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2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48)
이베리스가 제어 캡슐로 들어온 미약한 신호를 분석해 보니, 그건 골드 아르케가 아니라, 일루리아가 지닌 레드 아르케와 화이트 아르케가 담아낸 미세한 의식의 단편인 듯했다.
생명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게 아르케에 일종의 강한 떨림 현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골드 아르케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아주 짧고 미약한 정보 파편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미약한 정보 파편이 신호화되어 쿠라토르의 몸체를 통해 이베리스에게까지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베리스는 별 생각 없이 그저 호기심에서 그 신호를 적절히 증폭하고 노이즈를 제거하여, 자신의 골드 코어로 받아들여 머릿속에서 재생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단편적인 의식의 내용은······
“아그리아나! 그만 둬! 성녀가 살아 있다면 슬퍼할 거야!”
이베리스는 일순 일루리아가 예전에 성녀와 함께 행동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면서 눈물로 하소연하는 환상을 보고 경악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머릿속에서 재생을 했기 때문에, 마치 생생한 악몽을 꾼 것처럼 순간적으로 온몸에 쫙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베리스가 알기로 분명히 일루리아의 과거 기억은 엄중히 봉인된 상태다.
일루리아는 오래 전, 이 대륙을 위해 자신의 여생을 다 바칠 것을 맹세했을 당시, 그 결연한 각오를 담아서 과거 은하계 전역을 무대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원래 이름 ‘루드레이아’를 버렸다.
일루리아가 먼저 제안하고 솔선수범을 보임에 따라, 이베리스와 이스카엘 등 다른 동지들도 모두 과거의 이름을 버렸으며, 그 대신 다들 여느 평범한 관리국 요원들처럼 I로 시작하는 관리번호와 I로 시작하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또한 일루리아 등 동지들은 꼭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그리고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거의 추억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억도 전부 지웠다.
심지어 관리국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자료까지 전부 검열해서, 과거에 루드레이아가 무슨 일을 했다는 대목은 일루리아로, 아그리아나가 무슨 일을 했다는 대목은 이베리스로 바꾸어 놓기까지 했다.
다만, 언젠가 이 대륙에서 맡은 바 의무를 다 하고 떳떳하게 떠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돌려받겠다면서, 모두들 봉인된 기억의 백업 데이터를 이베리스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이베리스도 그 기억의 백업 데이터를 잘 보관하고 관리만 해야 할 뿐, 그걸 함부로 들여다 보거나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서는 안 될 터였다.
하지만 이베리스는 결국 홧김에 금기를 어기고 남몰래 과거 ‘아그리아나’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아버린 상태였다.
이스카엘, 일루리아 등 과거의 동지들이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로 곁을 떠나가자, 외롭고 분노하는 마음 때문에 울컥해서 그녀 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이베리스는 언젠가 이스카엘이나 일루리아와 정면 충돌하게 되면,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충분해야 한다는 이유로 멋대로 기억을 되찾은 스스로를 합리화 하긴 했다.
다만, 내심 후회와 자책도 컸기 때문에, 나중에 일루리아의 부하인 이크루아가 자신과 주군인 일루리아, 그리고 동료인 이델리온의 기억 데이터를 몰래 백업해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죄책감 때문에 눈감아주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도대체 일루리아는 어떻게 자신의 본명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부하인 이크루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백업 데이터로 주군인 일루리아의 기억을 어느새 되살려준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교활한 꼬마 이크루아를 진작에 제거해 버릴 걸 그랬다.
자기 혼자 기억을 되찾았다는 자책감에다, 일루리아의 또다른 부하인 이델리온이 상실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정 등을 고려하여 이크루아를 그냥 잠시 방치해 두었던 게 큰 실수였던 모양이다.
이유야 어쨌든, 순간적으로 너무나 깜짝 놀란 이베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쿠라토르의 손에서 약간 힘을 뺐다.
덕분에 일루리아는 온몸이 완전히 바스러지기 일보직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쿠라토르의 양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는 상태임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제대로 의식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스카엘님! 일루리아님이 위험합니다! 빨리 가서 구해야지요!”
한편, 암초 상공에서는 이아테스가 이스카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재촉하는 중이었다.
아까는 제대로 못 알아들었던 이스카엘도, 이스카엘도 똑똑히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었고 무슨 대답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는 이미 일루리아를 순교자로 만들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낫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그러면 일루리아가 우리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혼자서 뒤에 남은 의미가 없지 않느냐?
일루리아의 뜻을 존중해서라도 우리는 어서 빨리 탈출하도록 하자.”
이스카엘이 서글픈 표정을 지으면서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그의 진심을 의심하기 어려울 만큼 진실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였다.
하지만 이아테스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책략가인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상대방이 연극을 한다는 사실을 당장 눈치채고 속으로 벌컥 화가 났다.
‘설마 이 인간, 일루리아님을 버리고 갈 셈인가?
일루리아님을 순교자로 만들어서 이베리스 국장의 이미지를 깎고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아테스는 대뜸 이스카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 높여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나마 간신히 참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인내심과 성실성 덕분이었다.
그는 억지로 화를 참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루리아님을 버리고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저는 아무 도움이 못 될지라도 저기 내려 가서 함께 죽겠습니다.”
이아테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기 내려가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스카엘이 일루리아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문제는 다르다. 일루리아가 저대로 저기서 혼자 외롭게 싸우다 죽게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사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멀리서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는 건 결코 명예로운 전사의 처신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당장 저 아래로 내려가서 일루리아와 함께 죽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듯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네가 타고 있는 바이크는 너하고 생각이 좀 다를 것 같은데?”
이스카엘이 손가락으로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실제로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는 이아테스가 조종간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가자고 재촉해도 꿈쩍 하지 않았다.
답답한 이아테스가 마치 사람에게 항의하듯, 일루리아를 죽게 내버려둘 거냐고 바이크를 상대로 항의해 봐도 소용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고집도 부릴 줄 아는 그 바이크는 끝내 자기 주군을 구하러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물론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가, 자신의 주인도 아닌 이스카엘의 뜻에 따라 꿈쩍도 하지 않는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 바이크는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전투 경험을 쌓아온 영물이니 만큼,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긴 할 터였다.
하지만 이아테스로서는 그 속 뜻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프로토 판테라와 속 마음을 주고 받을 만큼 심오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이아테스가 답답해 하고 있을 때, 이스카엘은 살아남은 급진파의 잔당 4명을 자기 주변에 끌어모아 도망칠 준비를 했다.
비록 급진파의 대다수는 이상론에 사로 잡힌 순진한 학자들이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관리국 전투 요원들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지금도 오늘 사실상 처음 전투에 나온 학자들이 탄 바이크는 모조리 추락해 버렸으며, 전투 경험이 있는 요원들이 탄 바이크는 거의 대부분 살아 남은 상태였다.
이들 4명이 바로 그 전투 요원 출신 급진파였다.
곧이어 남아 있는 관리국의 전투요원들도 바이크를 몰아서 이스카엘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이스카엘은 즉시 자기 주변에 강력한 실버 아르케의 파동을 방출하여 적 바이크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관리국의 공중 전투용 제식 바이크인 ‘로열 윈드호버’ 타입은 당연히 화이트 아르케를 동력으로 사용한다.
비록 어느 정도 동력계에 대한 방호 대책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이스카엘처럼 출력이 강한 사람이 방출한 실버 아르케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칫 동력원인 크리스탈룸 결정체 자체가 초기화 되면서 추락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때문에 관리국의 바이크들은 이스카엘이 퍼뜨린 실버 아르케 파동의 범위 밖에서 빙빙 돌면서 필사적으로 열화 우라늄 탄을 쏴 댔다.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는 워낙 장갑이 두꺼워서 열화 우라늄 탄을 수백 발 정도 맞아도 끄떡 없을 테지만, 이스카엘이 타고 있는 루미너스 이글렛 바이크와 급진파 잔당들의 바이크는 열화 우라늄 탄 집중 사격을 받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스카엘과 급진파 잔당들은, 이리저리 공중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열화 우라늄 탄 집중 사격을 피하는 한편, 적의 빈틈을 틈타 전투 구역을 완전히 이탈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도 자발적인 의지로 그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이아테스는 이스카엘을 보호해줄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아래로 내려가서 일루리아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지만,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는 아무래도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렇게 암초 위 공중에서 막바지 치열한 난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번에는 뜻밖에도 행성 카리타스의 대기권 밖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강하해 오는 것이 보였다.
이스카엘은 우연찮게 위쪽을 바라보다가 불덩이의 강하를 가장 먼저 목격하고 흠칫 놀랐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기권 밖에서 강하해 오는 물체라면 아무래도 부왕궁과 관련이 있을 터.
그는 이제 은거 성자 행세를 하면서 부왕궁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연극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부왕궁과 얽힌다는 건 어쩐지 달갑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치 운석처럼 강하해온 그 커다란 물체는 잠시 후, 뜨거운 열기가 식으면서 본래의 푸른색 동체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이스카엘은 그 정체를 확인하자 더더욱 달갑지 않은 심정이 되었다.
그 푸른색 물체의 정체는 바로 부왕궁 근위대 소속 기갑군 사령관 이센티스의 전용기 ‘마제스틱 오르카’였던 것이다.
“하필 이센티스가 여기 나타났군. 이거 정말 분위기가 안 좋은데.”
이센티스 또한 이스카엘, 이베리스, 일루리아 등과 함께 과거 성녀를 따르던 집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성격이 엄격하고 항상 카리스마가 넘쳐서, 성녀 휘하의 집단에서는 일종의 군기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스카엘은 물론 이베리스까지 이센티스 앞에만 섰다 하면 이상하게 위압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만, 워낙 성격이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일루리아만큼은, 이센티스가 아무리 엄격하게 야단을 치고 잔소리를 해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와 친하게 지낸 바 있었다.
“모두 지금 당장 싸움을 멈춰라!
나는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 황제 폐하의 칙명에 따라 행성 카리타스를 맡아서 다스리고 있는 부왕 전하의 근위대 소속 기갑군 사령관 이센티스다.”
이센티스는 연령 등급 28의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체격을 지닌 남자였다.
가지고 있는 코어는 총 6개로, 물 속성의 블루 코어 4개와 뇌 속성의 퍼플 코어 2개.
따라서 규정에 맞춰서 그리 길지 않은 짧은 머리를 파란색과 자주색으로 적절하고 염색하고 있었다.
과거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에서 활동할 때의 별명과 이름은 폭룡의 기사 ‘블리트로프’였으며, 200년 전 지상에서 활동할 때의 이름은 가르데스였다.
자비의 대륙 지상 거주민들은 그를 대륙 서방에 잡은 거대한 왕국을 건국한 영웅, 용맹하고 위엄 넘치는 ‘가르데스’ 대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손에는 자줏빛 칼날이 번득이는 거대한 언월도를 쥐고, 몸에는 꼭 맞는 파란색의 갑옷을 착용한 이센티스는, 전용기인 마제스틱 오르카의 푸른색 동체 위에 웅장한 기둥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제스틱 오르카의 자체 증폭 시스템에 의해 증폭된 다음, 육성과 골드 아르케로 암초 전역을 향해 우렁차게 방출되었다.
“성스럽고 고귀하신 부왕 에렌라르테 전하와 부왕궁의 재상 그로스테페 각하, 부왕궁의 근위대 총사령관 스클란디르 각하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
그에 따라, 지금부터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제 10요새 일대는 관리국이 아니라 부왕궁 근위대 기갑군이 일시적으로 관할하며, 그 집행은 본 사령관이 담당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목소리가 들리는 전 구역에 있는 요원들은, 지금 당장 모두 전투 행위를 중지하고 본 사령관의 지시에 복종하기 바란다.”
이센티스의 목소리는 실로 위엄이 넘쳤다.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 다니는 이스카엘과 급진파 잔당들을 격추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정신 없이 열화 우라늄 탄을 날려대던 관리국 전투 요원들도, 그 위엄 넘치는 목소리에 눌려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난장판으로 변했던 암초 상공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