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68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154)
이드리스의 자신 없는 말을 듣고, 이스카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도 여러 가지 정황상 이클리프란 자는 십중팔구 죽었을 것 같다. 그나마 이셀리아가 한번 이용해 볼 만한 존재겠지.
너는 미꾸라지 같은 이니에스는 일단 내버려두고, 그 이셀리아라는 요원의 행방부터 수소문해 봐라.
만약 이미 죽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살아 있다면 반드시 관리국 보다 먼저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
이아테스가 내 지시에 따라 가짜 이델리온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셀리아의 신병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스카엘은 이드리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한편, 공을 세워서 죄책감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 공을 세워서 이니에스를 놓친 실수를 만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드리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자, 이스카엘은 다시 이덴바르를 바라보았다.
“중간에 얘기가 좀 복잡하게 꼬였지만, 어쨌든 가짜 이델리온 건은 내가 생각한 대로 추진하기로 하자.
너는 급진파에게 이아테스와 프로토 판테라 바이크를 보여주면서, 일루리아가 자신의 바이크에 태워서 파견한 신임하는 부하 이델리온이라고 소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급진파가 과연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똑똑한 학자들이 많은 집단인데요?”
이덴바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학자들이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다는 걸 자네가 몰라서 그러나?
저들은 지금 많은 유력 인사를 잃고 혼란에 빠져 있으니, 적어도 네가 걱정하는 것보다는 쉽게 속아 넘어갈 거야.
만약 혹시라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내 좋은 친구 이덴바르, 자네가 알아서 잘 대처하길 바란다.”
“결국 또 저한테 다 떠 넘기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덴바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이스카엘도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아참, 덤으로 내 바이크에 실려 있는 관을 내려서 이사엘라의 육신도 함께 넘겨줘라. 급진파가 그토록 원하던 중요한 연구 재료가 아닌가?
이사엘라, 저 아이는 블랙 코어를 각성한데다가, 불완전하게나마 클라데스가 되기까지 했다.
톡시쿰을 완성하기 위해 안정적으로 타베스 시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급진파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면서 완전히 눈이 뒤집힐 거다.
저들이 기분 좋으면 이아테스를 이델리온이라고 속여 넘기기도 쉬워지겠지.”
이덴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거기다 이번에 정신 공격으로 관리국 본부 타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우리측 요원이 연구부의 귀중한 샘플을 빼돌려서 가져왔으니, 이제부터 그것도 같이 넘겨줄 참입니다.
급진파로서는 경사가 겹친 셈이지요.”
이스카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기 이마에 주먹을 갖다 대면서 물었다.
“아, 그래! 급진파는 그 샘플도 그렇게 탐을 냈었지.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무슨 샘플이지?”
“저도 생물학 전공이 아니라서 대략적인 것밖에는 모릅니다만, 우연찮게도 아까 얘기가 나온 이델리온과 관련된 샘플입니다.
산 속에서 암살자의 칼에 찔려 죽어가던 젊은이, 즉, 관리 번호 KF346392의 육신을 보존 캡슐에 넣어서 연구용 샘플로 만든 거죠."
“맞다. 이베리스의 특별 지시에 따라, 그 샘플의 원래 기억과 신분은 통째로 이델리온에게 넘어갔지.
진짜 이델리온은 지금쯤 자신이 처음부터 그 젊은이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가족과 친구를 자기 자신의 진짜 가족과 친구처럼 여기고 생활하는 중일 거야.
비록 상실자가 되긴 했어도 이델리온은 워낙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니,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아마도 조만간 지상 거주민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웅이 될 거다.”
이스카엘이 씁쓸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영웅이 된다는 말은 곧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뜻이다.
그는 바로 그런 식의 영웅 놀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베리스와 줄기차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산 속에서 가져온 젊은이의 몸은 가사 상태에서 고스란히 보존 캡슐에 넣어서 연구용 샘플로 만들어졌습니다.
제 누나인 이오렌스가 애지중지하는 샘플이지요. 아마 지금쯤 누나는 죽을 맛일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델리온에게 기억과 신분을 몽땅 빼앗긴 그 젊은이의 몸을 보존해서 만든 샘플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는 거야.”
이스카엘이 답답한 듯 다시 물었다.
“급진파가 계곡의 암살단이라는 지상 거주민 조직과 예전부터 은밀하게 결탁해 왔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계시지요?”
“당연하지. 그 순진무구한 학자들이 암살단에게 교묘하게 이용 당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문제의 젊은이는 어렸을 때 암살단과 연관이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톡시쿰을 몇 차례 투약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여동생의 신체에서는 아주 격렬한 변화와 각종 부작용이 일어나서 급진파 연구자들과 암살단의 지대한 관심을 끈 반면, 젊은이의 신체에서는 언뜻 봐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관심을 받지 못했죠.
당연히 톡시쿰 투약도 금방 중단되었고요.”
“그 젊은이와 여동생이 투약 받은 게 몇 세대 톡시쿰인데?”
“제 6세대요. 이스카엘님도 아시는 것처럼, 실체화된 타베스를 흡수한 크리스탈룸 결정체를 분쇄하여 고운 가루 형태로 만든 약입니다.”
“급진파가 그렇게 귀중한 약을 투약하기로 했으면, 그 젊은이와 여동생도 보통 사람은 아니겠군.”
“예, 오래 전, 바로 이곳, 파미아 화산 지하 임상 실험실에 갇힌 채 특별히 집중 관리되던 실험체 가운데 한 명의 후손이랍니다. 어머니쪽 혈통으로요. 프로젝트 스페스, 기억 나시죠?”
프로젝트 스페스. ‘스페스’는 ‘희망’이라는 뜻이다.
파미아 화산 지하 임상 실험실에서 타베스를 이용하여 무모하고 위험한 실험을 하던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지상 거주민들의 희망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상 거주민들의 머릿속에 코어를 만들어 줘서, 은하계 어디에서든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희망.
오래 전, 기부금을 내지 못하는 대신 임상 실험 대상으로 행성 카리타스에 들어온 선천적 상실자들은, 하층민으로나마 각 대륙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가끔씩 외계인에게 납치 당한 인간처럼 실험실로 끌려와서 임상 실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지정된 회수만큼 임상 실험을 당할 때까지 살아남으면, 그걸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사전에 정해진 약속이었다.
그런데 과거 카리타스 총독부에서 직접 설립하고 운영한 파미아 화산 지하 임상 실험실의 연구자들은, 특별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실험 대상자들을 아예 실험실 내부 감옥에 가둬놓고 집중적으로 임상 실험을 거듭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루 빨리 성과를 내라는 독촉에 못이긴 탓이었는데, 그게 바로 프로젝트 스페스였다. 대참사가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프로젝트 스페스라면, 200년 전, 미친 과학자들이 임상 실험 대상자 몇 명을 여기에 가둬놓고,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무리하게 집중적인 임상 실험을 진행했던 거잖아?
그리고 집중적인 임상 실험 대상이었던 특별 실험체 가운데 한 명이 격변 현상을 일으켜서 클라데스가 되어버렸지? 안 그래?”
“바로 그렇습니다.”
“그 프로젝트 스페스의 특별 실험체 가운데 한 명의 유전적 후손이 아직도 지상에 남아 있다고?
그때 그 혼란 속에서 특별 실험체는 다 죽거나 이형성체로 변해버린 게 아니었어?”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모계 혈통으로 확실하게 이어져 내려왔다더군요.
다만, 급진파와 암살단은 그 젊은이와 여동생의 어머니한테는, 고대 퀴르트 왕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왕실 자손을 찾고 있다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신중하게 접근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유전자 검사에 필요한 혈액 시료를 손에 넣고 검사한 결과, 프로젝트 스페스 소속 특별 실험체의 유전적 후손이 틀림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거 참, 200년 전에 특별 실험체가 클라데스로 변하는 바람에 대참사가 났는데, 급진파는 굳이 그 특별 실험체의 후손을 찾아다가 또 톡시툼을 투약하는 실험을 했단 말이지?”
이스카엘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썩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저도 영 찝찝합니다만, 저 자들이 무모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델리온에게 기억과 신분을 넘겨준 그 젊은이의 몸을, 나중에 관리국 본부로 운반해 와서 검사해 보니, 뜻밖에도 어렸을 때 몇 차례 투약하고 만 톡시쿰이 유전자 수준에서 기묘한 변화를 일으킨 게 확인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 6세대 톡시쿰이 중대한 유전자 변화를 일으켰는데도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여동생 보다 더 중요한 연구 샘플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정보를 전해들은 급진파가 문제의 젊은이를 그토록 탐냈던 겁니다.
관리국 연구부도 비록 톡시쿰 연구는 하지 않지만, 학자로서 흥미가 없을 수가 없었겠죠.”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생물학 전문가가 아니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필이면 성녀를 희생시킨 대참사를 일으켰던 바로 특별 실험체의 유전적 후손을, 대참사가 시작된 이 지하 실험실에 다시 데려오다니 말이야.”
이스카엘은 못내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불길함을 떨치고 좋게 생각하십시오. 그래 봤자, 다 죽어가는 젊은이의 몸을 보존용 캡슐 안에 가둔 샘플일 뿐입니다.
그게 설마 하루 아침에 느닷없이 격변 현상을 일으키겠습니까? 그냥 급진파라는 이름의 성격 까다로운 아이에게 사탕 하나 더 던져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긴, 급진파가 혼란 속에서 당황했다가 우리 선물을 받고 기뻐한다면 나쁜 일이 아니지.
거기다 내가 또 이델리온과 이사엘라라는 선물을 안겨주면 과연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는데?”
이스카엘은 결국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면서 빙긋 웃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가 이루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이니에스의 신병을 손에 넣는 일을 제외하면, 나머지 목표들은 그럭저럭 잘 풀려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베리스는 과연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와는 반대로 뭐 하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크게 좌절하고 있을 텐데?
이스카엘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베리스의 우울한 표정을 떠올리니, 특별 실험체의 유전적 후손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생겼던 불길한 느낌이 갑자기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제 10요새의 메인 데이터 센터에서는, 이베리스 국장이 이스카엘의 예상대로 무척 우울한 표정을 한 채 말 없이 서 있었다.
자비의 대륙이 멸망을 면한 것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잘 풀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고 싶어도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스카엘, 일루리아, 이센티스 등 옛 동지들과의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가 새삼 확인되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베리스가 평소 악착 같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던 국장으로서의 위엄 같은 건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완전히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에클레시아, 내가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베리스 국장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성녀 에클레시아를 생각하면서 벽에 기대어 지켜 보는 가운데, 수많은 부하 요원들은 행여나 국장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부지런히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풀이 죽어 있는데다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들 입장에서 이베리스는 여전히 무섭고 대하기 어려운 상관일 뿐이었다.
요원들은 메인 데이터 센터의 시스템을 체크하고, 목이 베인 채 피 웅덩이에 엎어져 쓰러져 있는 이클리프의 시신 등을 회수하느라 정신 없이 바빴다.
그 외에도 요새 안에는 많은 요원들의 시체, 이형성체와 소르데스가 소멸하면서 남긴 유기물 잔해 등 요원들이 가져가서 조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국장님, 보고 드립니다.”
문득 이스크마 비서관이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도 이번 일의 뒤처리를 위해 아까 관리국 본부 타워에서 이곳 제 10요새로 날아온 참이었다.
“말해 봐라.”
이베리스가 여전히 우울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스크마는 자기 직속 상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채고 여느 때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원래 제 10요새에 소속되어 있었던 인원 가운데 현재 살아남은 요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메인 시스템 제어 생체 모듈인 이사엘라는 이스카엘이 데려갔고, 경비팀장 이클리프는 목이 베여 죽었으며, 그 외 생체 모듈과 요원들은 전부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거의 다 살해 당한 것으로 보이더군요. 그리고······”
“그리고?”
“요새의 메인 시스템은 국장님께서도 잘 아시는 일레시아가 유일한 생체 모듈로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강제로 접속을 끊고 제어 캡슐에서 끄집어 내서 체포할까요?”
이스크마가 이베리스 국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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