운명은 관리국의 손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요.”
“그래요. 그러니 팀장은 사건이 해결된 다음에 관리국의 손에서 벗어나서 일루리아님과 함께 어딘가로 멀리 도망쳤으면 합니다.”
관리국의 손에서 벗어나서 멀리 도망쳐라.
이 말을 듣고 이아테스는 속으로 새삼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충직하게 관리국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했는데, 이제는 정신을 차려 보니 상실자가 된 부하들까지 다 버리고 관리국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도 딱히 무슨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리국의 지시에 따라 자비의 대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린 상황.
몇 번 다시 생각해도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망친다고 해 봤자, 결국 이 대륙,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륙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리메스 내에서 도망칠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관리국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겠습니까?”
이아테스는 일레시아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무 답답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무의미한 한탄을 입밖에 내고 말았다.
일레시아도 그 억울한 속마음을 짐작하면서 마찬가지로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일루리아님과 상의해 보면 무슨 좋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막연하면서 하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아테스는 자기 보다 훨씬 억울한 처지인 일레시아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저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혹시 그밖에 일루리아님께 전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지금은 그것뿐입니다.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딱히 더 떠오르는 게 없네요.”
일레시아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메인 데이터 센터 한쪽 구석에 있는 구식 전기회로 기판 쪽에서 갑자기 불꽃이 팍 튀어서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무래도 저더러 빨리 다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것 같군요. 저는 이만 정말로 생체 모듈 노릇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루리아님과 이아테스 팀장, 두 분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일레시아는 이 말을 남기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아테스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그녀가 들어 있는 메인 제어 캡슐의 뚜껑을 닫았다.
이어서 생명 유지 장치를 가동시키고 제어 캡슐의 기능을 활성화시키자, 일레시아는 다시 한번 크리스탈룸 마스크에 얼굴이 덮인 채, 캡슐과 함께 레일을 따라 전면의 벽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메인 제어 캡슐이 원래 있던 곳에 자리를 잡자, 곧 아르케 회로가 메인 시스템과 본격적으로 연결되었다.
“약속대로 돌아왔군. 하지만 좀 아슬아슬했어.”
일레시아가 요새 메인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가상 공간에 재 접속하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소녀가 그녀를 맞이했다.
혼자서 시스템이 셧다운 되지 않게 유지하느라 힘이 들었는지, 아까 보다 한층 더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힘을 거의 다 써서 완전히 사라지기 일보직전인 맥 빠진 유령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다행이야.”
일레시아는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마치 친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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