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287화: 아들들의 전쟁 (18)

정략 결혼을 약속하되, 정히 부담스럽다면 나중에 쉽게 파기할 수 있는 가계약을 우선 체결하고 3천 병력을 계약금으로 내놓겠다.

카로이가 제시한 조건은, 카란드라의 입장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관대한 조건이었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로이님께서 3천 병력을 계약금으로 내놓으신다면, 저는 계약금으로 뭘 내놓아야 하죠?

설마 샤먼 자리를 페르구스에게 내놓으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카로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샤먼 자리는 당신 것이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우리가 결혼한다면, 나는 당신이 지닌 샤먼으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힐 이유가 전혀 없소.”

“그럼, 도대체 저한테 원하는 계약금은 뭔가요?”

카란드라가 또다시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참으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카로이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다른 건 필요 없소. 그저 약혼한 남녀간의 다정한 입맞춤이면 충분하오.”

카로이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카란드라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또 한번 불길한 느낌이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 속이 콱 막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냥 막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막힌 것이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역류할 것만 같았다.

좋아하기는커녕 평소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던 남자와 다정한 입맞춤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었다.

다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눈 딱 감고 저 자와 입맞춤을 하면, 동생인 카르스덴 왕자에게 서쪽 초원 지대에서 온 정예병 3천명을 즉시 지원군으로 보내줄 수 있다.

과연 '거부감'이라는 감정이 입맞춤을 거부해야 할 충분하고 합리적인 이유인 걸까?

카란드라의 머릿속에서는 재차 감정과 이성이 사생결단의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의 결혼에 대한 가계약을 체결하겠소?”

카로이가 예의 바르게 손을 내민 채 대답을 재촉했다. 그의 표정에는 이성적으로 따지면 이 제안을 절대로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오만한 자신감까지 엿보였다.

카란드라의 감정적 거부감은 상대방의 오만한 표정 때문에 한층 더 심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여 그 자신감에 보기 좋게 찬물을 끼얹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저 자가 약혼자의 권리로서 오늘밤을 같이 보내자는 요구를 했더라도 딱 잘라서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냥 입맞춤으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싸우는 동생의 얼굴이 번갈아 가면서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게 카란드라의 결단을 더 재촉했다.

그녀는 결국 깊은 한숨을 쉬면서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카로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짧은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이 제안을 거부해야 할 이성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잘 생각했소. 역시 당신은 현명한 여인이오.”

카로이는 빙긋 웃으면서 한 손으로는 카란드라의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카로이의 입술은 점점 카란드라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저, 지금 아까 희생제 때문에 얼굴이 엉망진창인데요.”

싫어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카란드라가 더듬더듬 변명조로 말했다. 하지만 카로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엉망진창이라니? 당신은 지금 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오.”

카로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침 없이 자기를 싫어하는 여인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 순간, 카란드라는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부감조차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 한가지 있었다.

과연 지금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는 이 남자의 입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인의 입술을 훔쳤을까 하는 부질 없는 추측이었다.

“이걸로 가계약은 성립한 거요.”

카란드라가 얼떨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카로이가 입술을 떼고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즉시 문 밖에 대고 소리쳤다.

“페르구스, 거기 있나? 안으로 들어와라.”

그러자 카로이가 임명한 대립 샤먼인 페르구스가 즉시 방 안으로 들어와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부족장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이 시간부터 너는 더 이상 서부 초원 지대의 샤먼이 아니다. 그 대신 원래대로 우리 부족의 기병 대장으로 복귀해라.”

여전히 정신이 없던 카란드라는 카로이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가계약을 체결하면서 딱히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도 않았던 일까지 시원시원하게 진행하는 모습이 상당히 놀라웠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페르구스는 사전에 언질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몸에 달고 있던 각종 주술 장신구들을 모두 떼어서 바닥에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다.

마치 카란드라에게 보여주려는 듯한 과장된 몸짓이었다.

“기병 대장으로서 너에게 복귀 후 첫 번째 임무를 맡기겠다. 지금 당장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 파로크 성채로 가서 카르스덴 왕자님과 합류하도록 해라.

그 다음부터는 그 분의 지휘에 따라 플로젠의 페레이즈와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 나도 추가로 지원군을 소집하여 나중에 합류할 것이다.

한시가 급하니 어서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페르구스는 머리를 숙여 명령을 받은 다음 신속하게 문 밖으로 나갔다.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자기네들끼리는 사전에 논의가 다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카로이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리 있는 모습을 보이자 카란드라로서는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카로이는 말문이 막힌 카란드라의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밤이 늦었고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도록 하시오. 날이 밝으면 카란드라님, 당신도 파로크 성채로 출발해야 하지 않겠소?”

카란드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로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그 방을 나왔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협상은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물론 카란드라는 그날 밤에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확실한 자기편인 케렌 부족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방금 전의 협상에 대한 후속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때쯤 되어서야 뒤늦게 앞선 입맞춤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케렌 부족 사람들에게 카로이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알려준 다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향기 좋은 약초를 달인 물을 가져와서 입을 한참 동안이나 헹구었다.

요란하게 입을 헹구는 카란드라를 지켜보는 케렌 부족 사람들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했다.

늙은 부족장 클로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그의 딸인 키오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키오나의 오빠인 칸레이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며, 키오나의 남동생인 키에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실 웃고 있었다.

“아니, 카란드라님, 어린애도 아니고 입맞춤 한번 했다고 그게 무슨 호들갑입니까?

제가 카로이의 입장이었다면 입맞춤만 하고 끝내지 않고, 오늘밤 당신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멋진 말까지 했을 겁니다.”

카란드라가 입을 다 헹구고 약초 끓인 물을 뱉어내자마자, 키에란이 놀리는 듯한 투로 말했다.

“닥쳐라! 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네가 내 기분을 알기나 하냐?”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기분이시죠?”

“내가 생생한 비유를 들어주마. 네가 그 인간하고 입맞춤을 했다고 상상해 봐라, 기분이 어떻겠냐?”

“그거야······ 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겠죠.”

“그래,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단 말이다.

입맞춤을 하는 순간에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는데, 아, 젠장, 회담이 끝나고 나니까 뒤늦게 확 역겨운 느낌이 밀려왔단 말이다.”

카란드라의 비유가 상당히 생생하게 와 닿았는지 키에란도 웃음을 거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키오나가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거칠게 말을 쏟아냈다.

“카로이, 이제 보니 그 놈은 처음부터 카란드라님을 노리고 여기 온 게 분명해요.

그 엉큼한 인간은 예전부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이번에는 케르비오 왕국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카란드라님이 표적인 거예요.

더러운 놈 같으니!”

이 말을 듣고 카란드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키오나를 진정시켰다.

“나도 그 인간이 정말 싫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그 자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계산에 따라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거겠지.

이번에 단 둘이 대화를 나누어 보니까, 그 사람은 의외로 여간내기가 아니더라고.”

그때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늙은 부족장 클로리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카란드라님, 나도 그 자가 설마 이렇게까지 치밀한 책략가인 줄은 몰랐소.

정략 결혼을 요구한 것도 그렇고, 그걸 언제든 쉽게 파기할 수 있도록 가계약이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약속해 놓은 것도 그렇고, 하나 같이 수법이 고단수요.”

키오나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네? 가계약 체결이 그 놈의 고단수 수법이라고요? 그건 카란드라님이 고집을 부려서 겨우 양보를 얻어낸 것 아닌가요?”

늙은 부족장은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카로이, 그 자는 처음부터 가계약을 기대하고 있었을 거다.

카란드라님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든 가계약만 체결한 상태에서 돌아가는 정세를 지켜보려고 했겠지.”

카란드라도 그 사려 깊은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도 나중에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상황에 따라 정략 결혼을 실제로 할 수도 있고 파기할 수도 있는 어중간한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이, 그 교활한 인간이 처음부터 노렸던 일인 것 같아요.”

“왜죠? 그 자는 진심으로 카란드라님과 결혼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요?”

키오나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진심은 무슨. 잘 생각해 봐라. 아직은 플로젠의 페레이즈와 내 동생 카르스덴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잖아.

예를 들어, 정략 결혼을 확실하게 약속했다가, 만약 페레이즈가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태에서 싸움이 하염없이 길어질 경우, 카로이는 처남인 카르스덴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된단 말이다.

그 자는 그게 싫은 거야.”

카란드라의 말을 듣고 키오나는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정략 결혼이 단순히 카란드라님의 미모를 노린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이루어지는 거라면, 바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신뢰하고 부담을 나누자는 의미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그건 순진한 이상론일 뿐이다. 카로이는 정략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최대화하고 짊어져야 할 부담은 최소화하려고 할 거다.

특히나 그 자는 의외로 페레이즈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많이 일치한다는 사실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카로이와 페레이즈 둘 다 네필린을 치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고 했다. 네필린이라는 공통의 적을 지닌 그들 두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가 있어.”

늙은 부족장이 딸의 순진함을 나무라듯 말했다.

특히나 공통의 적을 지닌 카로이와 페레이즈의 이해 관계가 많이 일치한다는 그의 말은 어쩐지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카란드라와 카르스덴은 아버지의 원수인 페레이즈와 절대로 타협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카로이는 페레이즈와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다.

“카로이의 머릿속에서는 매일매일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새롭게 정치적인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 거야.

만약 어느 순간 정략 결혼을 파기하고 페레이즈와 손을 잡는 게 더 유리하다는 계산 결과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 자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지.

정략 결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아버지의 냉정한 말을 듣자, 키오나는 욱하는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불쑥 심한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저와 카르스덴 왕자님 사이에 오가는 혼담도 결국 더러운 정략 결혼의 일종이 아닌가요?

설마 아버지도 매일매일 제 앞날을 가지고 그런 정치적 계산을 하고 계신단 말이에요?”

키오나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말실수를 깨닫고 당황해서 아버지와 카란드라의 눈치를 살폈다. 카란드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순진한 미래의 올케를 위로했다.

“당황할 것 없어. 엄밀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니까. 정략 결혼의 본질은, 각종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나면, 결국 서로 정치적 이익을 위한 더러운 거래가 맞지.

다만, 너와 카르스덴의 결혼은 상호간의 이익이 합치된 비교적 공정한 거래이니까, 정략 결혼 중에서는 그나마 아름다운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