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드리치 요새에서의 분전 그 희망을 보다
엘드리치 요새의 성주로 앉아 있는 사람은 테츠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에미르슨 백작은 억지웃음을 띄며 테츠를 맞이했다. 왕자의 전쟁 때 노르딕 사령관과 함께 엘드리치 요새를 탈환하고 그 이후 성주 대행을 하고 있던 차였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아칸 왕가에서는 엘드리치 요새를 끝까지 사수하란 서신 한 장만 달랑 보내 왔을 뿐이다.
"이곳으로 진군하는 오크의 군세는 약 사만 정도입니다."
"허허, 사만이라. 그 같은 대군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번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테츠 경,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해안을 내려 주십시오."
"팬텀 가드너는 이미 엘드리치를 버렸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왕가의 명령을 어기고 후퇴한다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난감할 따름입니다."
"싸우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싸워야지요. 하지만 굳이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군사는 충분하니 제 말을 듣고 병력과 군량미를 모두 페복으로 옮기십시오."
"페복이라면 여기서 족히 보름은 걸릴 거리입니다."
"후퇴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단 몇 시간 안에 후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퇴한다고 하여 이 전쟁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력을 정비하여 오크의 군대를 각개 격파해 나갈 생각입니다."
"테츠 경이 그리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구려."
"오크를 대륙 깊숙이 끌어들이면 그들도 힘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 사만 병력을 완전히 묻어 버릴 생각입니다. 그들은 쉽게 롱홀드를 손에 넣을 거라고 자만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츠 경이 계획이 있다 하니 제가 숨을 쉬어도 되겠습니다. 오크를 상대하려고 전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목숨을 내놓아서는 안 되지요. 지금은 후퇴하지만, 반격의 검을 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테츠는 포탈을 통해 엘드리치 요새의 모든 식량과 재물을 페복으로 옮겼다. 그리고 궁수와 마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근접 병들도 모두 이동시켰다.
테츠는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정찰병을 보고 오크의 군대가 멀지 않은 곳까지 당도했음을 알았다.
"마법사와 궁수를 모두 자리를 잡아라."
테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이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절대 성문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의 임무는 성문으로 접근하는 오크를 쓸어 버리는 것이다."
궁사와 마법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엘드리치 요새의 병력은 자신들을 제외하면 전무한 상태였다. 에미르슨 영주는 테츠에게 병력 통솔전권을 넘기고 페북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의 눈과 귀는 망루에 선 테츠에 고정되어 있다.
들판을 가로질러 새까맣게 몰려오는 오크를 보니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테츠는 성문 앞에 리치 두 마리를 소환했다. 롱홀드 내에 있는 여덟 개의 요새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요새가 엘드리치 요새다. 특히 성문은 웬만한 공성 해머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큼 견고했다.
오크의 도끼질 몇 번에 쉬이 부서질 성문이 아니었다. 오크는 언제나 그렇듯이 문답 무용이다. 그들은 고함과 함께 도끼와 녹슨 철검 따위를 흔들며 뛰어 들어왔다.
"모두 공격해. 날이 저물 때까지만 성을 사수하면 된다. 활이 바닥이 나도 좋다. 마나가 말라붙어도 좋다. 기력이 없어 팔을 들 수 없을 때까지 활을 놓지 마라."
화살과 각종 마법이 우박 쏟아지듯 오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테츠는 두 마리의 리치를 조정하여 성문 앞에 쇠기둥처럼 버티고 오크를 막아 냈다.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왔지만 엘드리치의 성문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오크가 우회하고 있습니다."
"모두 후문으로 이동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라."
성문 앞에는 이미 죽어 나간 오크가 산처럼 쌓였다.
원거리 병력이 모두 후문 방어로 빠지자 리치 두 마리로는 버거웠다. 테츠는 허공에서 성벽을 타고 성문 앞으로 뛰어내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널브러져 있는 무기를 허공으로 띄웠다가 흡성대법으로 한데 뭉쳤다.
그리고 재빨리 뭉친 무기에 오른손을 대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나의 피와 살을 양식으로 만들어진 라마단의 원령이여 피조물에게 신의 제물이 되기 위한 격통을 주소서. 숭고한 믿음에 답하여 주소서. 그 믿음이 현실에 도래하도록."
테츠는 다섯 자의 문자를 새겨 넣으며 주문을 마쳤다.
-그오오오오
한데 뭉친 무기가 꿈틀거리더니 하나의 인형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죽어 나자빠진 오크가 들고 있던 무기가 무섭게 들러붙었다. 아이언 골렘은 자석처럼 무기를 빨아들였다. 무기가 붙으면 붙을수록 몸체는 덩달아 커졌다.
수백 자루의 무기가 달라붙은 신장 5m에 해당하는 아이언 골렘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테츠는 골렘을 자율 활동으로 지정해 두고 골렘의 어깨를 밟고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
후문으로 간 후 리치 두 마리를 소환시켜 다시 전투에 가담했다. 오크들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벌떼같이 성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결국, 후문이 먼저 부서져 내렸다. 아이언 골렘을 만드느라 라마단의 정수 소비가 많았기에 리치를 두 마리 이상 소환하기 힘들었다.
그 사이 날이 어두워졌고 금세 어둠이 내려 앉았다.
"모두 중앙광장으로 이동해라. 탈출한다."
테츠는 중앙광장에 포탈을 열었다. 궁수와 마법사들은 포탈을 통해 모두 안전하게 페복의 요새로 이동했다.
그 무렵 휘영청 밝은 달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라마단의 정수가 달빛을 받아 힘을 싣기 시작했다.
"한바탕 놀아보자꾸나."
테츠는 포탈을 닫고 그 자리에 망자를 소환했다. 달빛을 받은 요기가 힘차게 넘실거렸다.
상대는 인간이 아닌 오크니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낄 이유가 없다. 정문의 아이언 골렘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더 많은 무기를 몸체에 붙어 신장이 8m나 커져 있었다.
라마단은 무지막지하게 소모되었지만 달빛은 라마단의 요기를 더욱 달구었다. 그럴수록 테츠는 짙은 사기에 노출이 됐다.
아잠바크는 가끔 농담으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 라마단의 전승자가 오래 살지 못하는 이유는 라마단의 정수에 삼켜 져서지.
라마단의 정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더욱 짙은 사기를 뿜어낸다. 그것이 몸에 축적이 되면 뇌가 마비되고 결국 정신을 놓아 버리게 된다. 그리곤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테츠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내공으로 사기를 몸 밖으로 밀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라마단의 정수를 단련해도 몸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아마도 망자 천오백을 소환하는 괴물은 라마단의 전승자를 통틀어 테츠가 최초일 것이다.
오크들은 골렘을 무너뜨리려 공성해머까지 동원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테츠의 머리에서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도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처절한 싸움은 새벽이 올 때까지 계속됐다. 테츠는 어지러움이 극에 달해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 이 정도만 해도 오크의 수를 충분히 줄여 놓았다. 더 하다가는 정말 쓰러지겠다."
테츠는 고개를 좌우로 한번 끄덕여 보고는 포탈을 열었다.
이날 전투로 오크는 게헨울드 요새 합계 일만의 병력을 잃어버렸다. 테츠 단 일인으로 이 정도 오크를 없애버렸다는 것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사실이었다.
***
요른의 성 브라이트 성주는 앞뒤가 꽉 막힌 자였다. 왕자의 난 때도 이곳은 전쟁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롱홀드의 가장 남쪽 그러니까 테일리아드 가문이 다스리는 지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다.
제국소속으로 뭉쳐진 왕정국가이기에 국경을 맞대고 있기는 하나 병사들의 충돌 같은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손에 검을 잡을 일은 단 하나 산적 따위가 출몰했을 경우뿐이다.
대체로 안일한 생활을 해 왔던 요른의 병사들은 사기(士氣)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단지 아칸 왕궁에서 온 한 통의 서신에 붙잡혀 있을 뿐이다.
"윌리엄 대공의 명은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인지는 모르나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오크와 싸울 것입니다."
테츠의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브라이트 성주는 그를 낯선 이방인으로 취급할 뿐이다.
엘드리치 전투까지 총 일만을 잃은 오크지만 삼 만의 병력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이었다.
메흘린이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엘드리치 요새를 점령한 오크 군이 어떻게 움직일까였다. 척후병들이 신중히 주목했는데 삼만의 대군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하를 시작했다. 그들은 가장 서쪽에 있는 페복 요새를 무시하고 남쪽의 요른 요새로 진격했다.
덕분에 페복에 모인 모든 병력은 안전하게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일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는군."
메흘린은 서신을 꽉 움켜쥐었다.
앨빈은 궁금한 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엠버스피어에 드디어 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본진이 올 때까지 도시 방어에 주력할 생각인가 본데 어처구니없게도 시민들을 가장 일선에 세웠다고 하는군요."
"녀석들 시민들을 방패막이로 쓰려고 하는 거지. 놈들다운 생각이야."
"본대가 당도할 때까지 걸리는 시일은 이제 일주일 정도 남았습니다. 일주일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지 아니 그 일주일을 과연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그리고 성황의 성군도 롱홀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페복은 이미 병사들로 넘쳐 나고 있어. 조만간 병력을 제대로 통솔하지 않으면 난장판이 될 것 같아."
그때 영주의 거처로 테츠가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테츠로 쏠렸다.
"요른의 성주는 막무가내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고 하는군요."
메흘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트 성주는 고집이 있고 한결같은 남자입니다. 그는 윌리엄 대공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병력은 이제 오천입니다. 잘만 활용한다면 사만과의 전투는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앨빈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더 일찍 해도 될 말이 아니었습니까? 마교는 일당백입니다. 능히 혼자 오크 서너 마리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엘드리치에서 일만을 줄였습니다. 이제 삼만이지요."
그 말에 앨빈과 일행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테츠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테츠가 가진 라마단의 힘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테츠 혼자서 일만을 줄였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지금 괜한 농담을 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고서야?"
앨빈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테츠를 올려 봤다.
"앨빈은 제 능력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실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네크로맨서의 소환술이 있으니 적시에 천오백의 군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막강한 죽음의 군대죠."
메흘린은 손뼉을 치며 다시 분위기를 추슬렀다.
"테츠 경이 있으니 전략만 잘 세우면 오크 무리를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요른의 요새는 작은 규모지만 방어가 매우 용이한 구조입니다. 뒤는 절벽이고 정문의 성문은 해자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리를 내리지 않는 이상 쉽게 공략 가능한 성은 아닙니다."
"오크는 앞만 보고 달려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만큼 놈들의 뒤를 치기 쉽다는 말이지요."
애시턴과 메흘린은 서로 주고받으며 두 사람이 함께 세운 계획을 마교 일행에게 설명했다.
"이번 계획은 오크가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였을 경우만 가능합니다.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오천으로 삼만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병력을 희생해가며 오크와 일전을 벌일 명분은 없습니다. 우리는 왕가의 군대도 아니니 그들의 전쟁에 굳이 나설 이유는 없습니다. 더욱이 이왕자는 마교를 거리낌 없이 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십시오. 이번 전투는 누구의 명령도 아닌 오직 우리 마교의 의지로 싸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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