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86화: 아들들의 전쟁 (17)

카란드라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카라미르가 케르비오 국왕을 선언했을 무렵.

서쪽 사람들은 네필린을 먼저 공격하길 원하고, 북쪽 사람들은 플로젠과 싸우기를 원하는 난처한 상황 속에서 한때 진지하게 논의되었던 중요한 타협안을 말이다.

그것은 우선 플로젠과 싸워서 케르비오 왕국의 독립과 건국을 승인 받은 다음,

이어서 플로젠 왕국과 동맹을 맺어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마지막으로 전력을 다해 서쪽의 네필린 공화국을 공격한다는 3단계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언뜻 보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절묘한 타협안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면, 그 타협안 안에는 플로젠이 케르비오 왕국의 독립과 건국을 쉽게 승인하지 않아서 전쟁이 길어질 경우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약점이 숨어 있다.

케르비오 족은 비록 플로젠 사람들을 끔찍이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얕잡아보는 건 절대로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플로젠은 결코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대단히 호전적인 군사국가이다. 절대로 순순히 이쪽 뜻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플로젠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케르비오로서도 여러 해 동안 끈질긴 소모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골치 아픈 문제란 바로 그것이다. 과연 서부 사람들과 북부 사람들이 그런 장기적인 소모전 내내 계속 굳게 협력할 수 있을까?

카로이도 마찬가지로 문제의 타협안 속에 숨어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란드라의 말을 받았다.

“잘 말해 주었소.

우리 서쪽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 타협안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나중에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 결과, 지극히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소.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플로젠과 끈질기게 싸워 마침내 북쪽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북쪽 사람들이 과연 우리들만큼 전력을 다해 네필린과의 전쟁에 나서줄 것인가 하는 의심 말이오.”

카란드라는 비록 서쪽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저쪽에서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은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선왕 폐하께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셔서 어떤 식으로든 그 의심을 해소하고 신뢰 보장을 해주셨더라면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오.

하지만 아쉽게도 그분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셨지만 융통성은 다소 부족하셨소.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훌륭한 타협안이 끝내 채택되지 못하고 사장되었으며, 서쪽 사람들도 결국 선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못했던 거요.”

“그렇다면 카로이님은 지금이라도 서쪽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든 신뢰 보장만 이루어진다면, 여전히 그 타협안이 쓸 만하다고 보는 건가요?”

카란드라는 그제서야 카로이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신뢰 보장으로 무엇을 요구할지도 어렴풋이 예상이 되었다.

그건 그녀로서는 지극히 달갑지 않은 요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극도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하오. 서쪽과 북쪽의 갈등과 대립은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그 타협안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기 어렵지 않소?

억지로 다른 해결책을 궁리하거나, 혹은 지금과 같은 갈등과 대립을 그냥 방치하느니, 차라리 신뢰 보장 방법을 찾아보는 편이 더 낫지 않겠소?

따라서 나는 그 신뢰 보장 문제가 바로 우리가 오늘밤, 이 자리에서 의논하고 결정해야 하는 핵심 사안이라고 생각하오.”

“그럼, 카로이님이 원하는 신뢰 보장이란 뭔가요? 선왕 폐하 시절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신뢰 보장이 지금은 가능하다고 보시는 까닭은 또 무엇이고요?”

카란드라는 계속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 겨우 억누르면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로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카란드라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 신뢰 보장을 위한 조건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오. 카란드라님, 저와 결혼해 주시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카란드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젠장! 설마 했는데 역시나 정략 결혼인가? 이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그렇게 바랐건만······

카란드라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극도의 거부감과 짜증을 감추면서, 겉으로는 억지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카로이가 정략 결혼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딸을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는 선왕 카라미르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했고, 심지어 카란드라에게는 아예 카로이가 청혼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았었다.

물론 카란드라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카로이의 청혼과 관련된 사정을 자세히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카로이가 일부러 이곳 카르몬 요새에 나타나자 설마 그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하는 마음이 들던 참이었다.

그런데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 맞는 법이라고, 카로이가 정말로 그 문제를 입밖에 내고야 말았으니, 두려움이 현실이 된 그녀로서는 정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하고 결혼이라고요? 진심이신가요? 저는 샤먼인데요? 그 청혼은 저더러 샤먼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간접적인 압박처럼 들리는군요.”

카란드라가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을 억누르면서 애써 냉정한 태도로 의문을 제기했다. 카로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샤먼이 미혼이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소?

예를 들어, 내가 세운 샤먼인 페르구스도 아들만 셋인 유부남인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소이다.”

“바로 그 페르구스를 대립 샤먼으로 세울 정도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분께서 왜 굳이 저와 결혼하고 싶어하시는 거죠?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요.”

“오해하지 말아주시오.

방금 전에도 누누이 설명했던 것처럼 페르구스를 대립 샤먼으로 세운 이유는, 카란드라님을 유일한 샤먼으로 내버려둘 경우, 서쪽이 북쪽에 굴복하는 모양새로 통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소.

어디까지나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단 말이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신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깊이 존경하고 있소.

케르비오 족 남자 가운데 당신처럼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카로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의 결혼이 성사되면 서로에게 수많은 이득이 있소. 우선 카란드라님은 케르비오 왕국 유일의 샤먼으로서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게 될 것이오.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대립 샤먼을 세울 이유가 없으니 페르구스를 샤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 것이며, 내 영향력이 닿는 한 중부 산악 지대에서 샤먼을 셋으로 늘리자는 얘기가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겠소.

내 아내가 된 당신의 권위를 깎아봤자 나한테 이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오. 내가 지금 한 말의 신빙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소."

“뭐, 그건 당연히 그렇겠죠. 카로이님은 그렇게 해서 제 권위를 최대한 올려놓고 남편으로서 그걸 적절하게 이용하려고 할 테니까요.”

카란드라가 약간 빈정거림을 섞어서 대꾸했다. 카로이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소. 샤먼으로서 카란드라님의 권위가 높아지면 이득을 보는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이 아니란 말이오.

나와 결혼한다고 해서 딱히 동생인 카르스덴 왕자님과의 혈연 관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오.

당신은 여전히 카르스덴 왕자님의 누님으로서 동생의 권위를 높여줄 수 있을 것이오. 안 그렇소?”

카란드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로이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물 흐르듯 수려한 언변으로 말을 계속했다.

“거기다 나와 카르스덴 왕자는 처남매부 사이가 되오.

따라서 나는 안심하고 그를 차기 국왕으로 추대할 수 있으며, 국왕이 된 처남이 언젠가 함께 전력을 다해 네필린을 공격할 것을 굳게 신뢰하고, 네필린 보다 먼저 플로젠을 공격하는데 진심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플로젠과의 전쟁이 비록 예상보다 길어지더라도, 우리가 결혼한 이상 서쪽과 북쪽의 단합은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소.

이렇게 수많은 이득이 있는데, 그래도 이 결혼이 내키지 않는단 말이오?”

카로이의 말은 상상 이상으로 논리정연하기 그지 없었다.

카란드라는 솔직한 감정으로는 이 남자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싫었다.

그는 교활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일 뿐 아니라, 중부 산악 지대의 부족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샤먼으로서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카란드라의 아버지가 가장 도움이 필요했을 때 외면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결혼 상대라는 관점에서도 카란드라의 입장에서 카로이는 최악의 남자였다.

그는 매끈하고 섬세한 외모를 지닌 미남이긴 했지만, 카란드라는 아버지나 남동생처럼 우락부락하다 싶을 정도로 선 굵은 외모가 취향이라서 생긴 것부터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인간은 서부 초원 지대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여자 관계가 아주 복잡하기로 유명했다.

사실 선왕인 카라미르가 카로이의 청혼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런 안 좋은 소문 때문이었다.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카란드라는 카로이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정략 결혼을 할 경우의 정치적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선왕인 카라미르는 케르비오 왕국의 북부와 중부에서 상당히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카라미르와의 정략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서부 사람들의 지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하는 딸을 그런 바람둥이에게 시집 보내지 않겠다는 배짱(?)을 부리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그 뒤를 이은 카르스덴은 아버지만큼 지지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카로이의 지지가 대단히 절실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카로이는 그런 상황 변화를 철저히 계산하여 정확히 이 시점에서 직접 카란드라를 찾아와 다시 한번 청혼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 둘의 결혼이 가져올 수많은 이득에 대해서는 물론 충분히 납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 가문적,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만큼, 먼저 차기 국왕이자 현재 제가 속한 페단 부족의 부족장이며 우리 가문의 수장이기도 한 카르스덴 왕자와 의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청혼에 대한 대답은 좀 기다려 주실 수 없을까요?”

카란드라가 최선을 다해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카로이는 빙긋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나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카르스덴 왕자님은 과연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있겠소?

플로젠의 페레이즈는 지금쯤 그 분이 있는 파로크 성채를 향해 진군하고 있을 게 뻔하오.

따라서 내가 데려온 3천 병력의 도움이 카르스덴 왕자님에게는 절실하고 다급하게 필요할 것이오.”

바로 이와 같은 수려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거기다 재수없기까지 한 화법이, 카란드라의 입장에서는 영 불편하게 느껴졌다.

“방금 그 말씀은 저에 대한 압박인가요? 저한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꺼낸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용서하시오.

하지만 나 또한 칼빈 부족의 부족장이자 서부 초원 지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런 약속도 보장도 이득도 없이 3천 병력을 무조건 카르스덴 왕자님께 보내드릴 수는 없는 일이오.

최소한 카란드라님의 개인적인 약속이라도 있어야 나도 지원군을 파견할 명분이 생기지 않겠소?”

카로이가 말을 듣고 카란드라가 짐짓 떠보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만약 제가 개인적으로 결혼 약속을 해놓고 3천 병력을 지원 받은 다음, 나중에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그 약속을 파기하면 어쩌려고요?”

“만약 그랬다간 서쪽과 북쪽은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적이 될 거요.

케르비오 족이 하나로 통합하여 외부의 적에 맞서는 일 역시, 그 약속 파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마 요원한 일이 될 터.

설마 당신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소.”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카란드라는 새삼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현재 이성과 감정이 사생결단을 낼 듯한 기세로 정면 충돌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뻔히 답이 나와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 답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카란드라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카로이가 다시 말했다.

“갑자기 지나친 심적 부담을 안겨준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오. 카란드라님을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소.

우리의 결혼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 만큼, 확실하게 대답하기 전에 동생인 카르스덴 왕자님과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도 충분히 이해하오.

그렇다면 이런 타협안은 어떻소? 지금 당장은 나중에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서로 적이 되는 일이 없이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가계약 정도만 체결하는 것이오.

나는 내가 데려온 3천 병력을 그 가계약에 대한 계약금으로 내놓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