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41)
잊으려야 잊을 수 있을까? 저 여우 가면. 제이미 전설의 시작은 미치다. 오렌시아가 미치를 구하고 난 다음부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 그래 출세가 좋긴 좋구나. 고향 친구 목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제이미는 화끈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랐다.
"이야. 그런 네놈을 왜 또 구해 주었을까? 이놈이 누군지 알아? 밤의 자매단에서 유명한 세븐 어쌔신 중 한명이지. 네 놈 멱을 따려면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시몰레이크 후작의 생각이지."
"시몰레이크 후작? 그가 왜 나를?"
"귀찮으니까. 그동안 잘 써먹었는데 네가 다른 길로 가니 후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처분하려 그랬지."
"스톤 나를 보호해."
제이미는 은빛 갑옷을 입은 스톤을 보고 외쳤다.
"미쳤냐?"
스톤의 말에 제이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야. 스톤에게 명령해서 나를 견제해 보겠다고? 이놈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본데? 오늘, 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나야."
"미, 미치형. 감사합니다."
"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아. 오, 이런 제이미 나는 너를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야. 내가 아니더라도 저 녀석에게 죽을 목숨이었잖아? 오렌시아도 네가 죽었다면 잘 죽었다고 할 거야."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 새끼가? 그렇지 않다면서 오렌시아와 나브를 그곳에 버려둬? 굶겨 죽일 생각이었나?"
"그, 그렇지 않아요. 저도 나중에 걱정이 되어서 가봤더니 다행히 탈출하고 없어서 안심했던 겁니다."
"너는 네 출셋길만 생각하고 오렌시아와 나브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경도 안 썼어. 그리고 나와 스톤을 이용한 잔머리는 칭찬해 줄 만하다. 네 주변 사람은 죄다 멍청인 거냐? 검술조차 하지 못하는 너를 군단장 자리에 앉히다니 정말 웃기는 노릇이군."
"윽."
자신의 비밀을 똥구멍까지 다 꿰고 있는 미치 앞에서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비밀을 세상에 다 퍼뜨려 버릴까?"
"그는 부마입니다. 사람들이 아예 제이미를 떠받들고 있어서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스톤 네 말이 일리가 있군. 자 그럼 곧 군단을 이끌고 오크와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데 과연 소드 마스터의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을까?"
"글쎄요. 여느 때처럼 앞으로 나섰다가 혹 날아온 화살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겠네.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명령만 내려야겠네."
"오크의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는데 군단이 버텨 낼 수 있을까요?"
"어? 군단이 쫄딱 망하면 어떻게 될까? 부마 자리도 날아갈 거야. 어쩌면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할지도?" "미, 미치형."
"너, 대가리 굴러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정말 기회 아니냐. 미치에 스톤까지 가세하면 오크 정도야 우습지."
그 말에 제이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제이미는 무릎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털썩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미치형 그리고 스톤 아칸 시민을 도와주세요."
"와, 이 새끼 날로 먹으려 하네. 아칸 시민 위하는 척하는 거 보소. 인마 네 위신 채우려고 내 도움을 바라는 거 아니야? 아칸 시민은 무슨 아칸 시민이야, 개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부마 자리 잃고 싶지 않은 거지?"
"부마 자리 그냥 내놓을 겁니다. 만약 두 분이 아칸 시티를 도와주신다면 저는 미련 없이 떠나겠습니다."
"으하하. 이놈 머리 쓰는 것 보소. 그냥 부마로 남아 있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생색 한번 내고 숨어 버리겠다? 하긴 부마보다는 목숨이 중요하긴 하지."
제이미는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미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마냥 떠들었다. 그것도 제이미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고 있었다.
"네가 시몰레이크 후작의 손을 떠나 부마가 되면 시몰레이크 후작이 가만있을 줄 알았더냐? 오늘도 실패했으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를 죽이려 할 거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 그냥 눈 감고 그 검으로 목을 베면 끝이 나긴 하지."
"으, 미치형."
"인마 내가 왜 네 형이야."
"제가 형 다 죽어가는 거 살려 줬어요. 피 묻은 붕대도 일일이 제 손으로 갈아 드렸고요."
"···. 그래서 뭐? 한동안 잘 이용해 먹었잖아? 아무몰드 격투장에서도 이용하고 군단장이 될 때 내 도움이 컸지? 그 정도면 셈셈인 것 같은데? 아. 아니지 오늘, 네 목숨을 구해 준 것은?"
"에이 맘대로 하세요. 그럼 저를 죽이시지 왜 살려 주셨습니까?"
"스톤 이 새끼 막 가네."
"어떻게 할까요? 그냥 조용히."
스톤은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제이미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치가 살아 있는 것도 놀랄 일인데 백골 스톤이 미치와 함께 있으며 그것도 말까지 하니···.
"음, 당장 이 녀석의 목을 비틀고 싶지만 그래도 온정의 손길을 베풀어 줄까 보다. 오렌시아가 널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바로 죽였을 거다."
"오렌시아가. 그녀는 잘 있습니까?"
"그 입 닥쳐. 이제 오렌시아 따위 눈에 들어올까? 아그니스 공주를 손에 쥐었는데."
"여기 더 있다가는 눈에 띄겠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제이미는 청혼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팬덤 가드너 출입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제이미가 아그니스 공주에게 벌인 참혹한 짓을 알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만큼 공주의 남편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칸 시민의 열렬한 환호와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인기는 두 왕자를 넘어설 정도였다.
혹자는 제이미가 아그니스 공주를 범한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 떠들 정도였으니.
"흥, 왕궁이니 때깔이 다르네. 이런 곳에 발을 디디면 이젠 빼기 힘들지. 너 대단하다. 어째 지금까지 들통나지 않고 군단장 짓을 해 왔지? 하늘도 놀랄 일이다. 네 주변 측근들은 눈이 없거나 뇌가 없거나 비정상적인 놈들만 모아 놓은 거지?"
"미치형, 자꾸 놀리지 마세요."
"야. 배고프니까 먹을 거 좀 내와. 여긴 왕궁이니까 고급스러운 술도 많겠지?"
"알았어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그런데 저기 스톤은 어떻게?"
"내 부하다. 왜?"
"저기, 스톤은 제 말을 잘 들었는데···."
"왜,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그러니까 스톤이 제 말을 다시 듣게 해 줄 수 없을까요? 좀 불안해서요."
"스톤이 네 친구냐? 시끄러워. 나가서 밥이나 챙겨와."
제이미가 나가자 마테니가 말했다.
"밤의 자매단 중 하나가 죽었으니 시몰레이크 후작이 바짝 달아 오르겠군요."
"저 녀석 운이 정말 환상이지 않아? 딱 도착하니까 암습하는 순간이었어. 기막히게 운이 좋은 놈이야. 시몰레이크야 어떻게 하든 제이미의 출정을 막으려 하겠지. 오크의 사정도 안 좋아. 이제 더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걸려 할 거야."
"제이미 저놈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나보다 영감이 더 나선다니까. 성황이 저놈을 살려 주라 했어. 메흘린이 제이미에 대해 모든 것을 보고했는데 성황은 나를 치료해준 행동을 가장 높이 사서 황태자를 보살핀 행동이 모든 것을 앞선다고 하시네. 하하."
"저대로 놔둬도 얼마 가지 않을걸요? 저희가 따로 보호하지 않는 이상은···."
"저놈 진짜 운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려고 저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지."
"1써클 마나도 못 모으는 놈인데요?"
"그런데 놈이 잔머리 굴리는 거 그것도 좀 이상해 깡촌 시골 녀석이 굴릴 잔머리가 아니거든. 운이 녀석에게 집중하는 것도 그렇고. 살펴봐야지."
제이미의 가신으로 복귀한 케티스가 왕궁의 시종들을 데리고 요리 한 상을 차렸다. 제이미는 이미 아그니스 공주와 부부의 연까지 맺었고 청혼도 받아들인 참이라 그를 아예 부마로 생각하고 예를 다하고 있었다.
테츠는 괜히 제이미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눈짓을 했다.
"나는 이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며 긴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모두 내가 부를 때까지 물러나 있어라. 케티스는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공주님이 오시면 재빨리 선보고를 해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케티스가 나가고 테츠가 웃겨 죽는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았다.
"피오레 깡촌 녀석이 권력을 맛보더니 완전히 사람이 변했어. 명령 할 때는 웃겨 죽는 줄 알았네."
"미치형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전 이래 봬도 부마···."
"내 앞에서 깐족대면 목 부러진다."
"힝, 어서 식사나 하세요."
제이미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미치라는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님을 시몰레이크 후작을 대할 때도 이런 긴장감과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미치가 풍겨내는 위압감은 너무나 거대했다. 마치 커다란 산이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 우악스럽도록 가공할 위압감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다. 전투의 신이라는 무신의 칭호를 받는 노르딕 사령관 앞에서도 당당했던 제이미다.
미치가 풍기는 기도 앞에서는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위축이 되었다. 그 압박감은 대단해서 스튜 삼키기도 벅찰 정도였다.
"너, 부마 자리 지키고 싶고. 영웅 놀이도 계속하고 싶지?"
치부를 건드리는 말이지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네···."
"그래, 솔직한 것이 사내답지. 니글니글하게 변명하는 것보다 훨씬 있어 보여."
"감사합니다. 미치형."
저녁을 마치고 밤이 깊어 갈 때쯤. 방안에는 세 명이 남아 있었다.
"내가 너를 도와주려는 것은 시몰레이크 후작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알지?"
"네."
"오늘 너를 암살하려고 암살자를 보낸 사람이 시몰레이크 후작이다."
"저를 압박하여 사형대 위에 올릴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를 살려 주신 분인데···."
"이 바보야 상황이 바뀌었잖아! 너를 자신의 검으로 만들기 위해 뒤로 감추었는데 공주가 뒤통수를 강하게 때려 버린 것이지. 이제 너는 자신을 보호하는 검이 아니라 자신을 겨눈 검이 되어 버린 거지. 이것저것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벌리다 보니 수습이 안된 거야. 안되면 어찌한다? 죽여 버리면 깔끔하니 저따위 암살자와 계속 내통하고 있는 거지. 앞으로 저놈은 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계속 암살자를 보내올 거야. 제시어스 왕자의 친모인 세이렌을 암살 한 것도 시몰레이크 후작이지. 아그니스 공주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럴 수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히 넌 그의 개였으니까. 네가 아그니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나와 스톤이 널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네가 진짜 팬텀 가드너가의 부마라면 그에 맞는 역할을 해야지."
테츠는 제이미를 마주 본 상태에서 성력을 끌어 올렸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군.'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성력을 끌어 올리니 제이미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났다. 온몸에 거미줄 같이 엉켜 있었는데 특히 양손 부위는 완전히 새하얀 빛에 감겨 있었다.
'녀석이 내 상처에서 나온 피를 뒤집어썼군. 이러니 데오랑트가 제이미의 명령을 들은 거군.'
세렌과는 또 다른 경우다. 세렌의 경우 레베카가 정제한 피를 마셨다. 성력을 직접 받아들여서 내공과 섞은 경우다.
제이미는 오랫동안 성력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아주 천천히 몸 안으로 흡수됐다. 마치 문신을 새긴 것과 같은 효과였다.
성력은 문신처럼 제이미의 몸을 감쌌고 그것이 피부로 침착되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테츠는 제이미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거 정말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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