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94)
도대체 어떻게 돌아 가는 세상이냐고!
"마테니는 야생왕이 미리 손을 써 놓았기에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동안 괜찮을 정도로 활성화되었습니다. 성력을 많이 사용해서 몸이 어느 정도 적응력을 갖추었습니다."
"근데 저 꼴통은 누가 추천한 거야?"
"원래 어반마르스에 있을 때부터 제가 지켜봐 왔던 아입니다. 피가 다릅니다."
"그래? 누구의 피인데?"
"알마신입니다."
"어? 그러냐? 그놈의 피를 이은 놈이야? 이거 의외인데? 아직도 살아남은 놈이 있었나 보네. 많이 희석되었겠지?"
"희석이 아니라 그냥 인간입니다."
"음, 그럼 발볼이 없는 거 아니냐?"
"아직 각성 전이라 기대해볼 만합니다."
"참 희한해 어떻게 피를 이은 자들이 태자의 곁에 모여들지?"
"저도 마테니를 처음 봤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타마할의 피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길 그놈들 도대체 이 땅 위에 얼마나 씨를 뿌려댄 거야. 발정한 개새끼도 아니고···."
"태자님의 피는 준비 되어 있습니다."
"첫째야."
"네 스승님."
"너도 나이를 먹었다고 애들 챙기는 거 소홀히 하는 것 같더라."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태자를 각성시킨 요인이 무언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잖아?"
"저도 태자 전하가 그렇게 각성 하실 줄···."
"너도 알지. 내가 스무 해 동안 녀석을 망나니로 만들어 가면서까지 그놈들을 속여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연하게 넋 놓고 있다가 태자가 황궁을 나가는 것조차 몰랐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제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이야기 한 번만 더 들으면 만 번 정도는 될 거다. 성황은 틈만 나면 아니 뭔가 성질이 받치면 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성황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다.
"너, 내 앞에서 인상 쓰는 거냐?"
"아닙니다. 스승님."
"둘째야."
"네 스승님"
"네가 저 녀석들에게 피를 먹여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아, 참 골칫거리가 또 있지? 세렌 그 아이는?"
"그것보다 태자 전하께서 성력을 평범한 사람에게 사용한다면 끔찍한 일이···."
"레베카는 모양으로 있는 거냐? 그래서 보낸 것이 아니냐."
"세렌은 야트렌의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농도가 진합니다. 지금 저희 세대에서는 최상급입니다."
"휴후후후~ 태자는 어떻게 알아보고 척척 그런 애들을 모았을까? 너희는 세상을 다 돌아다녀서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한 애들을 태자는 다섯이나 데리고 있어. 이거 말이 돼? 너희는 그동안 도대체 뭘 한 거냐? 셋째야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야생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너희를 키운 보람이 없잖아. 응? 어떻게 생각하냐?"
"태자 전하가 각성할 때 저희는 피를 찾기 위해···."
"셋째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어라고?"
"거짓과 변명입니다."
"그래, 잘 아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두 개다. 넌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 내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이놈들 아예 죄송합니다가 입에 붙었어. 나를 즐겁게 만들 소식이나 물어 오지 허구한 날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냐?"
"죄송하···."
사신왕이 야생왕을 쏘아 봤다. 그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뭐 지나간 날 이야기 해봤자 부질없는 거고. 이번 아칸 사건으로 보면 놈들도 눈치를 챘으니 마족 따위나 불러내 혼란을 조성한 거겠지?"
"그럼 세렌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음, 여기로 불러온다면 태자의 오른팔을 없애는 거니 아쉽고 그냥 두려니 폭주하면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하고. 할 수 없잖아. 약식이지만 술식을 조금만 떼어서 레베카에 보내라."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세렌을 불러들이는 위험이 더 크다. 태자 혼자 버거워. 후. 이놈 새끼가 나한테 와서 제대로 각성을 받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이놈의 고집은 누구를 닮았는지. 만약 마교가 타격을 입고 자신이 키워 놓은 것들이 꺾이는 걸 보면 폭주할지도 몰라. 세렌이라도 있어야 녀석이 힘을 받을 거야. 아칸에서도 세렌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나마 세렌이 피의 농도가 짙은 아이라서 태자의 성력을 견딘 것만 해도 우리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어."
"그럼 명령대로 수행하겠습니다."
"내가 인간들 구제하겠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구나. 이런 허약한 종족을 구제할 가치가 있는지 원."
"···.'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절한 상태로 테츠의 피를 마신 메흘린과 아델리오가 다시 깨어나 비명을 지른 것이다.
"하. 소싯적에 너희들도 저놈들과 같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 않았냐?"
제럴드는 또 인상을 구겼다. 지겨운 레퍼토리가 또 시작된다.
"제럴드 이놈 이제 내 앞에서 인상 쓸 정도로 컸다 이거지?"
"솔직함을 가장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전 솔직히 지겹습니다."
"알았다. 알았다고. 그럼 이번에 메흘린에 이렇게 전해라. 마족이 곧 엠버스피어로 몰려갈 테니 몬도르반 지역으로 후퇴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둬. 수신인을 메흘린 앞으로 해 두고 태자에게는 따로 입을 놀리지 말고 조용히 준비하라고 해두고. 레베카 편에는 세렌을 제어하는 술식과 함께 테드의 힘을 억누르는 술식도 같이 보내. 테드를 가라앉혀서 어떻게 하든 몬도르반 지역으로 후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세렌은 차라리 그곳에서 제련하도록 해 두는 것이 좋겠어. 레베카에게 맡겨도 좋아. 녀석을 혹독하게 훈련 시켜 놓았으니 너희처럼 실수는 하지 않을 거다. 대신 저 두 놈을 빨리 각성시켜라. 수마족이 본격적으로 설치기 전에 싸울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놔."
"알겠습니다. 스승님."
제럴드가 입을 실쭉하며 말했다.
"아칸 내성에 있는 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어 그 두 놈은 따로 생각이 있어. 일단 놔둬. 그놈들 건드리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아. 윌리엄 그 꼬마 놈은 고생 좀 해봐야 해. 오냐오냐하고 놔뒀더니 하늘 높을 줄 모르고 기어 올라오는 꼴이란. 로만 울프 이 녀석들도 혼을 좀 내야 하는데."
"그리고 세르자비가 아리스토틀에 서신을 보냈더군요. 명령을 내리시면 중간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휴, 그녀는 제 버릇을 못 버린다니까. 놔둬 마녀의 피를 가져서 눈치가 백 단이야. 태자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내버려 둬. 태자를 보호한답시고 쓸데없이 카셈의 매직 오브를 먹여 놔서 더 골치 아파졌구먼."
"크아아악"
"아아악, 제발 죽여 주십시오."
두 사람은 질리도록 비명을 질렀다. 이곳은 황궁의 지하 신전 안이었다.
아칸의 남쪽 성문이 열렸다. 갑자기 도시의 성문이 봉쇄되어 상단은 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다시 성문이 열렸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을 들은 상단은 아칸으로 입성했다.
아칸은 어느 때 보다 활기차게 보였다. 거리마다 인파로 넘쳐났고 시민들의 얼굴도 밝았다.
메흘린은 서신 한 장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냄새가 너무 나서 구역질이 날 정도라고 합니다. 놈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케이사르가 확실합니다."
"녀석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가 없군. 일단은 모두 대기하고 트리스탄은 쪽으로 보냈던 인원은 철수할 수 있으면 철수하도록 해."
"며칠 전에 받은 책은 아리스토틀과 레노번 둘 다 아니라고 해서 소각처분을 할까 합니다."
"그래 알았어. 아드리안이 풀이 많이 죽었더라. 그 녀석이 가장 괴로워 할 거야. 자신의 고향이 자신 때문에 초토화되었으니."
"제가 알아서 다독이도록 하겠습니다."
"레베카의 제단으로 가 있겠어.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해. 참 그리고 오웬에게 나브 공주를 맡기고 델리안에게는 제시어스 왕자를 보호하도록 하고 부르스는 내성을 전체를 감시망에 올리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테츠가 가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루이즈가 서신을 가져 왔다. 마테니가 가고 난 다음부터 루이즈가 이 일을 대신 하고 있다.
"서신을 모아 왔습니다. 이번 서신에는 엄청난 것이 하나 섞여 왔습니다."
루이즈는 서신을 메흘린에게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엄청난 것이라고?"
메흘린은 서신을 하나씩 하나씩 살폈다. 그리고 눈에 확 띄는 서신 한 장을 발견했다. 서신에 이런 고급 금박지를 입힌 최상품의 종이를 사용했다면 황궁에서 보낸 것이 틀림없다.
보통 황궁의 서신은 진버트 경이 보내온다. 황제의 명을 듣고 서신은 진버트가 작성하는데 황제의 명에 자신의 의견을 곁들어 메흘린의 이해를 돕는다.
그런데 서신을 뜯었던 메흘린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서신 안에는 또 다른 서신이 하나 더 들어 있었는데 메흘린이 놀란 것은 서신을 봉인한 인장에 있었다.
보통 왁스가 섞인 양초를 떨어뜨리고 그 위에 인장을 찍는데 인장은 황궁 고유의 문장이 인장으로 찍혀 있다. 황궁의 인장이 찍힌 서신은 말 그대로 황궁에서 보낸 서신에 공통으로 찍히는 인장이다.
메흘린이 서신을 잡은 손을 떨고 있는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잉그람 황제의 친필 인장이다."
그렇다. 이번 서신에 찍힌 인장은 두 개. 하나는 어반마르스 황궁의 공용 인장이며 진버트 경이 서신을 보낼 때 늘 찍혀 있는 인장이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신에 찍힌 또 하나의 인장. 그것은 성황 잉그람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바로 용기사의 문양.
메흘린은 화들짝 놀라 그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무릎부터 꿇었다. 주신 제국 황제 본인의 인장을 접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며 평생 한 번 구경해 볼까 말까 한 엄청난 것이다.
메흘린은 아예 서신을 향해 큰절하고 공손이 서신을 확인했다. 황제가 직접 보내셨다면 분명히 태자에게 보내는 서신일 것이다.
이 서신은 자신이 직접 태자 전하께 전해 드려야 옳다.
"어?"
메흘린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수신인의 이름이 태자가 아닌 본인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황궁에서 온 서신은 모두 진버트 경이 작성한 것이었다. 황제가 분노하여 너 목을 친다고 말씀하셨다. 당장 칠무신을 보내 실 정도로 격앙되셨다. 너희 가족은 잘 있다. 등등 모두 진버트 경을 통해 황제의 상황이나 명령을 전달받는다.
그런데 지금은 황제 본인의 인장이 찍혀 있는 거로 봐서는 황제가 손수 쓰신 것이다. 그것도 수신인이 황태자가 아닌 메흘린 본인이었다.
작전 회의실 테이블을 지금 삼십 바퀴째 뱅뱅 돌고 있다. 겁이 나서 감히 서신을 만질 엄두가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 누구 있느냐?"
"네,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을 들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테츠는 말을 달려 엠버스피어 북쪽 레베카가 거주하는 곳으로 갔다. 요즘 메흘린이 찾지 않으면 거의 레베카 옆에 머무른다.
마음대로 쏘다닐 수 없으니 레베카 곁에서 정보를 듣는 것이 가장 빨랐다. 테츠의 포탈과 사령의 눈을 이용하면 굳이 사람을 보내지 않아도 아칸의 정보를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상점에 들러 평소 레베카가 가장 좋아하는 빵을 사고 과일 음료도 곁들여서 사람들이 마녀의 저택이라 부르는 레베카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경비가 필요 없는 곳이라 경비도 없고 더군다나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 한 명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다. 레베카는 황궁에서 자랐고 그녀가 있던 곳은 화려함이 극치를 달리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먼지와 더러움을 아주 싫어했다.
"나 왔어. 별일 없었어?"
"간 지 얼마 됐다고 그래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거참 그 꼬마 모습은 정이 안 가네. 어차피 볼 사람 없는데 그냥 본 모습을 하고 있으면 안 돼? 어찌 잠자리 때만 본모습으로···. 습관 되겠어."
"그리려고 그러는 건데 이제 눈치채셨나요?"
"아, 그만두자 너와 말꼬리 잡기 해서 이긴 적이 없다. 다른 소식은 없고?"
"에르제베트는 저에게 굴복하기로 했어요. 단, 그녀의 딸 엘리제를 무사히 구출해 주는 조건으로요."
"그거 잘됐군. 당장 건너가서 엘리제를 데려올게."
레베카는 도끼눈을 뜨고 테츠를 쏘아 봤다.
"야, 야, 눈알 튀어나오겠다."
"지금 그곳이 얼마나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그런 소릴 해요?"
"농담한 거야. 농담."
"재수 없는 농담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그건 그렇고 그 가짜 책 두 권 가지고 온 녀석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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