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비지터
마교는 한 사람을 앞에 두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저희더러 마지막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져 달란 말인가요?"
"물론 대가는 어마어마할 것이네."
앨빈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허공을 봤다.
"대가? 대가라고요? 그래 그 대가를 한 번 들어봅시다."
"그대들은 모두 팬텀 가드너의 명예 기사에 추대될걸세. 그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임페리얼 나이트에 오르는 것도 가능하지. 그리고 각 개인에게 평생 쓸만한 황금도 주어질걸세."
앨빈은 테드버드를 바라보고 말했다.
"테드버드 굉장하지 않아? 네가 져 준다면 임페리얼 나이트에 평생 쓸 황금이 들어온다고 어때?"
앨빈의 말에 상석에 앉은 귀족가의 사내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여러분 중에 특히 능력이 탁월하신 분들은 왕가의 수호 기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정당하게 실력으로 대결할 겁니다."
"흠, 품에 들어온 행운을 내 치면 다음에는 행운이 아닌 흉이 들어 올 텐데 말입니다."
"품 안에 흉이 들어오든 행운이 들어오든 우리의 일이고 우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희 측 호의를 거절하시다니 이것 참 유감이군요."
"로안 손님이 가시려 하니 문을 열어 주어라."
로안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사내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는 팬텀 가드너에서 찾아온 전령이었고 마교 일행에게 내일 벌어지는 대결에서 져 줄 것을 부탁해 왔다.
"왜 우리한테 이런 부탁을 해올까? 이번 대회가 그들을 궁지에 몰만큼 무엇이 있었나?"
"팬텀 가드너의 오랜 집권이 무너진다? 아무래도 위신상 문제가 있겠지. 혹시나 하고 찔러본 것일 테지만 말이야."
"놈의 비웃음이 눈에 걸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오늘 저녁 조심해야 할 거야. 혹시라도 암살자가 올지 모르니."
앨빈의 말을 마치며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켰다.
"평생 쓸 만큼의 황금이라. 그거 솔직히 탐나긴 했어. 하하. 도둑의 기질을 아직 버리지 못했나 봐."
"누구든 황금의 유혹 앞에서는 한없어 약해지는 것이 정상이지. 내가 만약 저 전령이었다면 같은 테이블에서 만나지 않았을 거야. 개개인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옳지. 옆에서 누가 보고 있으면 결정을 망설이게 돼."
"그럼 혼자 있을 때 저 제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나야 당연히 거절했겠지.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에 악의 숨결이 깃들지 않기를."
"녀석들이 안달이 났나? 왜 이번 대결에서 비겁한 수를 써서 이기려고 하지?"
실버팽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2년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팬텀 가드너의 자존감 때문이겠지. 그 성역을 무너뜨리기 싫어서이겠고."
"그 자리를 쉽게 물러나긴 싫다 이건가? 그래도 팬텀 가드너쯤 되는 가문에서 이렇게 비겁한 수를 내보인다는 건 뭔가 이해가 잘 안 돼."
"다들 앨빈의 말처럼 의구심이 있을 거로 생각해. 지금 팬텀 가드너도 왕위 쟁탈권 때문에 시끄러워. 첫째와 둘째의 패권 싸움이 암중으로 치열하지."
"그것과 펠링턴 기사 대회가 무슨 상관이야?"
"자신의 업적에 관계되는 일이지. 펠링턴 기사 대회에서 우승하면 그만큼 위신을 세울 수 있어 그런데 패배를 하면? 받는 손해가 너무 커. 치욕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말이야."
"그럼 이번 대회 주관자가 누군데?"
"로렌 일왕자."
"잠깐 일왕자라면 네크로맨서와 엮인 배후의 인물이 아닌가?"
"그래, 일왕자는 저승의 자식들 사건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이제 슬슬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는군. 일왕자가 주체한 펠링턴 기사 대회에서 자신들이 지기라도 하면 엄청나겠군."
"물론, 솔라리스 전역에서 모여든 기사들은 하나같이 팬텀 가드너를 동경하고 있어. 그런 그들이 무너진다고 생각해봐. 타격이 아주 심할걸. 특히 이번 대회를 관장한 인물이 일왕자 세력이라면 더욱더 하겠지."
테츠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트리스탄의 연공을 도왔다. 트리스탄은 태청강기와 나한기공을 쉬지 않고 수련했다. 그의 끈질긴 습성은 부족한 재능을 보완하고도 남았다.
수련에 부지런한 테드버드나 로한슨에 비해도 트리스탄은 맹목적일 정도였다. 그의 그런 끈질긴 수련법은 다소 떨어지는 재능을 완전히 메꿀 정도였다.
열 살 정도의 나이지만 오크의 근력은 인간의 성인수준이었고 계속 연공한 내공으로 이제 경공도 충분히 펼치고 무기를 완벽하게 휘두를 정도가 되었다.
테츠는 오크의 특성을 더욱 돋우기 위해 특별히 외공인 나한기공과 태청강기를 전수했다.
이미 팔성의 수준으로 익힌 나한기공으로 인해 외기가 매우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테츠는 트리스탄과 항상 방을 같이 섰다. 바로 곁에서 지도하기 편하고 잔심부름시키기도 편했다.
달이 높게 떠오르고 테츠는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에 빠져들었다.
트리스탄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에 심취해 있었다.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울 정도로 무공 연마에 매일 몰두할 정도다.
그런 트리스탄의 얼굴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러다 더욱 얼굴빛이 굳어져 갔다. 눈을 뜬 트리스탄이 움직이려 하자 테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밤손님이 오셨나 보다."
테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트리스탄도 가부좌를 풀고 침대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기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했으나 내공으로 초감각을 가진 테츠는 너무나 쉽게 기척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심지어 트리스탄도 접근하는 자의 기척을 감지해낼 정도였다.
'후후, 마테니가 열심히 일하는군. 그냥 둬 볼까?'
여관의 지붕으로 올라온 것은 암살자의 움직임과 같았다. 팬텀 가드너에서 보낸 것인지 누가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움직임은 분명히 암살자다.
그리고 여관의 뒤쪽 베란다 위에서 지붕 위를 감시하는 자는 마테니였다. 그는 오늘 저녁 밤손님이 찾아온다고 확신하며 초저녁부터 은신해 숨어 있었다.
테츠는 마테니가 천마잠행으로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테츠는 살짝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봤다. 별빛도 좋고 달빛도 좋았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일왕자가 있어도 그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거다. 그의 수하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나섰겠지.
낮의 회유책이 안 통하니 최후의 수단을 쓴 거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너무나 뻔한 눈에 보이는 행동에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암살자를 보내면서 보내겠다는 통보를 할까? 지금 이치가 그렇다. 낮에 보여준 행동과 밤에 암살자를 보낸 것은 너무나 황당한 일이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수는 암살이 아니다. 테츠는 이 부분에서 뭔가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묘한 권력 싸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건 저 암살자를 잡아 보면 알 일이다.
테츠가 지붕 위로 날아올랐을 때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마테니를 정보원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그의 기술은 천마잠행부터 시작해 암살자의 기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테츠가 마교 일행을 암살하려 했던 마테니를 살려 주고 또 동료로 받아들인 것은 하나다. 그가 천고의 세월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기재 중의 기재이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기에 완벽한 신체를 타고 났고 마교 일행 중에서 무공을 익히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마테니가 가장 탁월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테드버드보다 두 배는 뛰어났다. 같은 수련을 해도 마테니의 성취도가 두 배는 높다는 뜻이다. 지금은 마교의 막내로 합류해 아직 지지부진하지만, 시간만 주어진다면 테드버드를 쉽게 따라잡을 것이다.
테츠가 나설 필요도 없이 마테니는 암살자를 제압해 버렸다. 교룡금나수의 수법으로 암살자를 완벽히 제압한 마테니는 그의 검은 두건을 벗어 냈다.
암살자는 의외로 젊고 수수한 인상의 사내였다.
"마스터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이놈은 이미 제가 제압했습니다."
"바람 좀 쐴 겸 해서 말이지. 그래 그놈은 누가 보냈지?"
"고문을 해도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게 암살자니까요."
"그럼 놔줘."
"네?"
"놔주라고."
"알겠습니다. 마스터,"
마테니가 움켜쥔 완맥을 풀어주자 암살자는 테츠를 쳐다보더니 주점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테츠는 마테니를 보고 말했다.
"실력을 발휘 할 때가 된 것 같지? 지금부터 저놈을 추적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 봐. 재미있을걸?"
마테니의 얼굴에 심심한 웃음이 올라붙었다.
"마스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실행하겠습니다."
마테니는 천마잠행으로 암살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테츠 내일 시합이니 인제 그만 자."
테드버드가 아래 창문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고 고함을 쳤다.
"알겠습니다. 이제 들어갈 참이었어요. 하하."
날이 밝아도 마테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행은 간단히 아침을 먹고 대회장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이 거리에 몰려나와 환송했다.
지금 분위기는 정확히 양분되어 있었다. 팬텀 가드너가 무너지지 않는 아성을 지킬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성 마교의 등장으로 팬텀 가드너가 집권한 최고 기사의 영예를 이제는 다른 기사가 가져야 한다는 부류였다.
오전에 두 번 대결을 펼치고 오후에 마지막 이인이 붙는 구도였다. 대결 상대는 어제 정해졌듯이 에이고와 테드버드, 테츠와 슈라어드였다.
사람들은 에이고와 테드버드의 대결보다는 실질적인 결승전이나 마찬가지인 테츠와 슈라어드의 경기에 관심을 보였다.
첫 번째 경기 에이고와 테드버드의 경기는 주 이벤트를 즐기기 위한 전야제 정도 되는 경기로 취급받았다.
어찌 보면 에이고와 테드버드는 성향이 비슷한 기사다. 둘 다 카이드 실드를 사용한 한 손 검 전사에 상대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깔끔한 성격이다.
둘 다 전통 기사를 표방하고 있으며 기사의 예와 명예를 중요시하는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진중하게 진행됐다. 도발도 없었고 비방도 없었다. 그들의 대결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에이고는 50대의 나이로 임페리얼 나이트의 기사 단장의 위치에 있는 기사였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신진들의 등용 무대인 펠링턴 기사 대회에 출전한 것인지 모른다.
팬텀 가드너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출전했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노련한 검술과 더욱 노련한 경험은 테드버드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테드버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마교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이다.
구화마검의 위력에서도 앨빈은 감히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노련한 경험과 세련된 구화마검의 대결이 시작됐다.
와이번의 문양이 새겨진 카이트 실드는 테드버드의 구화마검을 적중되어 굉음을 울려댔다.
이 검법은 먼젓번 대결의 앨빈에게서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자신의 애검 파이어 소드가 붉은 불길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피어 나왔다.
파이어 버스트가 구화마검을 향해 정면 대응해 나갔다. 검과 검이 부딪치고 화려한 불꽃쇼가 피어났다.
테드버드의 검 공세에 휘말려 공격 활로를 찾지 못한 에이고는 갑자기 방패로 대쉬를 해 테드버드를 몰아붙였다. 노련한 경험에서 오는 한 수였다.
에이고의 대쉬로 검의 흐름이 흩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이고의 검이 날아들었다.
파이어 버스트의 붉은 검기가 창처럼 늘어지면 테드버드를 후려쳤다.
왼팔에 내공을 올리고 카이트 실드를 들어 막았다. 이갑자의 내공과 팔성에 가까운 마나의 힘이 동률을 이루었다.
천마행공으로 거리를 벌린 테드버드는 구유참인도법으로 위에서 내리찍듯이 검을 날렸다.
결국, 승부수는 테드버드의 검법과 에이고의 파이어 버스트에 달려 있었다. 파이버 버스트는 일격 필살의 전사형 검술이라면 구유참인도법과 구화마검은 변화가 극심하고 투로와 함께 화려함이 돋보이는 검법이다.
이런 검법은 이 세계의 사람이 접할 수 없었던 터라 대응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더욱이 테드버드는 갈수록 검술에 심화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고수와 싸우면서 그의 검은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다듬어졌다.
일격필살의 검은 한번 막히면 다시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올리고 재정비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 기사의 대결은 기술의 대결이 아닌 힘의 대결이 주류를 이뤘다.
구화마검처럼 물 흐르듯 끊임없이 달려드는 검이 아니었다. 반면에 테드버드의 검은 기이할 정도의 움직임을 보이며 에이고를 압박했다.
방패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승부가 났을지도 몰랐다. 테드버드가 구유참인도법과 구화마검을 번갈아 사용하니 에이고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눈앞에서 검이 혼란스럽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테드버드가 천마행공으로 깊이 파고듦과 동시에 구화마검을 떨치자 에이고는 감히 맞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경공을 알고 있는 무인에게 일반인의 발걸음은 너무나 쉬운 먹잇감이었다.
천마행공으로 따라붙은 테드버드는 에이고의 가슴 앞에서 구화마검을 찔러냈다.
너무나 급한 나머지 방패를 들어 막았으나 그것은 테드버드가 원한 것이었다. 검이 뒤로 물러나며 방패로 부딪혀 오더니 다시 검이 안으로 들어와 에이고의 목을 그어버렸다.
그의 목덜미에 가는 선이 그어지고 살짝 피가 내비쳤다. 만약 테드버드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관중의 환호성이 누가 승리했는지 대신 답을 해 주었다.
"와, 테드버드가 이길 줄 몰랐는데?"
앨빈도 놀라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런, 그러면 결승에서 마교끼리 붙을지도 몰라, 아니 마교끼리 붙겠는데?"
실버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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